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9장—이집트와 에티오피아 교회의 안식일
 표면상 에티오피아에서 안식일의 준수가 다소 갑작스럽고 강력한 추진력에 의해 철폐된 배경에는 13세기 전반에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과 안디옥의 대감독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전에는 관례적으로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의 야곱파 교회의 감독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대감독 키릴 3세(Cyril III, 1235-1243)가 “이집트의 점증하는 군사력과 정치적 우세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의 야곱파 교회를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을 임명한 것 같이 보인다.”41 안디옥 교회의 대감독 이그나티우스 2세(Ignatius II)는 에티오피아의 순례자인 압바 토마스(Abba Thomas)를 에티오피아의 대 감독으로 임명함으로써 보복하였다.42 (173.4)
 압바 토마스가 실제로 에티오피아에 부임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13세기 후반에 에티오피아의 국왕들이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들에게 보낸 서한들은 에티오피아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새로운 대주교를 받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시리아 출신의 일부 성직자들은 불분명한 신임장들을 가지고 도착했으나 국왕은 에티오피아 교회와 충분한 합의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였다. 1290년의 에티오피아에는 “시리아 출신의 대감독들이 주재하고 있었으나 그들에 대한 반대는 계속 증가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국왕은 129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과 이집트의 술탄에게 대감독을 임명하여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공한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존중되지 않았다.”43 (173.5)
 같은 시기인 13세기 후반부에 이집트의 수도사들이 에티오피아로 갔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콥트교회의 개혁으로 힘을 얻은 그들은 쇠퇴한 아비씨니아 교회(Church of Abyssinia)의 획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리고 그 “회복”에는 안식일 문제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44 (174.1)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향력 외에 13세기 중엽 이후에 강력히 추진된 수도원 부흥 운동의 영향도 함께 고려해야한다. 알렉산드리아 교구에 대한 충성심과 “시리아 출신 대감독들”에 대한 반발감이 합쳐져서 새로 부흥된 수도원들이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안식일 철폐 노선을 수용했으며 그 영향을 국가 전체가 받게 되었던 것이다. 14세기와 15세기에 일어난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 주수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수도원 지도자인 유스타디우스(Eustathius)에 의해 비롯되었던 것 같다. (174.2)
 유스타디우스로 부터 자라야코브(ZaraYaqob. c.1300-1468)까지: 유스타디우스(c.1273-1352)는 사라이(Sarae)에 자신의 수도원을 세웠다. 많은 학생들이 그에게 몰려 왔고 그는 새로운 이집트 교회에서 파견한 새로운 대감독 야코브(Yaiqob)가 에티오피아에 도착할 때 까지 그들을 가르쳤다. 그는 왕궁으로 가는 길에 새로 부임하는 야코브 대감독을 만났다(C.1337). 그는 그 직후 종교적인 논쟁의 결과로 이 나라를 떠났다. 그의 반대파 성직자들은 그가 이 나라를 떠나기 직전에 그의 생명을 위협하려고 하였다. 카이로에서는 동료 이집트 순례자들이 그가 일요일 뿐만 아니라 안식일도 지켰다고 대감독에게 고소하였다. (174.3)
 유스타디우스는 대립의 중심 문제가 안식일의 준수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십계명과「사도들의 교회법」(Apostolic Canons)에 근거하여 자신을 변호하였다. 그는 대 감독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죽기 위하여 그대의 나라로 왔다. 이 세상에서는 안식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에서 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안식일과 다른 휴식의 날들을 우리처럼 파괴하라”고 했으며 나는 거절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대가 나에게 말한다. ‘우리와 기도로 하나되자’. 그러면서 그대는 안식의 날들을 지키지 않는다.45 (174.4)
 유스티디우스와 그의 제자들은 카이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세테(Scete)수도원에서 사로잡힌 것 같다. 이 “잔인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 때문에 그를 탄압했다.”46 그는 팔레스틴으로 부터 키프러스로 갔으며 거기서 종착지인 아르메니아로 갔다. 그는 14년 후에 그 곳에서 죽었다. 그의 사후에 그의 여러 제자들이 에티오피아로 돌아가 그곳에 남아있던 그의 제자들과 합류하였다. 그들은 주로 왕국의 북부 지방에 수도원들을 세우고 알렉산드리아의 공식적인 노선을 추종하는 타클라-하이마노트(Takla-Haymanot)수도원과 맞서는 유스타디우스의 수도원 운동을 출발시켰다.47 (174.5)
