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중세
 1. 서방:군주적인 감독 제도
 일반적으로 서기 약 500년에서 1500년 사이의 시대를 일컫는 중세에, 신학자들은 교회론 발전에 단지 몇 가지만을 기여했다. 퀴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론을 정교하게 다듬었기 때문에 그것은 명확하게 진술되고 완성된 듯이 보였다. (656.4)
 그러나 교회 조직의 시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는 빈틈없이 촘촘하며 점점 절대적인 군주제의 형태로 발전했다. 1054년을 기점으로 서방 그리스도교와 동방 그리스도교가 분리된 이후에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년)와 인노켄트 3세(1198-1216년) 같은 로마 교황들의 영향력 아래서 존엄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들은 동시대의 정부 형태와 일치하는 로마 감독의 군주적인 지위와 최상권에 대한 교조적인 주장으로까지 무르익었다. 서방 그리스도교는 로마가톨릭교회가 되었다. 로마의 감독에게 충성하는 자들의 연대가 너무도 지배적이어서 그것이 지역 감독들의 연대를 삼켜 버렸다. 성도들의 공동체라는 콤무니오 상크토룸(communion sanctorum)의 개념이 무시되었을 뿐 아니라, 지역 교회들의 친교라는 교회의 비전마저 보편적인 감독이 지배하는 보편적인 교회라는 비전에 흡수되었다. 4세기 말 이후에는 베드로의 대리자(Vicar of Peter)라는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점점 로마교황(Roman pontiff)이라는 전통적인 명칭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원래 감독들의 명칭 중 하나였던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라는 표현은 독점적으로 로마 교황 신분을 나타내게 되었다. (656.5)
 2. 저항하는 목소리들
 저항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동방 정교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범그리스도교적인 공의회의 선언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서방에서는 누구보다 비드(Bede, 735년 사망), 집사 바울(Paul the Deacon, 약 800년 사망), 랭스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 archbishop of Rheims, 882년 사망), 라바누스 마우루(Rabanus Maurus, 856년 사망), 오리야크의 제르베르(Gerbert of Aurillac, 후에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됨. 1003년 사망) 로마 교황직의 최고 존엄성을 인정했으나 대도시 감독들의 권위를 무시하려는 교황들의 주장에는 이의를 제기했다. 피에르 다이(Pierre d’Ailly, 1420년 사망), 장 드 제르송(Jean de Gerson, 1429년 사망)과 다른 공의회수의론자들(concilliarists)은 그 같은 권위가 전체 공의회를 통해 움직이는 신실한 무리의 전체 조직체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656.6)
 로마의 견해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는 꾸준히 늘어났다. 특히 거침없이 이의를 제기한 자들은 12세기의 발도파(Waldenses, 왈덴스인들)였다. 그 밖의 반대자들은 링컨의 주교 로버트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 bishop of Lincoln, 1253년 사망), 장 드 파리(John of Paris, 1306년 사망), 독일인 수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1327년 사망),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1349년 사망), 영국인 프란체스코 회원이자 목사 겸 신학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84년 사망), 얀 후스(John Huss 1415년 사망) 같은 성직자들이었다. 불일치의 파도가 요동치고 있었다. 퀴프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토록 격렬하게 비난했던 분립이 16세기에 마침내 이르러 왔다. 이러한 발전과 그것이 교회론에 미친 영향으로 관심을 돌리기 전에 동일한 교리가 동방 그리스도교에 가져온 방향 전환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657.1)
 3. 동방:합의제적인 감독 제도
 그리스도교 내에서 사제와 감독제의 발전은 동방과 서방이 동일했다. 그러나 동쪽에서는 철저하게 조직된 군주적인 계층구조를 향한 교회의 일치단결을 덜 강조했다. 사제와 감독제도는 전체 교회를 좌우할 만큼 외형적으로 확고한 권위에 도달한 적이 없었다. 동방 정교에서 교회들은 육화된 그리스도와 사귐을 나누는 성만찬 공동체로서의 지역교회와 예배의 신비 안에 내재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더욱 숙고했다. (657.2)
 급격하게 벌어지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교회 관습의 다양성 증대에도 불구하고 자매 교회로서의 서방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 사이에는 연합과 우호의 표현들이 많이 오갔다. 서서히 진행된 관계의 소원은 1차로 9세기 중반에 분리로 이어졌고, 1054년 최종적으로 라틴과 그리스 교회들이 갈라섰고 그러한 단절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657.3)
