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드(C. H. Dodd)에 따르면,12 신약 기자들은 구약에서 발췌한 증거 구절들로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구약에서 전체 문맥을 지시하는 하나의 구절이나 문장들을 인용할 뿐이다. 그렇게 더 큰 문맥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플롯”을 전개하고, 교회와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의 독특한 의미를 위한 열쇠를 제공한다. 나사렛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예언들의 비극적인 좌절이나 연기가 아니다. 오히려 오순절의 사도 베드로에 의하면, 이 모든 사건들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행 2:23; 4:28 비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특별히 그동안 너무나 나태하고 무관심하였던 그리스도와 신약의 기자들이 집단적 이스라엘의 어떤 역사적 경험을 메시아의 경험에 대한 표상으로 본(출애굽, 침례, 시험과 함께 사막 경험) 바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들은 앗수르—바벨론 포로로부터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여러 예언들에서 더 깊고, 온전한 개념들을 바라본다. (71.3)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제3일” 부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번 그가 “삼일 후에”(막 8:31; 9:31; 10:34) 혹은 “제 삼일에”(마 16:21; 17:23; 20:19; 눅 9:22; 18:33; 24:7, 46)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리라고 선언하셨다. 그는 그의 고난과 죽음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도 구약에 예언되었다고 하셨다(눅 18:31-33; 24:46). (72.1)
 그러나 과연 구약의 어느 구절이 이 특별한 메시아적 예언을 제시하고 있는가? 비록 사도들은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의 부활에서 성취되었다는 자신들의 확신을 확증하기 위해 세 개의 시편을 제시하였지만(사도행전 13:33에서 시편 2:7을, 사도행전 2:31에서 시편 16:10을, 그리고 사도행전 4:11에서 시편 118:22을), 인용된 이 구절 중 어느 것도 “3일 후 부활”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예수께서 예언하신 그 시간의 특별한 자료로 간주될 수 없다. 구약의 다른 두 구절을 예수의 말씀의 특별한 출처로 인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요나 1:17호세아 6:2이다. (72.2)
 예수께서는 고기 뱃속에서 “삼일 낮밤”을 보낸 요나의 경험에서 무덤에서 머무시는 그 자신의 경험에 대한 메시아적 표상을 보셨다. 호세아는 BC 722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앗수르 포로에서 돌아와 부흥과 회복을 맞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예언을 어떻게 메시아적으로 적용하셨는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앗수르 포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열 지파에 내리실 심판이 임박하였다는 배경에서 호세아는 진정한 마음의 변화를 보여줄 이스라엘의 회개를 묘사하고 있다. (72.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1-2, 강조 첨가)
(72.4)
 한 학자는 호세아 6:1-2에 대한 주석에서 “문자적으로 이 구절은 부활에 대한 예수의 예언에 대해 구약이 제공하는 가장 가까운 병행구절이며, 그 영향력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13고 하였다. 또 다른 이는 호세아 6:2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근본적인 구절”이라고 불렀다.14 앗수르 포로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 적용하였을 때, “이틀 후”“제 삼일에” 있을 회개한 이스라엘의 부흥과 회복에 대한 호세아의 약속은 가까운 장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만을 의미할 수 있다. “이틀”“삼일”에 대한 호세아의 예언은 분명히 앗수르 포로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귀환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 포로는 BC 722년에 시작하여 BC 539년 바벨론의 멸망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포로 이후 랍비들은 호세아의 예언을 새롭고 종말론적인 방식으로 적용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할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매튜 블랙(Matthew Black)은 호세아 6:2을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창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오래된 유대교의 전통적 주석이다”15라고 하였다. 유대교 주석들은 또한 호세아 6:2을 죽은 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희망을 강화하기 위하여 요나 1:17과 연결하였다.16 그러므로 “제 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리라는 자신의 확신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예수께서는 이 호세아 6:2요나 1:17을 함께 묶어서 생각하였음에 틀림이 없다.17 (72.5)
 예수께서는 “이틀 후에”“제 삼일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호세아의 예언의 상징적 표현을 문자적으로 그 자신의 대리적 죽음과 부활에 적용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원래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무리의 국가적 회복에 해당되는 예언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자기 자신과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는 자신의 신속한 부활에 적용하셨다. 랍비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활할 것을 언급하면서 호세아 6:2의 예언을 종말론적으로 적용하는 반면, 예수께서는 새롭고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부활에 이스라엘의 부활을 적용하셨다. 예수께서 보실 때 이것이 호세아 예언의 보다 깊은 의미였다. 이제 예수의 예언 해석의 원칙이 드러났다. 예수께서 이스라엘이시다. 그리고 그의 부활 안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성취된다. 다드(C H. Dodd)는 심지어 “그리스도의 부활이 선지자가 말한 이스라엘의 부활이다”18라고 하였다. (73.1)
