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6장 이스라엘의 신학적 의미와 사명
 이것과 유사한 예언들이(36:24-33; 37:22-26과 비교하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와 주요 관심은 세속적, 정치적 국가로서가 아니라 연합된 신정 국가, 즉 영적으로 정결하게 되고 진싣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백성 들로서의 회복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회복의 약속에 있어서 에스겔의 초점은 주로 고토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귀환이 아니라 여호와께로 돌아 오는 것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포로된 이스라엘을 “열국 광야”에서 그들의 더러운 우상숭배와 세속 정신으로부터 정화하여 오직 회개하여 정결케 된 이스라엘만이 이스라엘 땅에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겔 20:32-36).16 (96.2)
 포수기 이후의 이스라엘은 왕의 보좌가 아니라 성전 재건을 중심으로 한 종교 공동체였다. 비록 귀환 포로들의 주류는 유다와 레위지파 사람들이었지만, 이 영적인 남은 자들은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연속과 대표로 간주하였다(스 2:2, 70; 3:1, 11; 4:3; 6:16-17, 21; 느 1:6; 2:10; 8:1, 17; 10:39, 12:47; 말 1:1, 5; 2:11). (96.3)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서 의식적 거룩과 일상의 삶 사이에 있는 차별이 마침내는 폐지될 것이며 우상숭배자는 이스라엘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96.4)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슥 14:21).
(96.5)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만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의 보배로운 특별한 소유로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말 3:16-4:3). 유다는 야곱의 아들과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후사로 간주되었다(1:1; 2:11; 3:6; 4:4). (97.1)
 요약하면 구약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한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첫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여호와를 경배하는 백성인 종교적 언약 공동체를 의미한다. 둘째, 그것은 영적 이스라엘이 되라고 부름을 받은 독특한 민족 집단이나 국가를 의미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그들의 기별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하나님 백성’의 민족적 정치적 특징이 아니라 신학적 질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로 그분께 가납된 것의 상징으로서(창 32:28) ‘이스라엘’의 원래 의미는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거룩한 근거로 영원히 남아 있다(호 12:6; 렘 31:31-34; 겔 36:26-28). (97.2)
 구약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남은 자를 묘사할 때마다 그 들은 ‘새 언약’의 기초 위에 새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충성되고 신실한 종교적 공동체로서 특장자어졌다(욜 2:32; 습 3:12,13; 렘 31:31-34; 겔 11:16-21). 마지막 때의 이 신실한 남은 자손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증인이 될 것이며 민족적 기원과 상관없이 비 이스라엘인도 포함될 것이다(슥 9:7; 14:16; 사 66:19; 단 7:27: 12:1-3). (97.3)
 구약의 남은 자에 대한 전체적인 묘사는 이스라엘 언약의 축복 전체가 믿지 않는 국가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 충성하고 그의 메시아를 신뢰하는 이스라엘에게서만 성취되리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모든 이방 나라들의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을 통합 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97.4)
 이스라엘 선택의 우주적 목적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구속하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 자신의 어떤 도덕적 공로 때문이 아니요, 전적으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의 은혜로운 약속에 대한 그의 신실하심 때문임을 강조하였다(신 7:7-9; 출 2:24-25).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 신(창 15:7) 이가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이스라엘 지파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출 20:2) (98.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22:17-18; 26:4과 비교).17
(98.2)
 우리는 이 다중 약속과 그 우주적 목적 즉 아브라함과 그 씨를 통하여 모든 세상 민족들을 축복한다는 것의 유기체적 통일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우주적 축복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인해 전 인류에게 임한 우주적 저주를 좌절시키는 것이다(창 3:17; 4:11-12). ‘저주’가 종래는 죽음을 가져오는 파괴적인 힘을 의미한다면, ‘축복’은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회복하고 번성하고 승리하는 힘을 나타낸다(창 22:17; 민 23:7-10, 24-24; 삼하 7:29 비교). 이러한 조명아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구원의 우주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이스라엘의 특별한 민족적 지리적 약속들은 구별된 다른 목표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98.3)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 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98.4)
 예수께서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4)고 확인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특별한 선택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 계획과 유기적으로 하나이다. 보스(G. Vos)는 “아브라함 선택은 보편적인 목적을 향한 배타적 수단을 의미한다”18고 요약하였다. (99.1)
 아주 초기부터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출 19:6) 이방 중에서 제사장적 빛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다른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이나 그 왕을 축복의 담지자로서 인정하여”19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축복을 나누어 갖도록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 이스라엘 선택에 의한 우주적인 축복과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이사야 예언의 주제가 되었다. (99.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 2:2-5).
(99.3)
 이 예언은 결코 이스라엘과 다윗 왕가 쪽의 토라에 대한 사랑의 순종에 대한 도덕적 조건을 경감시키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뒤로 물러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원 조건인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렘 7:23) 를 제시하였다. (99.4)
 이스라엘의 선택은 타민족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다만 자신들의 구원만을 위하여 선택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이끌어 구원의 지식과 축복을 나누도록 선택되었다. 간단히 말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아름다운 품성과 구원의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예레미야 7:23 주석에서 로울리(H. H. Rowley)는 다음과 같이 생각을 자극하는 말을 하였다. (99.5)
 선택의 목적은 봉사이다. 봉사가 사라지면 선택은 의미를 상실하고 실패한다∙∙∙.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중단한다면 그 나라는 더 이상 그의 백성이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토기장이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렘 18:1). 토기장이의 의도를 인식하지 못한 그릇은 다른 그릇으로 다시 빚어져야 한다. ∙∙∙선민이 되라는 높은 부르심은 하나님의 관대함이나 편애의 표가 아니라 그 과업을 정확하고 중단 없이 수행하라는 소명이다. 그러므로 선택과 과업은 너무나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이스라엘이 후자 없이는 전자를 가질 수 없다.20 (100.1)
 만일 이스라엘이 끝내 여호와에게 불충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특권을 상실할 것이고 레위기 26장신명기 28장에 분명하게 기록된 대로 그 언약의 저주아래 놓이게 된다. 모세와 선지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R. Bulmann)로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욥 42:2).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 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11)고 기록되었다. 이스라엘이 한 국가로서 실패했을 때 주께서 친히 이스라엘과 세상을 위한 축복과 빛으로서 한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을 주셨다. 약속된 메시아는 실패하지 않을 것인데, 이는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사 53:10)실 것이기 때문이다. (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