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이스라엘 - 세대주의 예언해석학 비판 - 제 6장 이스라엘의 신학적 의미와 사명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59번이나 언급하고 있는 시편에서는, ‘이스라엘’은 예수살렘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를 상징한다.8 ‘유다’라는 이름은 실제적으로 예배드리는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 된 적이 전혀 없다. (91.1)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종교적 배도와 사회적 부정 때문에 다른 이방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기 시작하였다(암 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인 ‘거룩한 씨’는 남게 될 것이다(왕하 19:18; 사6:13; 8:17, 18; 10:20-22). 아모스는 세상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통속적인 생각을 거절한 첫 번째 선지자였다(암 3:2, 9:1-4, 9, 10). 그는 구원의 약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종교적 반응이라는 조건을 강조하였다. (91.2)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암 5:6).
(91.3)
 이스라엘 국가로부터 단지 한 남은 무리가 하나님의 미래 심판에서 살아남을 것이다(암 3:12; 5:15). 이 남은 무리는 마치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의 남은 백성들을 택하였던 것처럼 여호와의 날에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통하여 걸러지게 될 것이다(5:15). 놀랍게도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에서 다른 생생한 면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비 이스라엘 자손들도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남은 자손과 다윗의 집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91.4)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 니라(암 9:11-12). (91.5)
 아모스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남은 자손이 “국가적 목적이 아니라 광범위한 종교적 목적을 지닌 실체”9임을 선언한다. (92.1)
 남은 자손의 모티프는 심판과 구원에 대한 이사야의 기별에서 주도적 요소가 된다. 여호와의 거룩함에 대한 개념 속에 운명과 구원의 결합이 내재되어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하였으나, 은혜로 화목케 되고 순결케 되어 하나님의 사자로 부름을 받았다(사 6:1-8). 하젤(G. F. Hasel)은 “그래서 선지자 자신이 미래의 남은 자손에 대한 예변법적 대표자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가 여호와의 ‘거룩함’을 대면하고서 순결하고 정결한 자로 나서게 되었기 때문이다”10라고 설명하였다. (92.2)
 이스라엘과 다윗 집에 대한 파괴적인 심판은 이스라엘의 모든 생명을 멸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 라”(사 6:13). 이 “그루터기”나 뿌리는 둘 다 그 나라의 멸망과 남은 자들에게서 지속될 보존된 생명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이사야처럼 오직 하나님의 정결케 하시는 심판을 겪었기 때문에 거룩하다. 그리고 “이 경험 때문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순종의 바른 관계에 서게 된다. 그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의 전달 자가 될 것이다.”11 (92.3)
 이사야는 유다 집을 위해서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사 1:1-3; 8:14). 그는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언한다(사 6:11-13). 그 결과로 오직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남은 자가 언약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한 거룩한 나라(출 19:6)나 ‘거룩한’ 백성(신 7:6)이 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목적은 ‘온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었다(사 6:3). 이 목적이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해 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여전히 서 있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남은 자손(사 4:2-6; 6:13)을 통하여 성취될 것이다. 거룩한 남은 자에 대한 이러한 개념의 이사야 종말론의 핵심이 되어 있다(사 1:24-26 참조). (92.4)
 예루살렘에 임한 시리아—에브라임 위기(BC 734-733년) 동안에 이사야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믿음을 거룩한 남은 자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제시하였다(사 7:9; 30:15-18 참조). 이사야와 그의 자손과 제자들이 미래의 남은 자를 지시하는 “전능하신 자 여호와로부터 나온 이스라엘의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사 8:18). 이 사실은 이사야가 남은 자 모티프를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시대를 위한 정치적 위기에도 적용하였음을 보여준다(사 1:49, 11:11, 16). 이사야의 희망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미래에 등장할 거룩한 남은 자의 조건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남은 자 모티프에 대한 ‘세속적’ ‘신학적’ 구분을 알지 못하였다.”12 그는 자신의 남은 자 모티프를 자기 자신의 때와 미래 모두에 대해 오직 종교적—신학적 개념으로만 사용하였다. (93.1)
 어떤 다른 선지자들의 말보다 이사야 40-66장의 예언들이 앗수르와 바벨론 포로 후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가장 위대한 약속들로서 우뚝 서 있다. 그렇게 흩어졌던 이스라엘이 다시 모일 것임을 거듭해서 확신시키는 중에 이사야의 예언적 초점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데 헌신한 야곱의 육적 후손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지 않다. 이사야는 포수기 이후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선택한 많은 비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들 것을 생각한다. 두 계급의 사람들, 즉 모세의 법에 따라 여호와를 경배하는 모임에 들어오는 것이 금해진 외국인과 환관들 이 여호와의 안식일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잡는 것을 조건으로 이제 시온 산의 새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환영받고 있다. (93.2)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 56:7-8, 강조 첨가, 45:20-25과 비교).
