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톨릭교회에 여전히 참교회의 흔적이 남았음을 인정하면서도, 칼뱅은 성경적인 근거를 기초로 그것과 결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순수하게 전파되고 이해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설립 의도대로 집행되는” 성례전은 교회의 현저한 표지였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이런 최소한의 정의는 새로운 중대성을 담고 있었다. 칼뱅은 그 안에 특정 형태의 교회 구조와 행정을 포함시켜서 자신의 신약 연구를 토대로 한 구체적인 교회 정치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일반적으로 그것은 “개혁교회” 또는 “장로교회”로 불린다. 이런 형태의 교회 정치는 교회의 권위가 그 신자들에게 귀속되었다고 인식한다. 지도자들의 권위와 책임은 총회에서 비롯되고, 행정권은 대표성을 띠는 조직체들과 임원들에게 위임된다. (658.6)
 그리스도로부터 필요한 능력과 은사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교회는 말씀의 보존, 신앙고백의 구성, 징계의 집행 같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 권한을 행사한다. 교회의 영적인 권력은 세속적인 권력과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의 경우 그리스도교 소명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 치안판사는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교리적 위치를 옹호하고, 공동의 평화를 증진시키며, 백성들 가운데서 신앙에 대해 발생하거나 확대되는 모든 종류의 대중적인 공격을 방지하는 것을 자신들의 임명 목적으로 삼는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명령이 주어졌을 때만 신자들은 통치자에게 불순종한다 칼뱅은 교회와 정부 사이의 밀접한 연합을 주장했는데 이는 로마가톨릭의 교리를 어느 정도 연상시킨다. 그러나 루터와 다르게 그는 정부를 교회에 종속시키는 신정주의적인 정책(theocratic policy)을 더욱 옹호했다. 교회에 대한그의 견해들은 그의 책〈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4. 1-20에서 매우 체계적이고 발전적인 형태로 정리되어 있고,〈제2 스위스신앙고백(the Second htelvetic Confession, 1566)〉에서 가장 엄격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것들은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 지지를 받아왔다. (659.1)
 3. 급진적인 회복
 거의 초기부터 관료후원적 개혁자들(magisterial Reformers)의 박해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급진주의” 또는 “분리주의” 집단은 세속 사회와 정부 교회들로부터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다. 여기서 교회란 단지 영성과 거룩함의 표지만을 가진 신자들의 교회였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무리로서 그것은 관료후원적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된 부흥을 한충 진전시켰다. 관료후원적 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 신앙의 유산을 너무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단순한 개혁 이상의 진정으로 회복된 교회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일절의 타협 없이 사도들의 모본을 따라 훈련 받는 참교회를 암시했다. (659.2)
 한편 루터와 재침례파(반대자들이 붙인 이름) 사이의 진짜 문제는 침례의 문제라기보다는 상호배타적인 교회 개념이었다. 분리주의자들의 교회론은 불신의 세계와 정부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했고, 그것은 교회와 정부가 실질적으로 공존하며 한 영토의 모든 시민들은 국교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관료 후원적 개혁자들의 견해와는 상당한 차이를 나타냈다. 급진적인 개혁자들에게 교회란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신앙과 중생의 원칙을 가지고 모이는 지역 동료들로서 거기에는 규정이나 징계 또는 정부를 위해 그리스도께 의무를 다하는 지역 단체의 계급 구조가 없다. 그러한 급진적 단체들은 숫자도 많았고 종류도 다양했다. 그들 중에는 모라비아의 후터파(the Hutterites of Moravia), 네덜란드의 메노파(the Mennonites of Holland)와 여러 소규모 집단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재침례 회심 정책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종종 그 전체 운동에 재침례파라는 통칭이 붙여졌다. (659.3)
 4. 영국성공회와 교회
 16세기의 다른 개혁 운동과는 대조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명성 있는 교회 지도자가 아니라 교황에 대한 헨리 8세(1491-1547년)의 정치적인 저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후로 영국 또는 해외에서 캔터베리(Cantebury) 주교와 소통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교리와 관습의 신앙 체계로서 명맥을 이어왔다. 처음부터 영국성공회는 그 교리가 보편적(Catholic)이며 개혁적(Reformed)임을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그것은 교황을 중심으로 가시적인 계층 구조를 이룬 로마가톨릭에 반대하여 비가시적인 교회의 본질적인 개념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강조점은 중세 교회와 마찬가지로 가시적인 교회와 감독, 사제, 집사로 구성된 삼중 사역에 머물러 있다. (659.4)
 영국성공회 내부에서는 부분적인 개혁에 만족하지 못한 “청교도(Puritans)”가 칼뱅의 교리와 맥락을 같이하면서 영국성공회의 정화를 더 강도 높게 추궁했다. 그들 중 일부는 회중교회와 함께 완전한 정교 분리를 옹호하게 되었다. 그들은 중생을 경험한 신자의 자격과 모든 외부의 강압으로부터 독립된 신자들의 자급자족적인 회합을 요구했다. (660.1)
 D. 18-19세기
 1. 이성의 시대와 교회
