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4절)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9절)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21절) (76.4)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이 그를 거절하고 그의 제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함을 알았을 때,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23-25, 강조 첨가)고 하였다. 신약은 다윗의 생애에 나타난 어떤 특정한 상황을 그리스도의 생애의 비슷한 상황에 연결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은 시편 69에 기록된 것의 “성취”라고 부른다. 메시아적 표상학의 원칙은 이러한 연결을 정당화한다. (76.5)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짐승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로부터 정결케 하신 직후에, 제자들은 “주의 집을 위한 열심히 나를 삼킬 것이다”(요 2:17)는 시편 69:9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시편 69:9의 원문에 나타난 현재 시제를 요한복음 2:17에서 미래 시제로 바꾼 것은 시편 69편의 예언적 지평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 바울은 원래 다윗에게 해당 되는 시편 69:9의 다른 말들을 그리스도의 경험에 적용하였다(롬 15:3 참조). (77.1)
 또한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사람들이 그에게 신 포도주를 주었다(마 27:48; 막 15:36; 눅 23:36)는 묘사는 시편 69:21에 나타난 시인의 경험과 일치한다. 요한복음은 분명하게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요 19:28, 강조 첨가)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성경이 시편 69:21“저희가∙∙∙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이다. (77.2)
 다윗이 시편 69:25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내린 심판은 사도행전 1:20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다와 운명에서 성취되었다. 크라우스(Hans J. Krau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77.3)
하나님의 종 예수의 고통을 통해 시 69편의 신비한 기별이 마침내 드러났다. 이제 이 시의 본질적인 기별은 다른 것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성취가 각 개인을 넘어 구약 시의 케뤼그마를 “채웠다.” 그것은 이사야 53장, 시편 22편, 118편에 장엄한 음조로 선포된 노래에 나타나 있는 무한한 고통의 깊이 속으로 스며든다. 20
(77.4)
 시편 118편은 성전에서의 감사 기도문의 일부이다.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회중이 드리는 찬양의 화답을 포함하고 있다. “의인”(2절)에 속한 한 개인 경배자는 아마도 왕일 것이며, 그는 죽음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된 경험을 하였다(17절). 그는 그의 간구(21절)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여호와의 구원(17절)에 대해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성전에서의 그의 동료 예배자들은 이 억압받은 자의 구원과 사태의 놀라운 반전에 대해 놀라움을 표한다. 그는 건축자의 버린 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중요한 존재임이 입증되 었다. (78.1)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 23)
(78.2)
 이 격언의 근본적인 개념은 버림받은 자가 존귀와 명예를 얻게 되었고, 죽을 운명에 처했던 자가 새 생명을 받았다는 것이다(17-18절). 모든 이스라엘이 그의 구원을 기뻐하자고 초청을 받는다(24-29절). 시편 118편은 어떻게 이스라엘에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경험이 상호 섞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복음서 기자는 시편 118:22을 메시아의 고난과 죽은 자들로 부터의 부활에 예언적으로 적용한다(마 21:42; 14-15절과 비교).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랍비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눅 20:17, 강조 첨가)라고 물으셨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전통적인 감사시인 시편 118편에서 순전히 역사적인 주석을 넘어서서 메시아적 의미를 보셨다. 그리스도는 표상학적 원리의 적용을 통해 감사시의 숨은 의미를 꿰뚫어 보셨다. 기독론적 해석이 이 시의 의미를 풀었다. (78.3)
 시편 118편에 대한 베드로의 적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로 강조한다. 이 비예언적인 시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탈굼(Targum)은 시편 118:22을 기름부음 받은 자로 선택되기 전에 배척 당했던 다윗에게만 적용한다.21 그러나 베드로는 그의 사도적 확신으로 시편 118의 종말론적, 기독론적 성취를 발전시킨다(벧전 2:4, 7). (78.4)
 더 나아가 베드로와 바울은 시편 118편‘돌’을 집합적, 연대적 의 미로 사도들의 교회에 적용하였다(벧전 2:4-5; 엡 2:20). 그리스도인 신자들은 “친히 모퉁이 돌”(벧전 2:5)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산 돌과 같은 자들이다. (79.1)
 요약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이스라엘의 네 시편(시편 22, 41, 69, 118편)은 직접적인 메시아 예언들은 아니다. 그것들은 시인 혹은 다윗 왕 자신의 시대에 곧 바로 적용되는 이스라엘의 기도와 감사였다. 예수의 발자취 안에서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명, 고난과 배척을 당하시고 부활하시어 주가 되시는 전 과정이 이스라엘의 예전 송가에 묘사된 가장 극적인 경험의 몇 가지에 대한 성취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신약은 이스라엘의 시편과 기도에 대한 표상학적 해석을 카르친다.22 그리스도와 신약을 통해 빛을 보게 된 이 놀라운 시편의 표상학은 이런 종류의 시편들을 간접적인 메시아 예언으로 분류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것들의 기독론적 적용의 근간이 되는 해석 원칙은 그리스도는 이스라엘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더 충만한 의미로 이스라엘의 경험을 되풀이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23 (79.2)
