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7장—초대 기독교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1
 5. 태양 숭배와 일요일의 기원
 앞에서 간략하게 조사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조건들은 왜 기독교가 안식일을 철폐하고 그 대신에 다른 날들 중에서 예배의 날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그 많은 날들 중에서 어찌하여 하필이면 일요일을 기독교의 새로운 예배일로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일요일에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과 관련된 설명이 있었지만 부활 사건 외에 일요일 자체의 위상과 관련된 설명이 요구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요일이 기독교의 예배일로 채택된 것은 로마세계 내에 태양신(神)의 숭배가 신속히 보급되어 일요일이 7일 주간의 첫 번째 서열로 격상된 사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유력한 주장이 제시되어 왔다. 아래에서는 이 주장의 역사적 타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48.2)
 태양숭배의 파급. 최근까지 이루어진 여러 연구들의 결과로 제2세기부터 무적의 태양신 숭배가 로마시를 위시하여 제국 전체에 급속히 만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9 주후 1세기 말경까지 로마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고전적인 전통에 자주 등장하는 그들의 “고향 땅의 태양 곧 솔 인디게스(Sol Indiges)를 숭배하였다.”60 그러나 제 2세기부터는 동방 종교인 “무적의 태 양신”(Sol Invictus) 이 두 가지의 다른 양상으로 로마 사회에 침투해 들어왔다. 즉 동방의 태양신은 비공식적으로는 솔 인빅투스 미트라(Sol Invictus Mithra)이란 명칭으로 로마사회에 들어왔고 공식적으로는 솔 인빅투스 엘라가발(Sol Invictus Elagabal)이란 명칭으로 로마에 들어왔다.61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그의 생존기(150-230)에 로마의 대 경기장(circus maximus)은 “주로 태양신에게 바쳐진 것이었고 그 신 전은 그 도시의 복판에 세워졌으며 그 신상은 신전의 지붕 꼭대기에 빛을 발하며 서 있었다. 창공에 위치하는 태양을 지붕 아래에 설치하는 것은 그 신상의 거룩한 영예를 정당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62 하드리아누스(117-138)는 자신의 주화에서 자신을 태양과 동일시하였으며 태양에게 콜로수스 네로니스(Collosus Neronis)를 바쳤는데 이것은 네로 황제가 자신을 머리 둘레에 일곱 가닥의 긴 빛줄기를 두른 태양신으로 표상하여 건립한 것이었다.63 하드리아누스는 이 큰 사상에서 네로의 형체만 뜯어내어 그 대신에 자신의 형체를 주조했던 것이다. (148.3)
 태양신 숭배가 대중의 사랑을 받아 로마제국 내에 급속히 파급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은 로마 사회가 황제와 태양신을 일치시켜 황제를 태양신으로 예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왕은 곧 태양이다”라는 부활절(Easter) 신학과 정치적인 배려들에 의하여 더욱 고취되었다.64 이스터(Easter) 솔 인빅투스 엘라가발 및 미트라와 관련을 갖고 있던 로마의 군단(軍團)들도 태양 종교를 서방세계에 확산시키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서 그 당시의 종교 혼합적인 세태를 들 수 있다. 종교적인 혼합 추세에서 여러 중요한 신들이 태양신에 동화되거나 통합되었다.65 (149.1)
 종교의 이러한 동화와 통합 과정의 뚜렷한 본보기가 칼라칼라 황제의(211~217)의 공공 목욕탕(mithraeum of the thermae)의 원주에 새겨져 있는 두 명문이다. 첫 번째 명문에는 “유일하다. 제우스, 세라피스, 헬리오스(즉 태양신), 우주의 무적의 주재이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66 우주의 무적의 신 태양신에게 제우스, 세라피스 신들이 동화되고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신들을 열렬히 신봉했던 칼라칼라 황제가 사망한 후에는 세라피스의 이름이 뜯겨나가고 그 대신에 미트라의 이름이 새겨졌다.67 두 번째 명문에는 “제우스, 헬리오스, 위대한 세라피스, 재산을 주시며 은혜롭게 들으시는 구세주, 무적의 미트라”에게 바치는 봉헌문이 포함되어 있다.68 미트라가 세라피스, 헬리오스, 제우스 등과 함께 나란히 열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이 모든 신들의 구현을 뜻하기 위하여 미트라의 이름이 제일 끝에 대표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되는 현상이다. 마르셀 사이몬에 의하면 태양신 헬리오스는 “각각 다른 근원을 가지고 있는 여러 신들을 하나로 흡수하고 통합하는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요소”였다.69 (149.2)
 태양신의 인기와 태양신 숭배의 획기적인 파급은 주간의 요일 순서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7일주간의 제도는 로마에서 주후 1세기에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당시에도 주간의 7일들은 혹성의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본래 토성의 날(즉 토요일)은 주간의 첫째 날이었고 태양의 날(일요일)은 둘째 날이었다.70 그런데 로마세계에 태양신 숭배가 크게 신장되면서 2세기에는 태양의 날이 주간의 둘째 자리에서 첫째 자리로 올라섰다. 그 결과로 모든 날들의 위치가 한 자리씩 앞당겨졌고 그 대신 토요일은 제일 끝인 일곱째의 자리로 밀려났다. 그러나 언제 토성의 날이 칠일 중 첫째되는 자리를 일요일에게 내어주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연대를 밝히기 어렵다. 주후 2세기 중엽에 이 같은 변화가 이미 발생했거나 발생 중이었다는 증거는 유명한 천문학자 베티우스 발렌스(Vettius Valens)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주후 154년과 174년 사이에 편집된 그의 문집에서 그는 요일들과 관련된 혹성의 배열순서를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으로 기록하였다.71 이와 똑같은 형태의 요일 순서는 1633년 바덴(Baden)에서 가까운 웨팅겐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때로부터 콘스탄티누스 2세(340)의 시대까지의 여러 다른 연대들이 밝혀져 있는 주화들과 함께 발견된 술잔에도 나타나 있다.72 요일의 순서에서 태양의 날이 우세한 위치를 점유한 사실에 대한 부가적 확인은 순교자 유스티노스, 테르툴리아누스, 미트라교의 여러 신자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두 법령(321년 3월 3일, 7월 3일) 등의 진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73 (149.3)
