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3 장 안식일과 새 언약 제 1 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점검
 최근에 많은 이 전 안식일 준수 자들이 받아들인 “새 언약”신학의 주요 특징은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함에 있어서 새대주의적인 강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예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간략하게 다음의 두 대표적인 연구를 점검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세계교회의 목사인 죠셉 트카(Joseph Tkach)가 마련한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제목의 목회자 보고서(Pastor General Report)와,

 (2) 라쯔라프가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담은 위기에 처한 안식일이라는 책 제5장, 제12장 그리고 제15장이다. (60.1)
 (1) 두 언약 사이의 구분에 대한 죠셉 트카의 견해
 죠셉 트카는 1994년 12월에 낸 자신의 목회자보고서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자신의 동료 목회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20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는 옛 언약은 “율법 꾸러미”에 대한 순종 위에 있는 조건적인(conditional) 것인 반면에, 새 언약은 율법의 요구에 대한 순종이 필요하지 않는 무조건적인(unconditional) 것이라는 사실이 그 차이점이라고 주장한다.4) (60.2)
 트카에게는 안식일이 옛 언약의 “율법 꾸러미”의 일부이며, 따라서 이것이 곧 왜 “우리가 새 언약 속에서 명령된 그 안식일을 옛 언약 속에서 찾지 못하는지 그 이유다.”5)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그 백성들은 그것을 순종할 마음이 없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아셨다(신 31:16-21, 27-29). 아브라함과는 달리, 그들은 믿지도 않았고, 그리고 신실하지도 않았다(히 3:19). . .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예언하셨다. 그는 옛 언약에서조차도 그것에 대해서 언질 하셨다. . . 물론 옛 언약에 결함이 없지 않는 한, 새 언약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었다.”6) 만약 옛 언약에 “무엇인가 심각한 오류”가 있은 것이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던 잘못된 언약을 우선적으로 주셨는가? 그렇다면 그 언약 자체에 무엇인가 “심각한 오류”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백성이 그 언약과 관련을 맺는 방법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는가? 만일 인간의 반응이 옛 언약을 맺고 있는 하나의 요인이었다면, 새 언약에서도 한 요일이 될 것인가? (60.3)
 새 언약의 우월성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비해 우월한바, 그 이유는 그 언약이 더 나은 약속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8:6).”7) 트카는 새 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약속에 기초했던 아브라함의 언약을 갱신한 것으로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너희들이 그렇게 할지라도 나는 이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다. 아브라함은 이미 충분히 이루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땅으로 갔으며,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되었다.”8) 아브라함과 같이,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들이며, 순종의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61.1)
 트카는 기록하기를 “새 언약에는, 믿음이 요구된다. . .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교재를 나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에 기초하여 구원을 받는다. . .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과 약속에 기초하여 가진다. 시내산에서 부가된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다. . . 율법 꾸러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폐기되었으며, 이제는 새로운 꾸러미가 있다.”9) 이러한 진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구원이 율법을 지키므로 옛 언약 안에서도 가능했다는 근거 없는 추측에 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그 이유는, 제6장에서도 볼 것이지만, 율법에 대한 순종이 은혜로우신 구원의 마련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율법의 준수가 결코 구원의 기초가 된 적이 없었다. (61.2)
 트가에 의하면, 옛 언약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그 언약이 “율법 꾸러미”에 기초해 있어, “죄의식을 정결케 할 수 없”기 때문이다.10) 다른 말로,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에 기초해 있고 또 마음속에 성령께서 역사하기 때문에 기능을 발휘한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백성들은 변화되며, 그들은 더욱 성장하여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 . . 새 언약은 우리의 내적 존재에 영향을 끼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 . 그분의 희생이 우리를 희생하게 만들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를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구별한다.”11) (61.3)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기꺼이 순종하든지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마술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그러한 마술적인 능력을 성령과 그리스도의 보혈에 돌리는 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을 마술적인 능력의 하나로 돌리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이것은 또 다른 율법주의의 형태인가?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과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가능하게 만드는가? (61.4)
