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침례의 선례들
 침례에 관한 역사적 개요는 그리스도교 예식 이전의 선례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예를들면, 레위기 15장은 10개의 절에 걸쳐 여러 다른 형태의 불결함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씻음과 목욕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5, 6, 7, 8, 9, 11, 13, 21, 22, 27절). 헤롯 성전 시대에 속한 고고학적인 발견이 증명하듯이, 유대인들의 정결 목욕은 흔한 것이었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이런 결례들이 대단히 중요한 표 곧 경건을 보증하는 징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 주류에서는 개종자들의 침례가 신앙 공동체로 들어가기 위한 절차의 한 부분이었다. 이런 정결이나 침례 예식 가운데 어떤 것도, 심지어는 요단강에서 베푼 요한의 침례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합하여 받는 침례만큼 사람이 신성과 합하여 침례받는 연합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678.6)
 2. 속사도 시대
 이 시대 동안에 침례를 베풀고 이해한 방식에 몇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678.7)
 1세기 후반 또는 2세기 초의 문서인〈디다케(Didache)에 따르면, 물이 부족할 경우에는 삼위의 이름으로 침례 후보자의 머리에 물을 세 번 부음이 허용되었다(Dodache 7). 퀴프리아누스(Cyprian 200년경-258년)는 물을 뿌리는 것이나 붓는 것 둘 다 똑같이 효력이 있으며, 침례는 몸을 물속에 잠그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물”을 머리에 바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Epistle 75. 12). 건강상의 이유로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을 수 없는 자들에게는 물을 뿌리도록 했다. (678.8)
 유아 세례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200년경)의 글에 처음 명시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문단에서 그는 상당히 새로운 관행으로 보이는 것을 반박하고 있다(On Baptism 18). 몇 년 후에 오리게네스(Origen 185-251년경)는 유아세례가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이라고 주장한다(Commentary on Romans 5.9). (679.1)
 초기 몇 세기 동안에 침례 예식은 확대되어 정교한 의식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침례식은 특정한 성일들, 특히 부활절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것은 침례가 회심에 이어서 오는 것이라는 신약적인 관행으로부터의 분명한 이탈이다. 제3세기의 의식들에서 세 번 물속에 잠그는 의식이 고백, 기름 바름 그리고 안수하는 것과 병행되었다. 그런 후에 침례식 성만찬이 뒤따랐다. 삼위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푸는 공식(마 28:19)이 흔히 사용되었다. (679.2)
 그리스도인들이 미드라교(Mithraic)와 엘레우시스(Eleusinian) 신비주의 의식의 영향을 받아 침례가 수침자에게 복을 나누어준다는 입장을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200년경)는 물 침례가 죄의 용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중생 그리고 성령의 부어주심을 가져다준다고 보았(Against Mardon 1.28). (679.3)
 3.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의 교회
 4세기 이후로는 유아 세례와 성인 침례가 둘 다 행해졌다. 5세기에는 유아 세례가 보편화되었다. 유아 세례가 점점 더 보편화되어가는 추세였음에도 어떤 걸출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성인으로서 침례를 받았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rose of Milan, 397년 사망)는 그의 부모가 그리스도인이었지만 34세에 처음 침례를 받았다.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 407년 사망)와 히에로뉘무스(제롬, 420년경 사망)도 20대에 침례를 받았다. (679.4)
 그러나 유아 세례가 점차적으로 표준이 되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ws, 390년 사망)는 “유아들에게 침례를 줄까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타협적인 대답을 했다. “만일 위험이 많으면 그렇게 하라. 왜냐하면 무의식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그들이 인 침도, 입교도 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Oratio 40.28). (679.5)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430년 사망)는 침례에 관한 교리적인 이론을 처음으로 정립한 신학자였는데, 도나투스파(Donatists)와의 논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성사(sacramentum)와 성사의 실체(ressacramenti)를 예리하게 구분하였는데, 즉 성사와 성사가 상징하는 은혜를 구별한 것이다. 