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초에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화체”(Transubstantitation)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 개념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기적적으로 다르게 변한다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그 외적인 모양과는 상관없이 실재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고 한다. 1215년에 열린 제4차 라테란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떡과 포도주라는 외형 아래 있는, 제단의 성찬 안에 그의 몸과 피가 실재로 들어 있다. 즉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떡은 몸으로, 포도주는 피로 변한다.”(decree 1; Leith 58).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년)는 일단 떡과 포도주가 봉헌된 후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봉헌 전에는 없었던 그리스도의 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떡의 전체 본질이 예수의 몸의 전체 본질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은 “화체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변화이다(Summa Theologiae 3a. 75. 2.4). (692.3)
 화체설은 이와 같이 로마 천주교의 정통 입장이었다. 그것은 트렌트 종교 회의의 공식 입장이다 “이 거룩한 회의는 새롭게 선언한다. 떡과 포도주의 봉헌을 통하여 떡의 전체 본질이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로 변하고, 포도주의 전체 본질이 그의 피의 본질로 변한다. 그리고 이 변화를 거룩한 가톨릭교회는 편의상 그리고 합당하게 화체(Transubstantiation)라고 부른다.”(thirteenth session, chap. 4). (692.4)
 3. 종교개혁 시대
 주의 만찬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는 점진적으로 발전되었지만 모두 동일하진 않았다. 그들은 성찬의 포도주와 떡이 하나님과 개인적인 믿음의 관계를 즐거워하는 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때 축복을 가져다준다는 데 있어서는 동의했다. 그들은 성찬식에 성령의 주권과 자유 안에서 성찬식에 참여할 때만 효력이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동시에, 그들은 미사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임을 부인했으며 화체설 교리에도 반대했다. (693.1)
 마르틴 루터(1483-1546년)는 주의 만찬을 “순수한 복음”, 하나님의 선물 그리고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나누는 즐거운 영적인 친교로 강조했다. 그는 성찬식의 성경적 근거를 강조했다 신학적으로 말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랐으며, 믿음의 필요를 내세우면서도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한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일반 신자들을 잔에서 제외시킨 것을 질책하였으며, 미사를 가리켜 “화목 제사”(propitiatory sacrifice)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하는 것을 정죄했다. (693.2)
 루터는 화체설을 반대하는 대신 “공재(共在)”(Con-substantiation)라는 개념을 지지했다. 이처럼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의 떡과 포도주와 함께 공존하는 두 본질의 임재를 가르쳤다. (693.3)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on)은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주의 만찬에서 떡과포도주의 형태로 실재로 임재한다”라고 주장했다(article 10; Leith 71). 24조에는 “성찬식이 죄를 위한 희생 제사를 제공하기 위해서 제정되지 않았다. 그 희생 제사는 이미 드려졌기 때문에, 이 예식은 믿음을 일깨우고 우리의 양심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위의 책, 85). (693.4)
 다른 한편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년)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믿은 것을 정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다. 그의 진술들을 보면 주의 만찬을 하나님이 신자들을 위해 행하시는 인 또는 보증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그는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죽음을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떡과 포도주는 상징물이며, 영적인 진리나 축복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693.5)
 위대한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세 번째 인물인 장 칼뱅(1500-1564년)도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한다는 사상에 반대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에 임재한다는 루터의 사상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떡과 포도주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츠빙글리의 견해에도 만족해하지 않았다. 칼뱅은〈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의 한 장에서 자기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논박하면서(4. 17), 주의 만찬의 역동적이고도 기쁨에 찬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영생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몸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다. 떡과 포도주는 또한 성령의 사역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셔서 충성스런 신자들에게로 내려올 수 없지만, 신자들은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그에게로 들어 올림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이 신비라고 칼뱅은 시인했다. (693.6)
 종교개혁 시대에는 떡과 백포도주라는 형태적 요소가 “축성하다”(consecrate)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사용되었다. 관습이나 태도는 변화에 저항하기 때문에, 전에 하던 성찬의 관행이 여러 면에서 성찬의 새로운 이해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693.7)
 영국 국교회의 공식적 입장은 39개 조항에 나타나있다(revised 1571). 화체는 “성경의 분명한 용어들과 일치하지 않으며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오직 하늘의 영적 방법”에 따라 믿음으로만 주어지고 취해지고 섭취된다(Leith 276). 성찬은 숭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속의 성례이다.”(위의 책). (693.8)
 1647년 스코틀랜드 교회에 의하여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주의 만찬은 제사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 자신을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린 희생제사의 기념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께 드리는 모든 찬양의 영적 봉헌이라고 말한다. “때때로 떡과 포도주를, 그것들이 대표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전과 같은 떡과 포도주로 남아 있을 뿐이다”(Leith 225,226). (694.1)
 4. 현대
 11세기부터 현재까지 주의 만찬에 관한 교리와 관행의 역사적 발전에는 별 다른 논의가 없다. 종교개혁과 반(反)종교개혁으로부터 나온 입장들이 개선된 경우는 아주 적다. (694.2)
 성만찬 예식에 관하여 현대의 학계는 신학적인 측면보다는 역사적인 측면에 더 치중하는 것 같다. 문제가 되고 있는 주요 쟁점들 중 하나는 최후의 만찬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유월절 식사였는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유대인의 식사를 따른 것인가? 또한 유월절 식사의 날짜 문제인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공관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날짜와 다른 것 같다. 이런 문제들은 리츠만(Lietzmann), 불트만(Bultmann), 예레미아스(Jeremias), 마르크센(Marxen), 파취(Pastch), 슈에르만(Schuermann) 등에 의하여 다루어졌다. (694.3)
 1982년 세계 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Faith and Order Commission)는 예식들에 대한 추후 논의를 위한 지침으로 교회들에게 보내는 한 문서를 출판하였다.〈침례, 성찬식 그리고 목회(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에 의하면, 주의 만찬은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이며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념이다. 또한 그것은 재림에 대한 기대이다. 그 문서 안에는 성찬 신학의 강한 목소리가 있는데, 예를 들면, “교회는 성찬에 함께 하는 실재적이고 살아있으며 역동적인 그리스도의 임재를 고백하며” 그것은 믿음으로 인식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의 떡을 나누고 공통된 잔에서 나누는 것은∙∙∙그리스도와 및 그들의 동료들과의 하나됨을 나타내고 또 그것에 영향을 준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불공평, 인종 차별, 분리 그리고 자유의 결핍”에 도전한다(10-17). (694.4)
 5. 재림교회의 입장
 주의 만찬은 초창기부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예배의 근간이 되어 왔다. 이것은 재림교회의 초기 신자들이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침례교, 회중교, 감리교, 장로교 등의 교회들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에서 주로 기인한다고 본다. (694.5)
 주의 만찬에 대한 재림교회 초기 기록 가운데 하나에는, 1848년 8월 18일에 뉴욕주 볼니(Volney)에서 열린 안식일 회의의 참석자들이 주의 만찬을 기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기 재림교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성만찬을 유월절의 연속으로 간주해서 1년에 한 번씩 기념하는 것을 지지했다. 조직이 성장하면서, 주의 만찬이 한분기에 한 번씩 기념하는 “분기 모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694.6)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일반적으로 주의 만찬을, 안식일 예배나 또는 특별한 예배로 한 분기에 한 번씩 기념한다(참조 SDA Church Manual 1990,78). 분기 식 기념은 감리교 전통에서 온 것 같으며, 대부분의 교회가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다. 재림교회는 이 예식을 이보다 더 자주 기념하면 이 거룩한 예식이 거룩한 영적 중요성을 상실하고 단순히 형식으로 전락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6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