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침례의 방식
 성경은 물속에 잠기는 침례를 가르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침례”(baptism)라는 단어 자체가 잠기는 것을 가리킨다. 신약의 사례를 보아도 침례는 물속에 잠그는 것임을 가리킨다. 끝으로, 로마서 6:3-5에 나오는 장사됨과 부활에 대한 바울의 언급도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을 의도하지 않는다면 그의 설명이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물을 뿌리거나 붓는 침례는 물속에 잠그는 성경적인 침례의 방식과 의미에 합당하지 않다. (676.5)
 침례를 베풀 때,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마태복음 28:19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공식을 사용한다. 이름으로 침례를 준다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또는 ‘삼위 하나님에 의하여 위탁된 권위에 근거하여’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공식이 사용되었다(행 2:38; 8:16; 10:48). 마태복음 28:19의 양식에 따르기보다 예수만의 이름으로 베푼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메시아)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공적으로 고백하고 그의 교회에 입교하도록 한 베드로의 권면을 따랐을 것이다. (676.6)
 3. 침례받기에 적합한 나이
 유아 세례의 관행을 옹호하는 자들은 소위 오이코스 공식 곧 “권속 공식(household formula)”을 선호한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것이 신약 시대에 아이들이나 유아들이 침례를 받았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가족 전체가 개종하고 침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이 흔히 인용된다.

   (1)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침례를 주었고”(고전 1:16).

   (2) “저(루디아)와 그 집이 다 침례를 받고”(행 16:15).

   (3)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권속이 다 침례를 받은 후”(33절).

   (4)“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침례를 받더라”(행 18:8).

   (5)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11:14). (676.7)
 어떤 학자들은 만일 자녀들[아이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바울과 누가가 “집, 권속”의 침례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성경 본문들에 근거한 유아 침례의 주장은 침묵의 논증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집 또는 권속은 그 집속에 속한 종들과 아마도 나이가 든 자녀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유아 세례의 관행을 뒷받침해 주는 성경적 근거는 부족하다. 물론, 초기교회에는 모든 연령층의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다. 교회가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 이유는 예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각별히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마 18:3; 19:14). 그러나 어린 아이들의 침례에 대해서는 신약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유아세례[침례]는 사도 시대 이후에야 시작되었으며, 2세기 말 이전에는 그런 관행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677.1)
 사도행전에 비춰보면, 말씀에 대한 설교나 가르침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 고백과 동의가 침례에 선행하였다(행 8:12, 13, 35-38; 16:30-33). 이 모든 점이 침례 후보자가 유아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입교와관련된 신약의 성경 본문들에 비추어 보면, 침례를 받는 자는 성인이어야 하며, 그들에게 요구되는 침례 자격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심사숙고하여 죄와 우상을 버릴 뿐 아니라 예수를 개인적으로 믿고 그분께 충성을 바치기로 서약하는 것이었다. (677.2)
 4. 재침례
 앞서 기술한 대로, 침례는 한 개인이 그리스도 교회의 일원이 되어, 그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특권과 책임들을 함께 나누도록 해 준다. 교회 공동체의 입교 의식인 침례가 반복될 수 있거나 반복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흔히 듣는다. (677.3)
 재침례를 다루고 있는 유일한 성경구절은 사도행전 19:1-7인데, 에베소에 있는 제자 12명가량이 재침례를 받았다. 성경 본문 자체는 전혀 어렵지 않다. 묘사된 상황은 전에 한 번 침례를 받은 자들에 관한 것이다.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라고 묻는 바울의 질문에, 그들은 “요한의 침례로라”고 대답하였다(3절). 5절에 따르면 그때 12명이 다시 침례를 받았다. 바울은 그들이 전에 받은 침례를 유효하거나 합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은 것 같다. (677.4)
 그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적이 없고 성령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라고 소개 되어 있다. 요한의 침례는 회개와 용서에 대한 호소에 근거하였다(막 1:4; 눅 3:3). 그러나 그리스도의 침례는 달랐다. 그러므로 그들의 재침례 이유는 명백한 것 같다. 그들은 요한의 “회개의 침례”만을 받았던 것이다. (677.5)
 아볼로도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행 18:25), 하지만 그의 재침례에 관한 언급은 없다. 사도들 중 어떤 이들도 요한의 침례를 받았던 것이 틀림 없으나(요 1:35-40), 그들이 그 후에 다시 침례 받았다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제자들과 아볼로는 요한의 침례를 받았지만 예수를 믿는 믿음 및 그들의 생애에 나타난 성령의 임재라는 두 가지 요소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가 에베소 교인들의 침례에는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그들의 침례가 유효치 않다고 여기고 그들에게 재침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들이 재침례 후에 중요한 새 진리들을 받아들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은 그 재침례를 의도적으로 수행하였던 것 같다. 추가적인 기본 교리들을 받아들인 사실은 재침례를 받는 것이 정당했음을 방증한다. (677.6)
 재침례를 베푸는 또 다른 이유는 배교 때문일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을 공개적으로 범하고 출교를 당한 자가 회개하면 몸된 교회로 다시 새로 입교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다시 영접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 및 교회와 새로워진 교제를 재침례로 나타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침례 받았던 자는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요구하는 신조와 표준으로부터 분명한 배교가 있었을 때에만 재침례가 요청된다”(6BC 373). 다른 한편으로는, 반복해서 배교하고 재침례를 요청하는 자의 경우에는 침례가 남용될 수도 있다. 배교로 인한 재침례에 관해서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으므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678.1)
 5. 침례가 그리스도인 경험에 끼치는 영향
 침례에 관한 이론적인 논의는 사람의 생애에 끼치는 침례의 영향을 고려해 보지 않고서는 별 의미가 없다. 침례는 그 자체로서는 새 생애를 보장하지 못한다. 물에는 그런 신성한 능력이 없다. 그렇지만 침례에는 죄와 도덕적인 부정에서 정결케 됨을 가리키는 상징성이 있다. (678.2)
 일단 사람이 성령의 깨우침을 받게 되면 자신의 상태를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회개와 고백을 통하여 죄와 죄책의 짐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온전한 용납과 성령 안에서 새 생애를 살 자유를 발견한다. 이 새 생애는 거듭남 또는 중생의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거듭남 또는 중생의 경험을 옛 생애의 죽음과 장사지냄 그리고 새 생애의 부활에 비유한다. 이것이 곧 침례가 상징하는 바이다. (678.3)
 C. 결론
 신약에서 침례에 관련된 주요 구절들은 고백, 회개, 정결, 죄에 대한 죽음 그리고 새 생명으로 살아남등의 개념들이 침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예식은 양심의 정결은 물론 예수를 믿는 믿음과 관련된다. 주로 정결의 개념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침례는 본질적으로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하는것이다. (678.4)
 신자는 그리스도 및 교회 공동체와의 교제로 들어가는 침례를 받는다.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개인들로 구성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밀접한 연합 관계에 있고(갈 3:27), 동시에 이제 교회의 다른 교인들과의 교제를 누린다. (678.5)
 D. 역사적 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