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7장—초대 기독교와 일요일 준수의 기원1
 예루살렘 교회의 인종적 구성과 신학적 특성. 신약성경의 사도행전과 그 밖의 유대—기독교적 문서들의 증거에 비주어 볼 때 예루살렘교회의 인종적 구성과 신학적인 성격은 다분히 유대적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교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유대인들의 집단적인 개종으로 말미암아 성장하였다(행 2:41; 4:4; 5:14; 6:1, 7; 9:42; 12:24; 13:43; 14:1; 17:10ff; 21:20).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신실한 유대인’(행 2:5, 41)과 ‘많은 제사장들’(행 6:7)이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모두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들’이었다(행 21:20).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선교는 대단히 성공적 이었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수만 명의 유대인 출신 신자들은 자신들을 ‘새 이스라엘’로 생각하고 있었기보다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약속에 따라 ‘회복함’을 받은 옛 이스라엘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었다.(행 15:16-18; 1:6; 3:11-26).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는’(행 15:16) 대열에 가담한 사람들로 보았다. (135.4)
 즉 사도행전의 기록은 ‘하나님이 그 종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돌이키게 한’(행 3:11~20) 것이 곧 유대인들의 집단 개종이라는 인상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듯 ‘회복된 이스라엘’ 이었기 때문에 할례와 율법을 표시로 삼아 자신들의 특별한 신분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경건한 유대인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 2:46; 3:1; 5:12) 할례를 행할 뿐 아니라 할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행 11:2; 15:1, 5, 23; 16:3; 21:22 비교. 갈 2:12; 3:1; 5:12; 6:12) ‘안식일 마다 회당에서’ 성경을 통해 권면을 듣는(행 15:21; 13:27) 사람들이었다. (136.1)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출석하는 관습은 예루살렘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이방지역의 교회로까지 파급되었다. 누가에 의하면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과’함께(행 15:4, 19; 13:5, 14, 42, 44) 정기적으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모였으며 바울에게는 그러한 행위가 자신의 규례였다(행 17:2). 이러한 관습은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바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 출신으로 초대 기독교의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아볼로도 예배소에 갔을 때 신자들과 함께 회당에서 모였다(행 15:24-26). (136.2)
 야고보의 역할. 초창기 예루살렘교회가 예배와 실천에 있어서 유대교적 전통에 밀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예루살렘교회의 수장(首長)이었던 야고보의 신앙적 특성과도 관련되어 있다(행 15:1, 24; 갈 2:12).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선택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주님의 형제’였다(갈 1:19)는 사실과 함께 율법에 대한 그의 전설적인 성실성 때문에 그가 제사장 및 바리새인 출신의 많은 개종자들(행 6:7; 15:5)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일요일 예배의 예루살렘 기원을 주장하려면 먼저 율법적인 야고보와 이 야고보를 지지하고 있었던 율법적인 예루살렘교회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36.3)
 49년경에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기독교 최초의 총회에서는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해야 하는지의 문제로 ‘많은 변론’이 이루어졌다(행 15:7). 베드로, 바울, 바나바 등이 나서서 자기들의 주장들을 내어놓았으나(행 15:7,12) 결국 이 변론을 끝낸 사람은 야고보였다. 이방인 개종자들을 할례 문제로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고’(행 15:19)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다’(행 15:20)는 야고보의 한 마디로 심각한 토론은 끝났다. 우리는 야고보의 주도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을 주목해야 한다. 할례는 오직 ‘이방인이었던 형제들’ 에게만 면제되었다(행 15:23). 그러나 아직까지 할례를 실천해 왔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할례가 너무나 당연한 의무였다(행 21:24; 갈 2:12; 5:12; 6:12). 그리고 할례를 면제받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우상에 더러운 것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여야 했다.” 예루살렘 총회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금지시킨 항목들 속에는 음행같은 도덕적인 규칙들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종교 의식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목매어 죽인 것’ 같은 것은 안식일 계명에 비교할 때 사소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비교적 사소한 문제로 보이는 종교 의식들을 가지고 그처럼 “많은 변론”을 치러야 했던 예루살렘 총회에서 안식일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폐지하고 일요일 예배를 제도화하는 중요한 문제가 예루살렘교회나 총회에서 별다른 이의 없이 수용되었다는 주장을 과연 납득할 수 있겠는가? (137.1)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야고보가 “많은 변론”을 종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야고보의 주장이 선지자의 주장(행 15:15-18)과 모세의 주장(행 15:21)을 조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 총회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한 규칙들은 레위기 17-18장에서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들에게” 요구하는 사항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은 기존 규정의 철폐라기 보다는 모세의 법에 기초하여 타국인들을 위해 마련했던 유대교의 규정을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했던 것이었다. 