 유스타디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반(反)안식일 노선에 반대하는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구심점으로 삼아 단결하였다. 그들은 수적으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급속한 숫적 성장은 안식일을 적대하는 세력에게 큰 경각심을 일으켰다. 에티오피아 교회의 아브나가 직접 유스타디우스의 추종자들을 탄압하는 운동을 지도하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1388-1398년에 에티오피아의 대감독의 자리가 공석으로 있었다는 것이었다. 신임 감독 바르돌로메우(Bartholomew)가 드디어 도착하였고 그는 국왕 다윗에게 유스타디우스 수도원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엄격한 기강 아래로 굴복시키도록 요청하였다.48 (175.1)
 국왕 다윗(Dawit)은 안식일의 문제를 논의할 신학 토론회를 계획하고 압바 필리포스(Abba Filipos)와 다른 유스타우스파 지도자들을 소집하였다. 그 결과 필리포스와 그의 몇 동료들이 수감되었다. 필리포스는 1400년부터 1404년까지 감옥에 갇혀있는 4년 동안에 왕실의 측근들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가 석방되자 국왕은 유스타디우스의 제자들에게 “두 안식일을 모두 지키라”고 명령했다.49 두 안식일이란 곧 안식일과 일요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식일의 준수를 반대하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노선은 유스타디우스파와 동조하지 않는 여러 교회들과 왕실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던 것 같다. (175.2)
 왕의 칙명으로 보호를 받은 유스타디우스 수도원은 전국에 광범위하게 퍼져 갔으며 왕실안에도 지지 기반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안식일을 다시 지키기 시작하는 수도원들이 늘어갔으며 안식일의 준수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이 왕자의 종교 교육을 전담케 되었다.50 (175.3)
 자라 야코브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분명하게 안식일 준수의 신념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그는 유스타디우스파 신앙이 정치적으로 세력이 약한 안식일 반대파에 의하여 저항을 받고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즉각 국가의 종교적 통일정 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집트 출신의 감독들인 미카엘(Mikael)과 가브리엘(Gabriel)은 에티오피아 교회의 어떠한 공식적인 변화에도 반대하였다. 드디어 1450년에 최종적으로 국왕은 다바라 미트마크(Dabra Mitmaq)공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일에 대하여 국왕 자신이 기록을 남겼는데 “하나님은 우리들의 신앙적인 아버지들인 미카엘 감독과 가브리엘 감독에게 두 안식일에 대한 존중을 계시해주셨다. 하나님은 그전에 여기에 왔던 이집트 출신의 에티오피아 감독들에게는 이러한 계시를 보여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영적 아버지들인 아바 미카엘과 아바 가브리엘은 두 안식일을 준수하기로 우리와 합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그들의 서명으로 선언하였다.”51 이렇게 해서 국가의 종교적인 통일은 달성되었으며 국민들의 종교 생활을 지도하기 위한 여러 가지 법령들이 마련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여하한 일도”하지 말아야 하며 교회로 부터 너무 먼 거리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는 금요일에 사제를 그곳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주말을 머물면서 종교적인 교훈을 주도록 했다.52 (175.4)
 자라 야코브의 통치 기간에 마사파 베르한(Ma아iafa Berhan:“빛의 책”)의 최종 편집이 완료되었는데 이 책의 중요 관심사는 안식일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국왕 자라 야코브 자신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근래에 에프라임 아이삭(Ephraim Isaac)이 새로운 결론을 내놓았다. 이 책은 15세기 이전에 안식일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교훈적인 강의록을 원본으로 하여 집성한 것이라하였다.53 (176.1)
 마사파 베르한(Mashafa Berhan:MB로 약칭)은 안식일과 일요일 준수를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다. 두 날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토요일은 자주 “첫번째 안식일”로 호칭하였다. MB의 제 1권은 “첫번째 안식일”을 위한 여섯 개의 읽을 거리로 구성되어있다. 두 번째의 독서물의 내용중에는 “안식일과 일요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의 다소 긴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농사일, 쟁기질, 곡식이나 풀을 베는 것, 나무 짜르기, 맷돌 돌리기, 맥주를 발효시키는 것, 포도나 꿀술을 발효시키는 것, 익은 곡식을 타작하기, 가까이나 멀리 가서 채소를 뜯는 것, 나무 쪼개기, 야생동물 사냥하기, 새잡기, 낚시질, 지붕덮기, 나들이, 곡식단 쌓기, 밭에서 곡식을 집으로 나르기, 울타리 치기, 저술을 위해 글쓰기, 짐승가죽의 무두질, 철연장 만들기, 흙일, 음식을 만들기 위해 궂은 일하기, 옷 만들기, 바느질, 양털짜기, 바구니 만들기, 야자나무로 모자 만들기, 남종이나 여종을 벌주기 등 세상일을 아무것도 안식일에 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안식일에 여자를 가까이 하고 ∙∙∙ 물을 퍼 올리는 것은 안식일을 모독하는 일이다.”54 (176.2)