 태양의 날이 토성의 날 곧 토요일을 첫째 날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사건이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곧 토요일을 밀어내고 대신에 일요일 준수를 채택한 2세기 초에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는 태양의 날의 위상이 첫째날로 높여진 사건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폐하고 대신에 태양의 날을 매주의 예배일로 삼고자 하는 동기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위의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실로서 다음의 역사적 사례들을 거론할 수 있다. 첫째로 태양신 숭배는 교부들이 빈번히 정죄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미신이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예술과 문학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태양의 상징을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2세기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던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태양이 떠오르는 동방을 향하여 기도하는 습관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이 파급되었다. 그리고 이교의 축제인 무적의 신 곧 태양신의 탄신일이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로 채택되었다.74 (150.1)
 그러나 우리는 좀더 직접적인 역사적 사실로서 2세기의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태양의 날의 상징을 빈번히 사용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유스티노스 마르튀르(100~165)는 “하나님께서 흑암과 최초의 물질을 변형시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날이 첫째 날이기 때문에∙∙∙ 태양의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유스티노스가 첫째 날에 빛이 창조된 사실과 태양의 날을 관련시키고 있는 것은 순전한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후에도 꼭같은 관련성을 주장하는 교부들이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세비우스(260~340)는 수차례에 걸쳐 일요일 예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빛의 모티브와 태양의 날의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시편주해에서 주장하기를 “여섯 날이 지나고 이 빛의 날, 첫째 날이며 태양의 참된 날인, 이 날에 우리가 다시 모일 때 우리는 거룩하고 영적인 안식일을 기념하는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하신 날은 세상 창조의 바로 이 날이었다. 의의 태양이 우리들의 영혼들 위에 높이 솟아오른 날도 바로 이 날이었다”고 하였다.75 (150.2)
 이것들과 이 밖의 이와 유사한 증인들의 지적에 따르면 태양의 날이 선택된 것은 구속역사의 중요한 두 사건 곧 창조와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날이 제공하고 있는 적절한 시간과 효과적인 상징 때문이라고 한다. 히에로니무스(Jerome)는 이 이중적인 이유를 설명하여 말하기를 “만약 그 날을 이교도들이 태양의 날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이 그렇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빛이 나타난 때도 그 날이며 의의 태양이 솟아 오른 날도 그 날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76 (151.1)
 결 론
 결론적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안식일대신에 일요일 예배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외부적인 환경의 요청에 의하여 2세기 초엽 로마교회에서 일요일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12월 25일에 기념하게 한 것과 동일한 정치, 사회적 요인들, 그리고 이교적인 요인들과 기독교적인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여 일요일 예배의 관습이 그리스도교 안에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151.2)
 그러나 일요일 준수가 성경의 명령 위에 근거하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편의주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의 초기부터 오늘까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일요일을 하나님의 성일로 적절히 지키도록 고무시킬 수 있는 강력한 신학적 이유를 밝히지 못하였다. (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