이 점은 야고보가 자신의 제안을 설명하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행 15:21)고 한 사실에서도 뒷받침이 되고 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회당과의 접촉을 통해 그 정도의 유대교적 교양은 갖고 있지 않겠는냐 하는 취지였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기독교의 유대적 특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당면 문제를 토론하는 총회였는데도 불구하고 기왕에 모든 지역의 회당에서 안식일에 모세의 율법이 읽혀지고 가르쳐졌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모세의 법의 구속력을 재 확보하였던 것이다. (137.2)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과 그의 율법적인 태도.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사도행전의 진술(행 21장 AD 58-60) 즉 바울의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간”(행 21:16) 사실과 바울의 빌립보 교회에서 “무교절”을 보낸(행 20:6) 사실은 당시에 유대인들의 제사 절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여전히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에 이루어진 일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더더욱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예루살렘교회의 야고보와 장로들은 수만 명의 유대인 개종자들이 “모두 율법에 열심 있는”(행 21:26)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바울에게 인식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 바울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을 알게”하기 위하여(행 21:24) “서원한 네 사람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깍게 하라”(행 21:23, 24)고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137.3)
 율법을 준수하려는 예루살렘교회의 이같은 열성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교회가 가장 중요한 계명의 하나인 안식일 계명을 폐하고 그 대신에 일요일 예배제도를 채택했다는 주장은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유대적인 경건으로 말미암아 전설적인 명성을 듣고 있던 야고보가 그 수장으로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과 바리새인 출신을 비롯하여 “율법에 열심이 있는” 수만 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일색을 이루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와 그 주변의 교회들에게는 안식일 준수가 폐지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138.1)
 AD 70년 이후의 예루살렘교회.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하여 파괴된 이후에도 예루살렘교회의 인종적 구성과 신학적 경향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260-340)와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315-403)의 증언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의 군대에 의하여 135년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멸망당하기까지 예루살렘교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율법의 문자적인 준수를 고집하는” 유대인 위주의 교회였다. 나사렛(Nazarenes)파라고 하는 팔레스틴의 유대계 기독교 종파는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모체로 하는 최초의 기독교 원시 공동체의 직접적인 후예로 인식되고 있는데 에피파니우스에 의하면 4세기까지도 이들은 할례와 안식일 같은 구약의 관습들을 지켰다.13 (138.2)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습이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 존속되었다는 사실은 남몰래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팔레스틴의 랍비 지도자들이 89~90년 경에 도입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저주”(Birkath-ha-Minim)라는 한 기도문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14 이 기도문은 회당 예배에 몰래 참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팔레스틴의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에 몰래 참석했다는 사실은 1세기에 팔레스틴의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 예배를 도입했다는 주장과 전혀 부합될 수가 없다. 그 어떤 지역의 교회보다도 인종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가장 유대적이었던 예루살렘교회가 일요일 예배 같은 혁신적 조치를 도입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138.3)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반 유대주의적인 정책. AD 135년 이후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세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이 해에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바르코게바(Barkokeba)에 의해 주도된 제2차 유대인 반란(AD 132~135)을 진압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유대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드리아누스는 이 때에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 유대교의 신봉을 금지시겼으며 특별히 안식일의 준수를 불법화하였다.15 하드리아누스의 이같은 반(反)유대교 정책은 기독교 내에 유대인을 경멸하고 기독교와 유대교의 명확한 분리와 기독교의 차별화를 강조하는 반(反) 유대주의적인 기독교 문필 활동을 조장하였다. 