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고대 교회
 1. 초기 교부들의 기록
 교회의 교리는 초기교회에서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초기 교부들은 교리의 잠재적인 중요성에 대해서 별다른 인식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기술에 따르면 교회는 대체로 콤무니오 상크토룸(communion sanctorum), 즉 성도의 공동체이자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으로 묘사되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기원과 배경에서 나오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성하며, 믿음과 거룩함 속에서 자라가는 신자들의 영적인 사회이다. 교회를 설명할 때 교부들의 기록들은 종종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이그나티우스, 105년경), ‘새 이스라엘’(로마의 클레멘트, 95년경;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 150년경) 또는 ‘성령의 전’(이레나이우스, 180년경)으로 지칭했으며, 다른 이들도 신약의 저자들이 사용했던 주제 중 하나를 떠올리는 정도였다. 더 진전된 연구는 거의 없었다. (654.1)
 2. 감독교회로의 변화
 그러나 얼마 후 개념의 변화가 생겼다. 이미 2세기에 이르러 한편에서는 박해가, 다른 한편에서는 이설들이 일어났을 때, 진정한 보편(catholic) 교회를 가릴 수 있는 어떤 외적 특징들을 지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교회는 참그리스도교 전통을 소유한 채 사도의 직속 후계자들이었던 감독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외형을 가진 일종의 기관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신약에서 감독, 목사(또는 장로), 집사라는 삼중 체계를 갖춘 감독제가 신약시대에 교회 운영의 원식적인 형태로서 인식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2세기에 등장한 그 제도는 곧 실제로 보편화되었다. 로마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이 제도가 평온하게 수용되었다는 사실은 지도자로 부상한 감독의 지위가 당시의 필요와 어느 정도 일치했음을 보여 준다. (654.2)
 일반적으로 감독은 사도를 대신하여 가르치는 직분을 계승했다고 본다. 그들의 직분에는 또 다른 특별한 은사가 추가되었다. 그들은 제사장들처럼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 섰다. 그러한 지위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매우 명확하게 구분하고 그리스도교 사역의 새로운 이해뿐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특징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였다. (654.3)
 3. 퀴프리아누스의 교회론
 248년부터 258년까지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퀴프리아누스는 구획을 정하고 최초로 명시적인 감독제 교회론을 발전시켜야 했다. 그의 교회론에는 사법적이고, 논리이며, 실용적인 로마 법률을 통해 훈련 받은 사람의 흔적들이 많이 나타낸다. 다시 한번 박해와 이설에 직면하여 내놓은 그의 견해는 교회의 연합과 감독의 권위라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퀴프리아누스는 마태복음 16:18를 토대로 교회가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감독들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교회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이 교회였고, 누구든지 합법적인 감독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교회 안에 속하지 않았다. (654.4)
 감독들은 함께 하나의 단체 즉 감독단을 구성했다. 그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교회를 대표했다. 교회의 연합은 감독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교회 밖에서는 구원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이단들은 그들 교회의 기원을 밝히고, 그들의 감독들의 권위를 증명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즉 감독과 감독을 잇는 직접적인 계통을 따라 그들의 교사이자 선구자인 첫째 감독이 사도들 중 한 명임을 증명해야 했다. (655.1)
 퀴프리아누스는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참가족들을 포괄하고, 가시적이며 외형적인 연합에 의해 서로 결속된 보편적 교회의 개념을 최초로 제창하였다. 결국 이설의 발생을 저지하려는 바람이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점차 훼손하게 될 개념을 초래했다. (655.2)
 한편 동일한 시기에 또 다른 흐름이 나타냈다. 교회 형성기의 주된 경향이 외형적인 집중화와 교회의 통제로 향했다면 가끔은 반대의 움직임이 격려하게 그것에 저항했다. 이단자들로 지목되었지만 이들 옹호자들은 참교회를 성도들의 교제로 간주했다. 그들은 교인들의 성결을 진정한 교회의 표지로 삼았다. 그래서 2세기 중반에 발생한 몬타누스파(Montanism)와 3세기 중반에 발생한 노바티아노파(Donatism), 4세기 초에 발생한 도나투스파(Donatism)는 교회의 점진적인 세속화와 확장되는 모호함과 속됨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생하였다. 여러 면에서 그들은 교회의 순수성을 위해 노력했고, 엄격한 생활방식과 교회의 징계를 고수했다(참조 은사들 XIII. A) (655.3)