 이 신약 인용의 목적은 단지 가려진 메시아적 예언들이 어떻게 예수의 생애에서 정확하게 실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를 이스라엘 역사의 목표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완전한 실체로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문자적 예언을 증명하는 이가 아니라 무한히 더 높은 개념에서 신약의 보화시다. 그 위에 메시아, 택함 받은 자, 사랑받는 자, 다윗의 후손 등의 메시아적 칭호들과 이스라엘의 칭호들 곧 여호와의 종, 버림받았으나 택함을 받은 머릿돌, 성전 등이 함께 주어졌다. 간단히 말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언약 관계의 절정으로서”24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히 12:2)로 높인다. (79.3)
 예언서에 나타난 역사적 진술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
 복음서 기자들은 종종 이스라엘 과거의 어떤 역사적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다. 마태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출애굽을 상기시키는 호세아서의 역사적 언급인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11:1)”를 인용하였다. 그는 이 말들을 헤롯이 죽을 때까지 애굽으로 피해 있었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적용하였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2:15). 마태가 이 구절을 인용한 요점은 호세아의 구절이 아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세아의 말은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출 4:22 참조로서의 이스라엘의 의미 있는 역사적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마태는 어떻게 호세아 11:1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다윗의 경험을 메시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과 같은 논리에 의한 것이다(앞 장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그(the)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와 운명을 나타낸다. 마태는 이스라엘의 역사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명에서 충만히 계시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80.1)
 마태는 헤롯이 베들레헴에서 두 살 아래의 모든 아이들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도 묘사한다. 지금 그는 예레미야서에 묘사된 이스라엘 역사의 한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베들레헴에서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 루어졌다”고 한다. (80.2)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7-18; 렘 31:15과 비교)
(80.3)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라마를 경유하여 바벨론에 강제 이주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레미야 자신이 증거한 것이다. 그 때에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라헬이 울었다. 마태에 따르면, 이 “울음”은 헤롯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내린 대학살령으로 인한 베들레헴 사람들의 울음에서 “이루어졌다.” 마태는 이스라엘 역사의 많은 중요 사건을 메시아적 성취의 예시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생애 안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의 더 충만한 의미카 밝혀진다.25 이런 방식으로 마태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구원 역사 속에서 그의 목표를 이루신다는 기독교 신앙을 확증하고 있다. (81.1)
 성서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구약역사는 단순한 역사적—문법적 주석이 조명할 수 있는 것보다26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 센수스 플레니오르(sensius plenior) 곧 “더 충만한 의미”라는 신학적 용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바르게만 통제되면27 “더 충만한 의미”의 개념은 신약 기자들과 묵시문학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유효하고도 필수적이다. 성경의 “더 충만한” 의미는 정의상 하나님이 성경에서 의도하신 의미이다. 그것은 인간 저자들이 분별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나 이어지는 성령의 계시로 분명해 진다. 한 학자가 정의한 것처럼, “이 두 사건에서 저자는 그의 청중들에게 센수스 플레니오르를 전달할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후대에 더 많은 계시의 빛으로 원 저자를 영감한 성령의 감동 아래 더 충만한 의미가 독자들에게 분명해졌다.”28 (81.2)
 사도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의 몇 가지 예들을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요한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는 것은 이사야의 기별에 대한 예루살렘의 불신의 성취로 해석한다. (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