그는 실체(은혜)가 없는 성사(의식)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이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기때문에 침례는 불가피한 것이며, 침례는 교회로 들어가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평신도가 심지어 이단이라 할지라도, 합당한 침례를 베풀 수 있다. 그는 원죄의 교리와 함께 유아세례의 신비한 효력을 옹호했다. 사실상 그는 유아 세례가 원죄의 죄책을 취소하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아이들 스스로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교회의 중재를 통해서만 용서를 받을 수가 있다고 이해했다. 믿음을 통한 마음의 회심은 어린아이의 신체적 성장과 성숙에 따라서 나중에 일어날 것이었다. AD 418년의 카르타고 회의(Council of Carthage)에서 교회는 유아 세례를 승인하였다. “누구든지 새로 태어난 영아가 세례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자는∙∙∙파문 당하게 하라” (679.6)
 4. 중세
 스콜라 주의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확대하였다. 그들은 질료와 형상을 분명하게 구분하였다. 침례의 질료는 물이지만, 그 형상은 말씀으로 구성된다. 형상과 질료가 둘 다 하나님에 의하여 마련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성사를 바꿀 권리가 없다. 침례로 모든 죄가 사함 받는다 어린아이들은 원죄로부터 용서를 경험할 수 있고 성인들은 범한 죄들로부터 용서를 경험한다. (680.1)
 로마가톨릭교의 최고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는 “침례는 물에 잠그는 방식으로뿐 아니라, 물을 끼얹거나 뿌림으로써 베풀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물에 잠그는 침례가 더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장 보편적인 관행이기 때문이다.”(Summa Theologiae 3a. 66.7). (680.2)
 아퀴나스는 침례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조류에 실재적으로 접촉하게 해 준다고 믿었다. 침례는 그리스도 및 그분의 “몸”인 교회에 소속되었음을 말해 주는 “성질(character)”을 부여해 준다. 침례로 얻어지는 이런 성질은 신자로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준다. (680.3)
 5. 종교개혁 시대
 루터는 외적 은혜의 수단(이 경우엔 침례)과 그것이 전달해 주는 내적 은혜의 불가분적인 연관성에 관한 당시 로마가톨릭의 지배적인 견해를 바로잡는 데 온전히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재침례파(Anabaptists) 반대하여 침례 성사의 효력은 수침자들의 믿음보다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그 제도 자체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말씀(The Word)의 신성한 효력을 통하여(이것을 떠나서는 성사에 아무 의미가 없음) 침례 성사가 어린아이들에게 중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성인(成人)에게는 그 효력이 수침자의 믿음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680.4)
 츠빙글리는 성사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루터와 달랐는데, 츠빙글리는 성사를 하나의 상징이나 의식 또는 보증의 징표로 보았다. 믿음의 징표로서의 침례는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할례처럼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언약 관계의 표현이었다. 츠빙글리는 그것이 교회에 입교하는 행위라는 점을 역설함으로써 침례의 공동체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680.5)
 다른 한편, 칼뱅은 침례 예식 자체가 은혜를 부여해 준다는 견해를 부정했다. 기타 은혜의 수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침례도 죄인들의 마음속에 그분의 은혜를 역사하게 하는 도구로 정하셨다 그는 침례를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정된 첫 표로 보았다. 주께서 그것을 우리가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된 것을 나타내는 표와 증거로 제정하셨다. 그러나 칼뱅은 곧 이어서 침례가 제공해 주는 유일한 정결이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Institutes 4. 15. 2). 칼뱅에게 침례의 방식은 물에 잠그는 것이든 물을 뿌리는 것이든 중요치 않았다(위의 책, 19).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칼뱅은 특히 유아 세례와 관련하여 예정론에 강한 관심을 가졌다. 루터와 함께, 그는 예정된 자는 침례를 통하여 은혜로 인침을 받는다고 믿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침례는 교회 안에서 “새 생애”를 시작하는 것을 상징한다. 어린아이가 예정된 자라면 침례를 받지 않고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는다. 칼뱅은 사적인 침례를 반대하고 성직자가 침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6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