 4.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s)와 도나투스파(Donatist)논쟁
 도나투스파 논쟁은 교회의 본질과 정체에 대한 신학적인 고찰의 속도를 가속화시켰다. 도나투스파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는 그리스도교 집단으로서 교회란 성도들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 쟁점은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황제 치하에서 발생한극렬한박해 중에 특별한 중요성을 띠게 되었는데 그때 황제는 그리스도교 서적과 교회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그러한 압박 아래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성경 사본을 로마의 박해자들에게 불태우라고 제출했다. 박해가 잦아들자 수많은 배교자들(트라디토레스, 문자적으로 ‘[성경을] 넘겨준 자들’)이 교회로 돌아왔고, 도나투스파는 박해하에서 신앙을 잃은 자들은 재침례를 받아야하고 감독들도 재안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655.4)
 그 운동은 카르타고의 감독 카에킬리아누스(Caecilianus)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반대의 근거는 그의 안수식에 배교자 한 명이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75년 후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가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힙포(Hippo)의 감독이 되었을 때, 북아프리카의 민족주의로부터 강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독립 파벌이 그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집단으로 입지를 굳힌 상태였다. (655.5)
 한편으로는 교회의 정체성과 연합에 관련된 신학적인 쟁점들이 제기되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성례전의 타당성이 자격이 없는 목사들에 의해 공표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퀴프리아누스의 유산을 바탕으로 그 문제들을 다뤘고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서양 신학에 영향을줄 방식으로 긴장을 해소할 수 있었다. 교회는 그 구성원들의 도덕적인 성품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것들에 기초하여 거룩한 것이다. 거기에는 신자들의 믿음, 그리스도의 가르침, 감독의 계승과 성례전이 포함된다. 교회는 박해 또는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신앙을 상실한자들을 색출하기를 거부하면서 마지막까지 성도와 죄인들이 “섞여 있는 몸”으로 남을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655.6)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따르면 교회의 성례전은 그 유효성이 그것을 집행하는 목회자(목사 또는 감독)의 자격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들의 진정한 성직자는 그리스도이다. 목회자가 아무리 거룩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집행하는 성례전에 은혜를 부여할 수는 없다. 한목회자의 개인적인 부적합성은 성례전의 유효성 또는 그것이 주입시키는 은혜의 효험을 더럽히지 않는다. 수여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655.7)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가 교회의 연합이든지 보편성이든지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죄는 교회 생활의 불가피한 측면의 하나이기 때문에 절대로 분열의 사유와 근거가 될 수 없다. 게다가 북아프리카에 국한되어 있는 도나투스파는 지리적인 의미에서 보면 보편적인 교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지역 교회들은 보편적인 교회의 속할 때라야만 진정한 교회이다. (656.1)
 퀴프리아누스는 중앙집권화한 권위와통제력을 가지고 보편적 교회의 개념을 수호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이론을 하나의 제도로 발전시켜서 서방 그리스도교를 장악할 교황의 패권에 기초를 놓았다. (656.2)
 5. 로마 감독의 지위
 교회의 감독제도가 확대되자, 다섯 곳, 즉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그리고 로마가 특별하게 주목을 받았다. 이들 교회의 지도자들 사이, 특히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지도자 사이에 경쟁의식이 심화됐다. 5세기 말에 이르러 로마의 감독은 특별한 위치의 지위와 역할을 획득하였다. 그는 먼 곳의 교회들의 운영에 개입했고, 신학적인 논쟁에서 우위를 점했으며, 교리와 도덕적인 문제에 관하여 다른 감독들에게 조언을 주었고, 먼 곳에서 열리는 종교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마 16:18, 19의 진술에 비추어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의 후계자인 로마의 감독들은 이러한 최상권이 신학적으로 확고한 토대에 기초했다고 주장했다. 동로마 또는 비잔틴 로마에서 발달한 동방 교회들은 그러한 주장을 거부하면서도 로마 감독의 우월한 존엄성과 그가 주교단 내에서 동류들의 수장임을 인정하였다. (6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