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해석의 범주에 있어서 종종 바른 방법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거나 필요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신약이 이스라엘의 역사, 예언, 지혜, 그리고 거룩한 시가들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기독교 최후의 권위요 최고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는 구약에서 말로 하는 예언과 간접적 예언으로서 표상이 본질적으로 다른 해석학적 원칙들을 지닌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확인하였다. 예언적 예언과 표상학적 사상 패턴은 자연스럽고 온전한 통일성을 형성한다. 메시아적 예언이 구약 소망의 핵심이다. 이 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언약의 약속들이 만나고, 거기로부터 이스라엘의 우주적 사명이 비롯된다. 심지어 고도로 발달된 상징주의를 지닌 특별한 묵시적 예언들도 종종 메시아 중심적이다(단 7-12장). (64.1)
 메시아적 예언들
 신약의 조명으로 보면, 구약에서 세 가지 범주의 메시아적 예언을 확인할 수 있다. (64.2)
 첫째, 직접적이거나 직선적인 예언들이다. 예를 들어, 이것들은 미가 5:2의 메시아의 출생 장소(마 2:5-6), 이사야 53장의 그의 대속적 죽음(눅 22:37; 롬 5:19; 벧전 2:24), 다니엘 9:26-27의 그의 “끊어짐”“제사와 예물을 폐함”(마 27:51; 히 10:8-9), 시편 16:10의 그의 부활(행 2:27, 31), 스가랴 9:9의 그의 승리의 입성(마 21:12, 23), 그리고 이사야 9:5-7의 영원한 세계 평화를 위한 그분의 통치(눅 1:32-33; 계 11:15) 등이다. 이와 같은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직접적으로 성취되었고 또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예언의 구도와 성취되는 사건과 확인이 단순하다. 그와 같은 예언들의 성취는 하나님의 예지와 주권적 섭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준다. 그분의 예언들은 각각으로 분리된 단편들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 가지 구속의 계획 혹은 약속의 일부분들인 것이다. (64.3)
 둘째, 표상학적인 메시아적 예언들이다. 이것들은 이미 모세 이래로 이어진 선지자들(신 18:15, 18-19)1과 예루살렘 왕들(삼하 7:12-16)2에게서 부분적인 초기 성취들을 이루었다. 이 두 계열은 메시아 한 분에서 절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록 약속된 선지자의 즉각적인 성취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였고(민 27:18-23; 신 34:9), 약속된 왕의 성취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었지만(삼하 7:14; 시 132:12), 신약에 따르면 오직 메시아 그분 자신만이 가장 위대한 선지자요 영원한 왕이시다(행 3:22-26; 눅 1:32-33). 대부분의 메시아 예언들, 특별히 왕의 시들, 즉 시편 2:7; 18:43; 22; 45:6-8; 72:8; 89:26; 110:1, 4; 118:22-23; 132:11-18 등이 이 표상학적 예언의 범주에 속한다. (65.1)
 신약은 다윗의 시편들에 메시아적 차원이 추가되어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에서 네 개의 시편 구절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성취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인용되고, 주석되고, 종말론적으로 적용되었다. 즉 히브리서 2:12, 13에서 시편 8:46은 인자의 완전한 인성을, 히브리서 3:7-11에서 시편 95:7-11은 그의 완전한 안식을, 히브리서 5:6에서 시편 110:4은 그의 완전한 중보자 되심을, 히브리서 10:5-7에서 시편 40:6-8은 그의 완전한 기희생을 각각 의미하는 것이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시편들을 인용하면서 이 단어들이 지닌 원래의 역사적 의미에 자신의 해석을 추가하였다. 키스티메이커(S. Kistemaker)가 히브리서에 나타난 이 네 개의 시편 인용에 대한 자신의 학위 논문에서 결론을 내린 것처럼, “저자는 원 배경에서의 예언을 히브리서를 기록하던 당시에 실현된 성취에 연결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미드라쉬 페세르(유대주의 종말론적 해석) 해석 형식으로 취한 이 성경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성취로 인도되는 역사적 조망으로 빛을 발한다.”3 이러한 역사적 조망에서 한 선지자나 제사장, 혹은 다윗 가의 왕은 그의 거룩한 직임으로 승리하는 구주의 대리자로서, 오실 더 크신 원형의 표상으로서 의 역할을 한다. (65.2)
 이런 종류의 표상학적 예언은 ‘이중’ 혹은 애매한 개념을 갖지 않고 메시아적 약속에 대한 처음의 부분적 성취로 근본적인 이중 적용의 여지를 제공한다.4 즉각적인 역사적 적용이나 약속에 대한 부분적인 실현은 그 자체로 역사적 표상이나 행위 예언으로 기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약속을 재확인하고 미래의 성취에 대한 희망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한 루터교 학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표상에 의한 메시아적 예언은 낮은 개념에서 결코 메시아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표상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것으로 우리에게는 대언의 영에 의해 묘사 되기 때문이다.”5 재림교회 성경 주석은 신명기 18:15에 대해 다음과 같이 좀 더 충분하게 설명한다. (66.1)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힘은 선지자의 말이 먼저 좀 더 가까운 역사적 상황에 적용되었다 해서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 종종 처음의 것과 좀 더 즉각적인 성취는 두 번째의 성취를 확증하고 명료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에 필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신약 기자가 구약 선지자의 진술을 신약이나 이어지는 시대에 적용할 때, 그런 적용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것은 신약 기자의 영감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문맥이 즉각적 역사적 상황에 적용되는 것을 명백히 할 때, 그런 적용을 부인하는 것을 해석의 근본 원칙을 범하는 것이다. 즉 문맥과 역사적 배경 조사는 어떤 구절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66.2)