 만일 예수의 부활은 호세아 6:2 예언의 더 깊은 뜻이며 성취라면, ‘이스라엘’‘회복’이란 용어는 언제나 메시아적으로, 즉 종말론적으로 적용한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종말론에서 예언의 문자적 성취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지나 그리스도의 부활로 나아간다. 이스라엘의 사명과 운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소망이 실현된다.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호세아 예언을 이렇게 메시아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구약 예언 이해를 위해 깊고도 멀리 이르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나 대표적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속한 구약의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여러 번에 걸친 신약의 예들에 나타나 있다. (74.1)
 이스라엘 예배 송가에 대한 예수의 메시아적 적용
 그리스도 자신의 메시아적 해석 원칙을 견고히 세우기 위하여서는 예수께서 그의 메시아적 경험에 대한 예시로 제시한 네 개의 시편(시편 22, 41, 69, 118편)을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74.2)
 시편 22, 41, 69편은 고통과 위기의 때에 이스라엘 사람 개인과 집합적 이스라엘 모두에게 적용된 예전적 비탄 시에 속한다. 그러나 이 비탄에는 하나님의 구속적 개입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확신과 감사가 포함되어 있다. 개인과 전체로서의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관계는 매우 밀접 하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공중 예배에서 부르는 노래에 나타나는 개인이 왕이거나 백성을 대표하는 지도자일 경우에 그러하다. (74.3)
 십자가 위에서 가장 깊은 고통의 순간에,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막 15:34)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일찍이 다윗이 피에 굶주린 원수에게 포위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부르짖었던 시편 22:1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 시 전체는 극도의 고통과 조롱에 대하여 전개된 한 문단의 비탄시(1-21절)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다윗의 쓰라린 경험이 무한히 더 깊은 자신의 고뇌와 분명하게 일치된다고 생각하셨고 더 나아가 그것의 하나의 표상이 된다고 보신 것이다. 시편 22편에 나타난 다윗의 역사적 탄식은 직접적인 메시아 예언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신약의 기자들은 시편 22편의 많은 국면을 십자가와 그 이후의 영광에 표상학적으로 적용하였다. 시편 22편은 신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더 깊이 성취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시로 가장 많이 언급된 시 중의 하나이다. 정죄 받은 자의 옷을 제비뽑는 것에 관한 시편 22:18요한복음 19:24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된” 것으로 인용되었다. 시편 22:12의 다윗의 감사는 히브리서 2:12에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으로 인용되었다. (75.1)
 시편 41편에서 이스라엘 왕은 중병에 걸렸을 때의 필요(3, 4절)와 거짓 고소로 그를 죽이려고 하는 그의 원수들이 얼마나 자기와 가까운지(5-8절) 표현하고 있다. 이 탄식의 중심에서 자기와 함께 왕의 상에서 먹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자신을 대적하였다고 토로한다. (75.2)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편 41:9).
(75.3)
 여기서 말하는 이가 다윗이 신임하던 모사였던 아히도벨(삼하 15:12, 31)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75.4)
 예수께서는 다윗의 이 경험을 열두 제자에게 말할 때 분명하게 언급 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막 14:18, 21; 눅 22:22과 비교). 그리고 그는 덧붙이기를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 강조 첨가, 17:12과 비교)고 하였다. (75.5)
 다윗 왕이 그의 친한 친구로부터 당한 충격적인 배신은 예언도 직접 적인 메시아 예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 역사적 경험과 예전적 탄식을 자기 자신에 적용하셨다. 그리하여 다윗이 당한 불행한 배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표상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시편 41:9의 더 깊은 기독론적 의미를 드러내신 것이다. (76.1)
 시편 69편은 유다 왕의 처절한 탄식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무고하게 고소를 당하였고, 처절하게 박해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것은 감사의 노래와 하나님에 대한 우주적 찬양을 청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34-36절; 시 22:22; 41:13과 비교). 이 지도자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도둑으로 고소를 당하여 고통을 받고 있다(4, 9절). 그는 자신의 고통을 비슷한 고난을 겪는 다른 이들의 대표나 본보기로 이해한다(6절).19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홀로 서 있다(8-9, 17절). 그러나 그 극심한 고통 중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다(6절). 하나님이 개입하시자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된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찬양과 감사를 청하는 것으로 이 감동적인 시는 마무리 된다(30-36절). (76.2)
 시편 69편에 대한 신약의 몇몇 인용절들이 이 비탄과 송영의 메시아적 의미를 드러낸다. (7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