 모든 권위와 전통을 불신하며 진리는 오직 이성과 실험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신념을 추구하는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교회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7-18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은 주로 이신론자들(Deists)이었다. 그들은 계시와 초자연성에 대해 반론을 전개하면서 인류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지정하신 율법에 따라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시대에는 교회에 대하여 특출난 논문이 출판되지 않았고 종교개혁 시대에 제시된 교회론들이 가톨릭, 루터교, 개혁교, 영국성공회 그리고 회중교회의 표준으로 남았지만, 상당한 영향력이 입증된 그 시대의 사조에 의해 새로운 개념들이 제시되기도 했다. (660.2)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믿었던 존 로크(1632-1704년)에게 교회란 윤리적인 공동체이자 도덕적인 표준의 향상을 위해 수립된 기관이었다. 그는 또한 개인의 신앙 신념에 대한 상호 관용을 호소했고, 분립한 그리스도교 조직체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태생적으로 그리스도교 범주에 든다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관용의 정신은 입지를 넓혀갔고,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의 연합이라는 전통적인 관심사는 자취를 감췄다. (660.3)
 이성이 지배했던 17세기 말, 루터교, 개혁교와 로마 가톨릭교의 신학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대하고 복잡한 교리 논문들을 저술했다. 형식주의와 무익한 스콜라 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신앙 운동들은 개인의 회심, 따뜻하고 경건한 삶 그리고 청교도적인 징계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들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운동은 독일에서 융성한 경건주의(Pietism), 영국에서 존웨슬리와찰스 웨슬리가 개척한 감리교 운동(Methodism) 그리고 로마가톨릭 내에서 일어난 얀센주의(Jansenism)였다. 각 운동은 마침내 새로운 교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시작된 낭만주의 운동은 그 당시의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신앙적인 태도를 고무시키는 경이의 정서와 감정에 힘을 실어주었다. (660.4)
 2. 프리드리히쉴라이어마허
 낭만주의 운동의 여파로, 종교란 직관과 감정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던 프리드리히 쉴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년)는 종종 지식층을 그리스도교로 돌이키기 위해 노력했던 현대 개신교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종교를 무한한 존재자에 대한 의식 또는 감각이자, 모든 교리에 초월해 있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감정이라고 정의했다. 그와 같이 강력한 개인주의의 맥락에서는 교회론의 입지가 거의 없어 보일지라도, 그는 자신의 저술〈종교론(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al Despisers, 1799)〉과 〈그리스도교 신앙(The Christian Faith, 1821-1822)〉에서 교회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660.5)
 교회의 본질과 정체에 관한 그의 논법은 성경이나 교리적인 자료들보다는 윤리학, 종교철학과 변증론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주장하는 교회는 동일한 신앙 정서를 공유하는 자들의 조합이다. 그것은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고 종교 의식이 있는 모든 신앙적인 연대를 포함한다. 그러한 구원은 자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공동생활을 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준비된다. 그와 같이 신자와 교회의 친교 안에서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가 구분된다 물론 쉴라이어마허는 외적 또는 내적 친교의 대조를 더 선호했다. 각각은 교회의 일부이면서도 의미가 다르다. 성화의 상태 속에서 사는 자들은 내적 친교에 속한다. 그리스도를 인식하도록 예비적인 은혜가 작용하는 자들은 외적 친교에 포함된다. 교회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이런 견해는 성령의 내적인 사역과 동떨어진 그리스도와의 산 교제는 없다고 보는 선택과 확신의 교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쉴라이어마허는 모든 민족이 조만간 그리스도께 나아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로 간주한다. (660.6)
 3. 알브레히트 리췰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알브레히트 리췰(Albrecht Ritschl: 1822-1889년)은 쉴라이어마허의 주관론(subjectivism)과 헤겔의 철학적 관념론(philosophical Idealism)에 반응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토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서 찾았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사실들로부터 시작하는 리췰의 신학은 사변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이고, 감정보다는 인간의 의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개인생활과 사희생활에서 모두 윤리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661.1)
 리췰은 교회와 교인들의 필요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교회는 남녀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되는 구원을 알아가고 제 것으로 삼는 장소이다. 이런 공동체의 본질적인 특징은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교훈들에 대한 수용이다. 교회는 신자들의 교제이다. 그것의 연합은순수한 복음의 교훈과 순수한 성례전의 집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회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조직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면서 또한 사랑으로 영감을 받아 공동 행위에 전념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둘은 서로 관련이 있으면서 또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렇듯 인류의 점진적인 윤리적 발전을 기대했던 당대의 지배적인 낙관론과 너무도 흡사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신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비슷한 점이 거의 없었다. (661.2)
 4. 로마가톨릭의 교회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