 우리는 메시아적 예언이 동떨어지거나 흩어진 예언이 아니라 함께 모여 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계획을 구성하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계획은 에덴동산 타락 이후, “여자의 후손”(창 3:15)으로 구속주가 약속된 그 첫 약속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원 ‘어머니’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창 12:2-3; 22:17-18; 28:13-14)으로 구속주에 대한 약속을 그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왕 구속주에 대한 약속을 특별히 유다 지파에 제한하셨다(창 49:10; 민 24:17과 비교).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구속주 왕(Redeemer King)에 대한 약속을 그의 통치가 영원하며 우주적인 다윗의 집으로 제한하셨다(삼하 7:12-15). 구속주—왕에 대한 이런 반복된 점진적 계시는 여러 메시아적 예언들을 하나의 위대한 약속 안에서 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 약속은 의인들의 집인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될 때에만 온전히 이루어진다(벧후 3:13). (67.1)
 한 구약 학자가 메시아적 조망의 “대단한 흐름”을 다음과 같이 강조 하였다. “각 예언은 부조 시대 이전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약속에 계속적으로 첨가되고, 확대되었다. 그것은 부조들로부터 포수기 이후의 학개 스가랴 말라기로 내려오면서 계속 보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최고의 약속으로 남아있다.”6 (67.2)
 그러나 신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적용되었지만 그 원래의 문맥에서는 어떤 명백한 예언적 의도도 지니고 있지 않은 여러 개의 비예언적인 구절들이 남아 있다. 그와 같은 구절들은 역사적인 내러티브나 사건들, 한 시인의 고난의 경험들, 애가들, 탄원들, 감사들, 선지서의 묘사적 주장들 등일 수 있다. (67.3)
 몇 가지 예들이 약속-성취의 이런 특별한 신약의 패턴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스도는 “삼일 낮밤”(욘 1:17) 큰 물고기 속에 있었던 요나의 경험을 믿음 없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그 자신의 표징으로 인용하였다(마 12:40; 눅 11:29-30, 32). 비록 요나의 내러티브는 실제로 죽을 뻔 하다가 기적적으로 구출 받아 니느웨의 이방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한 그의 경험을 순전히 역사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요나의 경험을 메시아적 표징으로 즉 그 자신의 죽음과 초자연적 부활의 예언적 표상으로 적용하였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마치 요나가 그의 표징으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권위를 부여받은 것처럼 예수께서도 마찬가지로 메시아로서 유대인들에게 그의 기별을 전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요나보다 크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기별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니느웨 사람들이 받은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 것이며, 회개하면 피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68.1)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지혜(마 12:42; 눅 11:31)와 어떤 의식법으로부터 자유롭게 안식일을 지키는 다윗의 권위(막 2:25-26; 마 12:34, 5-6; 눅 6:3-4)에 대한 예수의 호소는 요나의 표징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같은 메시아적 표상학의 범주에 속한다. 메시아적 희망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들 사이의 세 종류의 중개자—선지자, 제사장, 왕로 실례가 되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종류의 거룩한 직분을 이스라엘과 세상을 위한 그 자신의 사명의 표상으로 주장할 때 그 심원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7 (68.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종교적, 의식적, 정치적 삶에 나타난 메시아적 표상들을 연구하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수의 사역과 사명을 더 좋게 더 낫게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구약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하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어떻게 독특한 방식으로 그 자신에게 적용하였는지 고려하면 더 충만한 이해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명된 대표자로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스라엘을 통하여, 인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재현하고 반복하고 완성하셨다.8 그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바로 그 부분을 극복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같은 지점으로 나아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그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자신을 그의 아들과 사랑하는 종으로 증거하고(마 3:17) 그에게 공적으로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신 이래로(마 3:16; 사 42:1과 비교) 자신이 이사야 42:53에 예언된 ‘여호와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메시아로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과 결속되신 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출 4:22)로 불린 것처럼 이스라엘 자체의 구현이셨다. 