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안식의 날을 제칠일 안식일로부터 주간의 첫째날인 일요일로 옮겼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안식일이란 낱말이 언급되고 있는 신약성경의 여러 곳들을 조사했듯이 여기에서는 주간의 첫째 날인 일요일이 언급되고 있는 신약 성경의 부분들을 세심히 조사해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신약 성경에는 일요일이란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유대교의 방식을 따라 일요일이 첫째 날이란 명칭으로 나온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 주간의 첫째 날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절들은 일곱 또는 여덟 구절에 이른다. (112.1)
 네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올라온 경건한 갈릴리 여인들이 부활의 소식을 들은 최초의 사람들이다. 네 복음서 모두에서 이 여인들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어 있다는 사실이 부활의 소식 전체에 대한 공신력을 높여주고 있다. 부활의 이야기는 초대 교회가 쉽게 고안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 문화에서는 여간해서는 여인들이 믿을만한 증인으로 나서는 것이 쉽지 않다. (112.2)
 마가복음에 나타난 주간의 첫째 날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을 최초의 복음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빈 무덤에 대한 마가복음의 이야기(막 16:1-8)부터 우리들의 고찰을 시작하는 것이 논리적일 것 같다. 빈 무덤에 대한 여인들의 증언을 읽을 때 우리는 이것을 목격자의 진술로 읽게 되며 종교적인 신념을 극화시킨 것으로 읽게 되지는 않는다. (112.3)
 마가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좇아 그를 섬긴 여자들 가운데 특별히 세 여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그들이다(막 15:40, 41). 살로메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이다(마 27:56). 이 세 여인은 다른 많은 여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하였으며 두 마리아는 예수님의 매장을 보았다. 그들은 “예수의 둔 곳을 보았다”(15:47). 이 비극적인 날은 안식일의 앞의 날인 “예비일”이었다(15:42). 예수의 묻히신 사실은 바울이 그 사실을 전도했듯이(고전 15:4) 복음서의 중심적인 진리의 한 부분이 되었다. (112.4)
 “안식일이 지나매” 두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의 몸에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샀다(막 16:1). 그들은 분명히 안식일의 일몰 후인 토요일 저녁에 향품을 샀다. 그들은 금요일의 해가 지기 전에 그들의 사랑하는 선생님을 위한 사랑의 봉사를 모두 마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안식일이 지나가기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몸에 유향을 바르는 것을 그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마지막 행위로 삼으려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최종적인 사건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그가 다시 죽음에서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여러 시간 전에 무덤에 안장된 사람에게 유향을 바르는 일은 틀림없이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랑은 자주 사람들로 하여금 실용적인 관점에서 소용없는 그런 일들도 하게 한다. (113.1)
 안식 후 “주간의 첫째 날의 매우 일찍이 해돋을 때 그들은 무덤으로 갔다”(막 16:2). 그런데 시간적인 표현에 있어서 약간의 혼란이 있다. “매우 일찍이”는 보통 제 4시 즉 오전 3시부터 6시까지의 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해돋을 때”라는 표현과 조화되지 않는다. “동트기 전에 출발하여 해돋을 때 도착했다”는 설명도 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예비일에 미처 마치지 못한 장례의 예전을 마저 마치기 위해 최대한으로 일찍 무덤으로 왔던 것 같다. 무덤으로 오면서 그들은 어떻게 무덤을 열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막 16:3).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여 보니 돌문이 벌써 열려져 있었다. 그들이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눈부시게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무덤 우편에 앉아 있었는데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16:6)하였다. 이렇게 해서 부활의 큰 소식이 그들에게 알려졌으나 그들은 그들의 귀를 믿을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공포와 놀라움에 휩싸인 채 무덤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113.2)
 이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 주간의 첫째 날에 일어났다. 그러나 비록 마가복음은 그 사건이 발생한지 25년이 넘게 지나간 이후에 기록되었지만 그 사건이 발생한 그 날이 그때 이후로 어떤 신성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힌트를 마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때까지 초대 교회에 그날은 안식의 날이나 성일로 불려지지 않았다. (113.3)
 마가복음 16:9 역시 주간의 첫째 날을 언급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마가복음의 원래의 끝이 어딘지를 결정할 수가 없다. 유명한 언설자체 사본들(Unical Codices:기원 3-8세에 희랍어, 라틴어로 필사된 사본들)인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사본과 옛 시리아의 시내산 사본과 그 밖의 다른 사본들은 16:9로 마가복음이 끝나고 있다. 고대 라틴어 사본인 코덱스 보비엔시스(Codex Bobiensis)에는 이보다 마가복음의 끝이 더 짧다. 네 개의 희랍어 언셜 사본들은 16:9에서 끝나지 않고 20절까지 늘어나 있다. 여러 희랍어 사본들도 마가복음 16장20절까지 늘어나 있다. 마가복음 16:9-20절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세 차례에 걸쳐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심(9-14절);

   (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를 위촉하심(15-18절);

   (3)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에 대한 묘사(19-20절).