(93.3)
 이방인들이 여호와에 대한 믿음과 순종에 스스로 동참하였을 때(사 56: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 한 이름을 주”(사 56:5-6)신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사야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우주적 접근이, 아브라함(창 23:3)과 이스라엘(출 19:6)과 맺은 언약에서 나타난 바대로, 새 이스라엘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을 펼쳐 보였다. 새 이스라엘의 본질적 특징은 민족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과 여호와에 대한 경배이다. 믿음 있는 이방인들 이 믿음 있는 이스라엘 사람처럼 언약의 약속에 대한 동일한 권리와 희망을 향유하게 될 것이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은 이사야 56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94.1)
여기에서 ∙∙∙육적인 사람들과 영적인 사람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반드시 연합하는 것을 그만둔다. 그 이름[이스라엘은 한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후 손들 없이도 계속 살아 있다∙∙∙.새로운 공동체가 선민의 이전 개념과는 더 이상 같지 아니한 새로운 형태의 유대관계로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도 이르 게 여기에서 [이사야 56장] 우리는 중요한 신약의 공동체 개념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속할 수 없었던 이들로부터도 이스라엘을 모으고 있다.13
(94.2)
 베스터만은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근본적으로 민족적 정치적 실체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종교적 회중이나 “교회”로 보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94.3)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곧 “이스라엘의 남은 자”(2:12) 를 베들레헴에서 나올 메시아의 약속(5:2)과 연결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같 이”(미 5:12) 모을 것이다.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미 5:4) 있을 것이다. (94.4)
 유다 왕국의 마지막 40년 동안(BC 625-586년) 하나님을 섬긴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각각의 인접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레미야의 약속들과 예언들은 독립적인 정치적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열두 지파 모두로부터 하나님께서 모으실 회복될 영적 백성으로 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바벨론 포수 이후에 이스라엘 집과 유다의 집과 세우실 새 언약은 시내 언약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었다(31:31-34). 회복된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로부터 모인, 기도하고 경배하는 남은 자들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를 체험하게 되고, 오직 한 마음으로 그 분의 거룩한 율법을 순종할 것이다(31:6; 32:38-40). (95.1)
 비록 예레미야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새 언약의 예언 속에 비 이스라엘 사람들을 명백하게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방으로부터 여호와를 믿는 모든 믿는 자들이 원리상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언약 공동체에 속하는 특권은 민족적, 정치적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 영적인 연결 즉 “더 좋게 말하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14에 달린 것이었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하나님의 목적은 정치적인 유대 국가가 아니라, “여호와에게 순종하는 백성, 그분을 위해 봉사하고 전적으로 그를 바라보는 공동체”15였다. 이러한 결론은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가시적인 임재의 상징인 여호와의 언약궤도 더 이상 기억되거나 필요치 않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으로 강조되었다(렘 3:16). (95.2)
 BC 597년 그 자신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에스겔 선지자도 새롭고 영적인 이스라엘이 모든 열방의 포로에서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95.3)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지라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1:18-21).
(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