그리고 할례나 안식일 같은 특징적인 유대교 관습들이 반(反) 유대적인 기독교 문필가들의 일차적인 비판 대상들로 떠올랐다. 이로써 기독교의 일요일 제도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회가 로마제국 당국과 시민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던 유대교와 기독교가 동일시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기독교의 차별성을 내세우려 한 나머지 일요일 예배와 부활절 예배를 적극 도입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비록 정황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시사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에서 이 주장의 근거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38.4)
 4. 로마교회와 일요일의 기원
 일요일 준수와 같은 새로운 종교 관습을 제도화하는 일은 일찍부터 유대인과 유대교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었고 또 기독교세계에서 상당한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교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135년 이전의 예루살렘교회는 유대교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일단 일요일 제도 수립의 책임권에서 제외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135년 이후의 예루살렘교회도 그 종교적 세력과 위신을 완전히 상실하였기 때문에 일요일 예배와 같은 새로운 변화를 주도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일요일 예배를 도입할 수 있는 조건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교회로는 로마제국의 수도교회였던 로마교회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교회가 지니고 있던 여러 가지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인 조건들이 로마교회로 하여금 안식일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일요일 예배를 도입하도록 부추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139.1)
 로마교회의 특성들. 대부분의 동방교회들과는 다르게 로마교회는 압도적으로 이방인 출신 개종자들이 많은 교회였다.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보내는 그의 서한에서 내놓고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롬 11:13)고 하였다. 로마교회가 이와같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중심을 이룬 교회였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일찍부터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분리가 가능했다. 그 같은 사례의 하나로서 네로 황제는 A.D 64년에 로마 시의 방화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웠는데 이 명령에서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은 명확히 구별되고 있다.16 유대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차별화하는 시도가 팔레스틴 에서 보다는 로마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를 차별화하는 시도의 일환으로서 기독교가 일요일 예배라는 새로운 종교제도를 도입하려는 노력도 로마교회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지 그 원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로마제국과 유대민족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아야 한다. (139.2)
 로마제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제1차 반란(66-70) 때부터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하여 군사, 정치, 종교, 경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탄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군사적인 탄압으로는 두 차례의 유대전쟁(70, 135)을 통해서 로마 군대가 팔레스타인에서만 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을 살육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17 그리고 유대민족을 정치-종교적으로 탄압하기 위하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산헤드린제도와 대제사장직을 폐지시켰고 하드리아누스는 135년경부터 유대교의 관습 전체를 불법화시켰으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안식일 준수를 가장 심하게 단속하였다.18 또 유대민족을 경제적으로 탄압하기 위하여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에게만 가해지는 차별적인 과세(the Fiscus judaicus)를 부과하였는데 이 세금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도입되어 도미아누스 황제(81-96)와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19 (140.1)
 유대인들에 대한 이같은 탄압적인 조치가 제국의 어느 지역에서보다도 그 수도인 로마시에서 가장 가혹했다는 사실은 세네카(d. 65), 페르시우스(34-62), 페트로니우스(약 66년경), 퀸틸리아누스(35-100), 마르티알(40-104), 풀르타르크(46-119), 유베날(125년경), 타키투스(55-120)같은 그 시대의 저술가들이 남겨놓은 반(反) 유대적인 글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직업적인 활동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낸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글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인종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모욕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안식일의 준수와 할례를 가장 비열한 미신 행위의 본보기로 조롱하였다.20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 티투스(Titus)도 유대인들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적개심 때문에 자신이 결혼하고자 했던 유대인 여자 