 하나님의 세계교회는 “신약의 구절은 특별히 안식일이 폐해졌다고 인용하지 않는다”12)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교회는 그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끝난 옛 언약의 일부가 되었다고 믿고 있으므로, 그 안식일 역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모든 옛 언약이 폐해졌다고 말하는 구절들이 있다. 안식일을 포함한 모세의 율법은 그것들이 지켜지기를 요구받지 않는다. 우리는 성령으로 살도록 명령받고 있지, 결코 돌에 기록된 그 율법으로 살도록 명령받고 있지 않다. 안식일은 지금은 폐해진 것들, 곧 성전, 희생제물, 할례, 거룩한 떡, 그림자와 같은 것들에 반복적으로 비유된다.”13 ) 이 진술은 본 장의 뒤에서 제시되어 있지만 눈에 띄는 많은 부정확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신약이 도덕적인 율법의 계속성과 의문의 법의 불연속성 사이를 구분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고전 7:19). 특별히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끝난 레위인들의 봉사(히 7:18; 8:13; 10:9)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 있는 안식일 준수(히 4:9) 사이를 명확하게 대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61.5)
 하나님의 세계 교회의 “새 언약 신학”의 평가
 하나님의 세계 교회의 문헌에 제시된 “새 언약” 신학에 대한 소상한 평가는 우리로 하여금 본 장의 제한된 영역을 초월하도록 인도할 수도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본인은 단지 몇 가지의 기초적인 관찰을 하고자 한다. (62.1)
 구원의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세계교회의 “새 언약”적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구속사의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을 다른 백성들에게는 다른 근거들에 의해서 제공하셨다는 잘못된 세대주의적인 추측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믿음에 기초하여 무조건적으로 제공하시므로 수행하셨으나, 그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계명, 또는 트카가 말하는 “율법의 옛 뭉치”라고 부르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에 근거하여 조건적으로 주시기로 동의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어떤 사람도 완전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배열이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시고, 아브라함에게 가지셨던 “믿음의 배열”로 순서를 바꾸셨다. 무엇인가 좀 더 쉽게 만들기 위해서, 새 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포함한 옛 율법의 뭉치에 있는 대부분을 버리셨으며, 이번에는 성령을 통해서 마음속에 역사 하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62.2)
 만일 이런 시나리오가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의 지속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구속사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두 전혀 다른 기초에 근거하여, 즉 구약의 언약 안에 있는 인간의 순종에 기초한 근거나, 또는 새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초에 근거하여, 구원을 주셨다는 것을 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 이상의 것을 함축하고 있는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민인 유대인들이 불순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이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방법을 수정하셔서, 구원이 믿는 자들에게는 인간의 성취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새 언약을 이행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62.3)
 그러한 신학적인 구조는 하나님을 변경이 가능하신 분으로 만들고, 아울러 인간이 행하는 실수 가운데 매이도록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히 13:8) 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구원은 구약이나 신약에서는 언제나 인간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음이요 최상의 선물이다. (62.4)
 율법에 대한 순종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보존하기 위한 기회로 마련되었다. 이것이 바로 레위기 18:5에 기록되어 있는 의미이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본문에서 약속된 생명은 앞으로 올 미래의 생명이 아니라(단 12:2에서 처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얻는 금생의 평화와 풍요로운 생애를 의미한다. 그런 생명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원칙에 조화로운 삶을 살므로 즐기고 보존될 수 있는 생명이다. (62.5)
 시내 언약: 율법과 은혜
 “새 언약” 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한 부분은 시내 언약 역시 새 언약이 마련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백성”(출 3:10)이기 때문에, 모세에게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여 가나안땅에 정착시키려는 계획을 나타내 보이셨다(출 3:7-10).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신약의 신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과 꼭 같이 당신의 은혜로우신 구원을 사전에 마련해 놓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신다. 성경에서 전자는 후자의 한 표상이다. (62.6)
 트카가 경시하고 있는 것은 구원이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반응한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 .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0, 31).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으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의 계획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63.1)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보증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그들을 사랑하신 고로(신 7:6 참조), 그들의 부분에서는 아무런 공로 없이(신 9:4 참조) 그들을 택하셨다. 이방 국가들로부터 그들을 구분하시므로, 그분께서는 스스로 그들을 보존하셨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시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율법의 원칙을 따라 당신을 섬기는 봉사를 위해 헌신한 예배 공동체로 만드심으로 자신에게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다. 시내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상에서 표상(types)이 원형(antitypes)과 만나므로 실현되었다. (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