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동방 정교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범그리스도교적인 공의회의 선언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서방에서는 누구보다 비드(Bede, 735년 사망), 집사 바울(Paul the Deacon, 약 800년 사망), 랭스 대주교 힝크마르(Hincmar, archbishop of Rheims, 882년 사망), 라바누스 마우루(Rabanus Maurus, 856년 사망), 오리야크의 제르베르(Gerbert of Aurillac, 후에 교황 실베스테르 2세가 됨. 1003년 사망) 로마 교황직의 최고 존엄성을 인정했으나 대도시 감독들의 권위를 무시하려는 교황들의 주장에는 이의를 제기했다. 피에르 다이(Pierre d’Ailly, 1420년 사망), 장 드 제르송(Jean de Gerson, 1429년 사망)과 다른 공의회수의론자들(concilliarists)은 그 같은 권위가 전체 공의회를 통해 움직이는 신실한 무리의 전체 조직체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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