베레니케(Berenice:소(小) 헤롯의 누이)에게까지도 마지못해(invitus) 로마를 떠나도록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21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유대인 문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교에 대하여 더욱더 급진적인 탄압정책을 펴나감으로써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대체로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기독교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차별과 대립 의식이 증대하여 갔으며 기독교 측의 이같은 차별 의식은 기독교 내에서 탈(脫) 유대주의와 유대인 경멸의 신학을22 표방하는 문필 활동을 부추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의 실제적인 결과로서 유대인의 특징적인 절기인 유월절과 안식일이 기독교 안에서 철폐되고 그 대신에 부활절 일요일과 일요일 주일 제도가 도입되었다. (140.2)
 로마교회와 안식일. 앞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하였듯이 유월절이 부활절 일요일로 교체되고 제칠일 안식일이 일요일 주일로 교체되는 일련의 과정이 시작된 진원지는 로마교회였다. 로마교회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에 대한 존경심을 철회하고 오직 일요일 예배만을 존중하도록 하기 위하여 신학적, 사회적, 예전적인 조치를 취했다. 신학적으로는 안식일의 보편적인 중요성을 박탈하고 대신에 안식일 계명을 일시적인 의의만을 가지고 있는 모세법의 하나로 격하시켰다. 유스티노스(Justin Martyr)는 안식일을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까지 비난하였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배신 행위에 상응하는 처벌을 주시기 위하여 그들을 분기시키는 표를 주신 것”이 바로 안식일이라 하였다.23 (140.3)
 사회적으로는 그 때까지 유대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축제와 희락의 날로 지켜져온 안식일을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하는 침울한 날로 바꾸고자 하였다. 로마교회가 안식일을 금식일로 삼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습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사실은 칼리스투스(Callistus, 217-222),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6), 실베스터(Sylvestsr, 314-315), 인노센트 1 세(401-410) 같은 로마교회의 역대 감독들과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요한 키시아누스(John Cassian 360-435) 같은 교부들의 역사적인 언급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24 토요일 금식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서만 권장되었던 것이 아니다. 로마 교회의 감독 실베스터가 확인하고 있듯이 “유대인에 대한 경멸,(exsecratione Judaeorum)과 그들의 안식일” 축제에 대한 경멸(destructiones ciborum)의 표시로서 권장되었던 것이다.25 금식으로 말미암는 비애와 배고픔의 고통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안식일을 지키러 나아가는” 일을 피하게 되었고 그 대신에 더 열심히, 더 기쁘게 일요일을 준수하게 되었다.26 예전적으로는 초대교회가 안식일을 종교적인 의의가 적은 날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로마교회는 안식일에 금식만을 장려하고 성찬식을 거행하지 않게 함으로써 교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에는 성찬에 참여하는 종교적 경험을 치를 수 없게 하였다.27 (141.1)
 매주일마다 안식일에 금식하는 제도는 본래 일 년에 한 번 맞이하는 부활절의 성(聖) 토요일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하던 관습이 매주일 단위로 확대 적용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28 사실상 부활절 성 토요일에 금식하는 동기는 매주일의 토요일에 금식하는 동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의도 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들을 경멸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29 더욱이 교부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맞이하는 부활절 성 토요일의 금식과 일 주일에 한 번씩 맞이하는 토요일의 금식이 그 의미와 기능에 있어서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자주 기술하였다. 이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부활절의 토요일에 금식하는 관습이나 매주 토요일에 금식하는 관습은 부활절 일요일 제도를 도입하는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부활절 일요일을 기념하는 순서의 하나로 출발된 것 같다. 따라서 일요일 주일 제도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부활절 일요일 제도의 발생 시기와 장소와 그 원인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141.2)
 로마교회와 부활절 일요일. 관련된 역사적 사료가 매우 빈곤할 뿐만 아니라 그 빈곤한 사료들이 제공하는 정보들의 해석마저도 서로 엇갈리고 있기 때문에 부활절 일요일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처음으로 기독교회에 도입되었는지를 단언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260-340)는 AD 2세기에 니산월 14일에 유월절을 기념하는 소아시아의 14일 교도(Quartodeciman)들과 부활절 일요일을 주장하는 로마 교회의 사이에 발생했던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30 니케아 총회(325)에서 공식화된 부활절 일요일 제도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유세비우스는 부활절 논쟁의 시말을 보고하는 글에서 부활절 일요일의 전통이 “사도적 전통으로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전수되었다”고 확인하고 부활절 일요일이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제도라는 주장의 근거로 198년경에 로마 감독 빅토르의 요구로 소집되었던 팔레스틴 총회를 제시했다.31 유세비우스의 이같은 단언적 주장에 근거하여 아직도 일부 학자들이 일요일 예배가 사도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1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