 동방정교는 여러 공의회가 인정한 로마교회의 수위권에 도전할 욕심이 거의 없었으나 서방교회가 그러한 수위권을 전 세계교회 위에 군림하는 최고 수위권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반대했다. 모든 교회 위에 군림하는 최고수위권을 주장할 권한이 있는 교회 감독이란 있을 수 없다. 지역 공동체들의 문화를 포괄하는 자치적인 교회들은 국가 교회로서 대도시의 주교 또는 대주교를 선출해서 세속 정부와 밀접한 연대를 이루어 스스로를 다스릴 권한이 있다. 일부 감독들 즉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감독들은 초기 범그리스도교 공의회가 반포했던 신조들처럼 그들 지역을 감독할 어떤 권위를 소유했으나, 그것은 교회의 조직에 관한 문제이지 신적인 권한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른 감독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타고난 사법적인 권한을 가진 감독은 없었다 감독들은 다함께 감독단을 형성했고 본질적인 평등성을 수용했으며, 교회의 공통점을 찾는 전체 공의회에서는 감독단 전체의 권위를 행사했다. (657.4)
 C. 종교개혁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학문적, 종교적인 요인들이 16세기의 종교개혁 발생에 영향을 끼쳤다. (657.5)
 1. 루터와 교회
 아우구스티누스파 사제이자 성경 교수였던 마르틴루터(1483-1546년)는 그 당시의 교회가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었던 은혜의 교리에 대한 관점을 상실했다고 확신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칭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그것은 사제와 교회의 중재 기능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658.1)
 루터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과거에 성도의 공동체라고 불렸던 것처럼 본질적으로 칭의의 은혜로 속량함을 받은 자들의 영적인 공동체이다. 따라서 감독제 하에서 임명된 사제가 교회의 존재를 수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대신 그 정체성에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전하는 것이다. 순수한 복음이 전해지고 성례전이 합당한 방식으로 거행되는 것이 교회이다. 사도들과 동일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역사상 그들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기관의 일원이 되는 것보다 더 증요했다. (658.2)
 그때부터 루터의 교회론은 전통적인 로마가톨릭의 신념으로부터 급속하게 벗어났다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라는 교회의 양면성에 대한 그의 구분은 교회란 본질적으로 가시적인 우두머리를 가진 외형적인 사회라는 개념을 거부하게 했다. 그것은 또한 교회의 본질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과의 사귐과 같은 비가시적인 영역에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적인 또는 비가시적인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가시적 교회의 일원을 암시했다. 그것은 또한 외형적인 교인 사회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그 사회는 복음 아래서 사제 또는 감독에 의해 인도를 받는 침례 받은 수많은 신자들이다. 한편 루터는 그리스도인 제왕들이 교회를 수호해 주고,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을 위해서 교회 안에서 신앙과 사회 문제에 대해 상당한 권한을 행사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 결과교황과 주교들의 상당 권한이 그리스도인 제왕들에게 옮겨갔다. 교회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그의 두 교리문답서에서 정리되었고,〈아우그스부르크 신앙 고백(the Augsburg Confession, 1530)〉,〈쉬말칼덴 조항(the Articles of Schmalkalden, 1537)〉,〈일치 신조(the Formula of Concord, 1537)> 등 모든 것은〈공동합의 교리서(the Book of Concord, 1580)〉에 수록되었다. 이것들은 여러 루터교회에서 중요한 표준이 되었다. (658.3)
 2. 칼뱅과 교회
 1520년대에 루터, 멜란히톤과 다른 개혁자들은 개혁가톨릭교회와의 재결합이 그 시대의 주요 과제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그런데 1540년대와 1550년대에 타협에 이르겠다는 모든 기대가 무너지자 2세대 개혁 신학자들은 교회의 본질과 정체에 대한 그들의 독특한 이해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그중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4년)이 가장두드러졌다. (658.4)
 그가 가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개념은 근본적으로 루터의 개념과 일치했지만, 가톨릭교회의 몸으로부터의 분리가 무기한 지속될 것이라는 칼뱅의 인식은 그로 하여금 더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교회론을 발전시키도록 이끌었다. 그중 일부는 이 소논문의 목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65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