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8장 로마서 9-11 장의 교회와 이스라엘
 교회론은 세대주의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들에 따르면 교회는 이스라엘과 구별되는 것이며,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이 아니다.1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전반적인 계획안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를 위한 다른 목적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계신다. 라이리(C. C. Ryrie)는 분명하게 진술하였다. “교회는 어떤 개념으로도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지 않고 있다∙∙∙.교회 시대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전혀 나타나 지 않는다. 그것은 여분의 삽입이다.”2 신약은 “그것들을[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교회에 걸려들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이 모 든 것은 성경에 없는 것을 첨가한 것이 아니라 두 단어 [‘이스라엘’‘교회’]의 용례에 대한 연역적인 연구에 기초하고 있다”4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135.1)
이스라엘교회라는 단어의 용례는 신약에서 민족적 이스라엘이 그 자체의 프로그램을 갖고 계속되고 있으며 교회는 결코 소위 “새 이스라엘”과 같지 아니하며, 그것은 오히려 이 시대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별된 사역으로서 주의 깊게 계속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5
(135.2)
 이러한 확언이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문법적—역사적 주석 방법을 사용하였을 때에도 신약으로부터 입증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주석의 규칙들은 무엇인가? (136.1)
 성경적 판단에 있어서의 문맥의 역할
 교리를 구축함에 있어 종종 무시되는 근본적인 주석 원칙은 결정적인 문맥의 역할이다. 각 본문과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그것이 속해 있는 가장 가까운 직접 문맥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해석자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사용된 한 단어의 의미를 성경의 다른 역사적 문맥에 사용된 같은 단어 위에 그대로 적용할 위험은 항상 있다. 두 본문이 일견하기에도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일 때 각각은 그 자체의 역사적 문학적 문맥으 로부터(예를 들어, 로마서 3:28야고보서 2:24) 이해될 필요가 있다. (136.2)
 그러므로 로마서에 사용된 이스라엘 이란 용어는 로마서의 문맥 안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사용된 같은 단어의 용례는 갈라디아서의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문맥은 상당히 다르므로 교리적 일률성을 구축하기 위해 무시되거나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억지스러운 교리적 주석이다. 그런 것은 더 이상 성서적 문맥의 뉘앙스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136.3)
 로마서 문맥 속의 ‘이스라엘’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그의 친족 “이스라엘 사람들”(롬 9:3, 4)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교회 밖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종종 언급하는 외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을 또한 구분한다(롬 11:5, 13). 이 같은 구분이 왜 로마 교회에 있었는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각 다른 종말론적 약속과 운명을 지닌 두 종류의 백성을 가지셨다는 원칙하에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사이를 구분한 것인가? 내적 증거는 각각 반대의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로마교회 내의 유대인과 이방인 두 파벌들에게 서로 우월감이나 특권의식으로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롬 11:18, 25; 12:3 참조).6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민족적 기원에 대한 바울의 구별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위한 다른 두 언약 약속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바울 서신의 주제는 교회에게 이스라엘 선택의 목적은 전 세계의 이방인 들에게 익스라엘 하나님과 메시아의 구원하시는 빚을 나눔으로써 그들 모두에게 축복이 되는 것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사 42:1-10; 49:6). (136.4)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의 배경에 반하여, 바울은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롬 9:30-31)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고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바른 언약 관계에서 있는 지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은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믿는 믿음을 행사하는가 여부에 달려있다(롬 9:33). 그와 같은 믿음만이 언약의 축복을 확신시킨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에게 약속된 새 언약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롬 9:24-29). (137.1)
 엘렌 G. 화잇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렇게 근본적으로 이방인을 향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137.2)
이스라엘에게 보증으로 주어진 축복들은 같은 조건과 같은 정도로 광대한 하늘 아래의 모든 민족과 개인에게도 보증된 것이다.7
(137.3)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믿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연관되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에 있어서 이 서신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8 그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회개하는 것을 돌 감람나무(이방인들)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한 감람나무로 접붙임되는 것으로 묘사한다(롬 11:17-24). 이러한 방식으로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과 그리스도의 교회와 맺은 새 언약 사이의 영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시각화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이방인들은 법적으로 감람 나무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하나가 되고 아브라함의 뿌리를 나누어 갖는다(18절). 로마서 11장에서 접붙임 된 감람나무의 비유가 주는 교훈은 교회는 옛 언약의 이스라엘의 뿌리와 줄기로부터 살아간다는 것이다. (롬 11:17-18). (137.4)
 그러나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이 느끼는 특별한 부담은 이스라엘 민족관 관련된 거룩한 “비밀”을 공개하는 것이었다. (138.1)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롬 11:25-26).
(138.2)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바울이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이방인 구원과의 역동적인 상호관계 [houttos] 속에 놓았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는 “온 이스라엘” 혹은 “충만함”(롬 11:26, 12)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롬 11:25) 사이의 상호 작용을 기대한다. 바울은 연속되는 세대의 순서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즐거워하는 많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호의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 신비한 관계를 비록 현재적 충만을 위한 필요(세 번씩이나 이제[now])를 사용. 역자 주, 한글개역에는 나타나지 않음)를 인식하고 있지만 명확한 묵시적 개념으로 묘사한다. (138.3)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유대인들의 그리스도 거절] 이는 너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1, 32).
(138.4)
 우리들은 이 놀라운 클라이맥스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현저하게 상호 의존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 학자가 적절하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방인 없이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허용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없이 이방인들에게도 그같이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9 (138.5)
 이스라엘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그의 신실하심—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함이 없으시다”(롬 11:29)—에 관한 이 놀라운 계시에 사로잡혀, 바울은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에 대한 놀라운 조망을 공개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인에게 흘러들어서 “모든” 이스라엘 이 이방인들이 즐거워하는 그 같은 자비를 갈망하여 일어날 것이다. 바울의 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이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타락한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롬 11:11, 강조 첨가). 하나님의 의도는 기독교 교회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많은 유대인들을 구원하는 이 방법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비밀”의 한 부분한 것이다. (139.1)
 오직 이러한 이스라엘과 교회의 상호의존 안에서만 모든 인류를 위한 같은 구원의 복음,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유지될 수 있다. (139.2)
역사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고(롬 10:14ff; 11:11, 14, 22비교), 믿는 이방 세계가 지금 그들에게 다가가 얻는 활동의 결과(11:31) 이외에는 회개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0
(1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