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 존스는 워싱톤에 있는 대총회 종교자유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그 초청을 수락했으나, 그 후 사양하고 배틀크릭으로 가서 제이 에이취 켈록 박사와 함께 일하였으며 그의 영향 아래서 그는 대총회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 결과로 그는 교단의 일과 결별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교회 지도층들과 적대적 감정이 자람으로 1909년 출교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결별이 있기 전에 당시 대총회장이었던 A. G, 다니엘스가 1909년 대총회 회기에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존스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때 이후로 대부분의 재림교회 교리를 고수하며 안식일 준수자이었지만 그는 교회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외에도 그의 전기 작가인 죠지 나이트는 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조직된 교회에 대한 그의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존스는 재림교회와의 우의를 갈망하였던 것같이 보인다.”4 그는 뇌출혈로 인해 1923년 5월 12일 배틀크릭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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