이 종을 통하여 “여호와의 뜻을 성취”(사 53:10)할 것이었다. (68.3)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은 이후 즉시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시험받으러”(마 4:1; 막 1:12; 눅 4:1과 비교) 나가셨다고 기록 한다. 출애굽 하여 홍해에서 “침례”를 받은 이후 고대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이전에(신 8:2)(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 시험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독특한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대한 그의 메시아적 믿음에 대하여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사십일 동안 광야에 끌려 가 있었다. 정확히 사십일 동안의 그의 의도적인 금식을 통해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경험을 재현하셨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순종을 나타내셨다(세 번에 걸쳐: 마 4:4, 7, 10; 각각 신 6:13, 16; 8:3에서 인용).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세 번에 걸친 시험에 대한 그의 답변으로 다른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신명기 6-8장에서 인용하셨다는 사실이다. 로버트 프랑스(Robert T. France)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69.1)
예수께서 이 장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년 동안 사막에서 방황하며 배운 공과들을 생생히 상기시켜 주는 것으로 그 자신의 시험의 순간을 위한 하나의 패턴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그의 ‘아들들’(신 8:5; 출 4:22 비교)인 이스라엘의 순종을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사명을 수행하기 이 전에 사십년 동안 사막에서 시험하셨다(신 8:2). 이제 그분은 예수께서 그의 위대한 구원의 사명에 나서기 전에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그를 시험하신다.9
(69.2)
 몇몇 학자들이 시도한10 신명기 8장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언어적, 신학적 문맥 연구를 통해 예수께서는 그 자산을 표상적 개념에서 새 이스라엘로 보았음이 분명해졌다. 두 번 다 “하나님의 아들”이 시험을 받았다(출 4:22; 신 8:5). 두 번 다 시험은 침례 직후에 일어났다(마 3:16, 고전 10:2). 매 번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길 것인지에 대한 시험(신 6:13-15; 마 4:10)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실지에 대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유혹이 있었다(신 6:16; 출 17:2-7; 마 4:3-7). 이스라엘은 시험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해 승리하셨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반복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로 인해 성공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표가 되신다는 진리가 왜 신약이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직접적이고 표상학적인 메시아적 예언들만 “성취되었다”고 하지 않고 구약 이스라엘인들의 삶- 대부분 다윗 왕가의—속에 나타난 어떤 역사적 경험들도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하는 이유가 된다. 그것은 마치 신약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언을 무한히 더 큰 이스라엘 메시아의 “전형적인” 역사로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무한히 깊은 의미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높임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70.1)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전체로 통합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언을 그 자신의 삶 속에서 본질적인 성취를 가져온다는 신약의 진리는 이스라엘의 종말론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에 결정적인 문제이다.11 메시아는 그 자신 속에 전체 하나님의 백성, 혹은 구속받은 인류을 포함하고 있다는 구약의 개념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한 의인의 고립된 개인적 경험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한다. 아주 초기의 신약의 기독교 신앙 고백이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기독론적 해석을 반영하고 있다. (70.2)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강조 첨가)
(71.1)
 이러한 신앙 고백이 구약의 어느 구절을 가리키는가? 그리스도와 신 약의 기자들은 그들의 기독론적 해석을 위해 어떻게 구약을 언급하는가? (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