 금지된 목록 다음에 안식일과 일요일에 할 수 있는 일들의 목록이 나타나고 있다. “동물을 죽이는 것, 음식을 요리하는 것, 반찬을 준비하는 것”등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첫째 안식일이나 일요일에 죽인 짐승의 고기를 구워서 먹든지 삶아서 먹을 수 있다.”55 일견해서 다소 방임적이라고 볼 수 있는 규칙을 제정한 것은 만약 백성들에게 이 정도의 일마저 허용하지 않으면 안식일과 일요일이 기찮고 슬픈 날이 되어 교회가 기대하는 대로 이 날들이 백성들에게 기쁨의 날로 경험될 수 없게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MB가 비록 안식일과 일요일 두 날을 지키도록 명령하고 있으나 MB가 편찬된 주요 목적은 안식일이 폐했다고 주장하는 사라들을 대항하여 안식일의 준수를 옹호하려는 것이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의 불가변적 특성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마태복음 5:18, 19절이 여러번 인용되고 있다. 마태복음 5:18, 19절에 언급된 “이오타”(Iota “일점”)는 사실상 십계명을 대표한다. 이것들은 변경될 수 없다. 한편 예수의 이름의 시작은 “이오타”(Iota)이고 숫자상으로는 “이오타가 10이다.”56 십계명과 예수님과 이오타는 이처럼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있다. MB의 저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번째 안식일의 명예를 파괴한 사람은 교회의 기초를 뿌리채 뽑은 것이다. 그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십계명에서 중요한 한 단어를 철폐시킨 것이다.” “십계명으로부터 단어 하나를 파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파괴한다면 그는 삼위일체의 이름을 파괴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삼위일체의 한 분을 해친다면 그는 진실로 그의 기독교를 소멸시키는 것이다.”57 (176.3)
 오해의 여지를 결코 남겨놓지 않기 위해서 십계명의 본문 전문이 제2 독서물과 제6 독서물에 반복해서 포함되어있다.58 (177.1)
 다음의 단락은 MB의 제 1권의 중요한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다. (177.2)
 “안식일의 준수는 일요일의 준수와 동등하다. 만약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요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의 영예는 율법과 선지자와 복음과 사도들의 결의록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존귀히 여기는 자는 친히 자신의 손으로 그 계명을 기록하시고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존귀하게 여기라고 명령하신 분을 존귀히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안식일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존귀하게 여기신다.”59 (177.3)
 MB의 다른 다섯책들은 비록 여러 부분으로 산만하게 구성되어 있으나 율법과 안식일에 대한 언급을 더 많이 하고 있다. 제2권에는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한 노력이 많이 나타나 있다. 예수님이 첫번째 안식일을 모욕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복음서의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60 자라 야코브는 안식일과 일요일의 두 날을 준수하는 신앙 운동을 부흥시키고자 했을 때 14세기에 수도원 갱신 운동과 병행한 신앙 문학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이미 편찬되어 있던 책들 그 중에서도 사도들의 명칭을 차용한 일부 저작들과 그밖의 저작물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저작물들은 모두 게에즈(Geez)어로 기록된 것들이었다. 그러나「사도들의 교훈」(Didascalia) 같은 일부 저작물들은 더 이른 시기에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177.4)
 「사도들의 교훈」의 에티오피아 역본에는 안식일과 일요일의 준수가 강력하게 분부되어 있다. 다음의 파편도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29장:“우리는 수난 주간의 안식일이 아닌 경우에는 안식일에 금식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셨으므로 우리도 안식일을 존중하자.” 30장:“그리고 안식일을 존귀히 여겨 그날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교회에 모이도록 하자.” 38장:‘오 전능하신 주님이시여 주님께서 안식일을 지정하시고 그 날에 당신의 모든 일로 부터 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그날에 우리의 손의 모든 일로 부터 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식일에 쉬어 당신께 겸허히 감사하고 모든 악으로 부터 안전케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에게 안식일 마다쉬라고 명하셨다. 우리 주님께서 안식일에 그의 모든 일로 부터 쉬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보다도 더 큰 날은 그의 거룩한 부활의 날이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말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부활의 날을 지키라고 가르치셨다.”61 (177.5)
 자라 야코브의 안식일 준수 규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다른 문건은 이른바「이집트 교회 규칙서」(Egyptian Church Order) 라는 것이다. 이 규칙서는「사도적 헌장」(Apostolic Constitutions, c. 375)의 8권의 일부분인 히폴리투스「사도적 전통」(Apostolic Tradition)에 기초하였다. 에티오피아 번역의 한 법조문을 보면 “주간의 안식일과 첫째 날에 감독은 집사들이 떼어놓은 떡들을 모든 백성들에게 친히 자신의 손으로 나누어 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몇 줄 뒤에는 안식일과 일요일을 마땅히 다른 날들과 다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였다.62 자라 야코브는 또「우리 주님의 언약」(The Testament of Our Lord)의 에티오피아 역인「키단」(Kidan)을 안식일과 일요일 준수의 권위 있는 진술로 이용하였다.63 (17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