 예수님의 세 차례에 걸친 출현은 분명히 주간의 첫째 날에 발생했다(9절). 영어 개역 표준 번역 성경(Reviced Standard Version) 에서는 “그가 주간의 첫째 날 일찍이 일어나서 오전에 마귀를 좇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고 되어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의 마가복음 16:9도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문법적으로 “주간의 첫 날에”라는 시간적인 표현에는 “일어났다”“나타났다”의 어느 쪽이든 잘 부합할 것 같은데 R.S.V의 “일어났다”가 더 정확할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났다”에서 “제일 먼저”라는 표현은 무조건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고 예수님이 세 차례에 걸쳐 그 모습을 나타내어 보이신 것 중에서 첫번째란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는 “슬퍼하며 울고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 곧 예수님과 “함께 하던 자들”(막 16:10)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서둘러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그녀의 보고를 “듣고도 믿지 아니하였다”(막 16:11). (113.4)
 예수님이 마가복음에서 두번째로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사건(막 16:12)은 누가복음 24:13-35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 즉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열두 제자 중의 두 제자가 아님)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던 이야기를 간단히 줄인 것 같다. 예수님은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와 열 한 제자들에게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이야기했으나 제자들은 이 보고도 믿지 않았다(막 16:12, 13).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열 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저희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다”(막 16:14). 이 세 번째의 나타나심은 누가복음 24:36-53요한복음 20:19-29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건과 동일한 사건으로 보인다. (114.1)
 9-20도 추가된 부분은 2세기 중반쯤에 알려진 듯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주간의 첫째 날에 신성한 성격이 부여되었다든가 아니면 그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이고 있다는 힌트를 찾아 볼 수 없다. (114.2)
 마태복음에 나타난 주간의 첫째날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을 수행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많은” 갈릴리 여자들이 그 두려운 날에 “멀리서” 예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죽으심을 바라보았다(마 27:55). 모세의 법에 의하면 범죄로 처형한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매단 채 밤을 넘기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 시체는 당일에 매장되어야 했다(신 21:22, 23). 요셉푸스도 확인하기를 신약 성경시대의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을 해가 지기 전에 옮겨 매장하였다고 했다.1 안식일을 앞에 둔 금요일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114.3)
 “부자이며”(마 27:57) “존귀한 공회원”인 아리마데 요셉(막 15:43)은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매장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요셉은 1세기의 유대인들의 매장 습관을 좇아 예수님을 세마포로 싸서 자기 자신을 위해 미리 만들어 두었으며 앞서서 아무도 사용한 일이 없었던 바위 속의 한 무덤에 예수님을 매장하였다. 그리고 입구는 큰 돌로 막았다. 이 모든 광경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들이 지켜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틀 후에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하지 못할 염려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무덤에 들어가 조의의 뜻으로 “무덤을 향하여 않았다”(마 27:61). (114.4)
 무덤 문을 인봉했다는 이야기와 파수꾼을 세워 무덤을 지켰다는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었다(마 27:62-66). 이러한 조치는 예비일의 다음 날인 안식일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요청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산헤드린에 모인 대표들은 갑자기 예수께서 죽임을 당한지 3일 후에 다시 살아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상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3일”까지 무덤을 봉쇄하려 했다. 그들은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간 다음에 그가 무덤에서 살아나셨다고 주장하면 안된다”고 걱정했다. 빌라도는 즉각 대답하기를 “파수꾼을 데려가서 힘 닿는대로 단단히 봉쇄하라”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무덤을 인봉하고 파수꾼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취한 모든 예방책들은 오직 주님의 부활의 확실성을 증거하였을 뿐이었다. (115.1)
 “부활과 관련하여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낸” 사건은 마태복음 28장에 기술되어 있다. 이 사건이 때 맞추어 일어난 시점에 대해서는 28:1절에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점에 대한 1절“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미명에” 표현에 대해 성경 학도들이 모두 합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옵세 삽바톤”(opse Sabbaton:“안식일 늦게”, 한글 개역 성경에는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과 그 뒤에 따라 오고 있는 “첫 날이 되려는 미명”이 서로 조화되지 않는 다는 데에 있다. 앞의 “안식일 늦게”는 토요일 밤 일몰의 시각을 뜻할 것이고 뒤의 “첫날이 되려는 미명”은 일요일 아침의 해 돋는 시각을 뜻할 것이다. (115.2)
 “옵세 데 삽바톤”(opse de Sabbaton)은 영어 개역 성경(Revised Version)과 미국 표준 번역 성경(American Standard Version), 새로운 미국 표준 성경(New American Standard Bible)등에서: “안식일의 늦은 지금”(now late on 나ie Sabbath day)으로 번역하고 있다. 라틴어 불가타(Vulgata)역 성경은 베스페레 아우템 삽바티(Vespere autem sabbati) 즉 “그러나 안식일 저녁에”로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간의 첫날이 시작되려는 토요일 저녁에”라는 뜻으로 “주간의 첫째 날이 되려는 미명”을 해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에피포스케인(Epiphos-kein), 즉 “날이 새다”라는 동사는 누가복음 23:54에서처럼 “거의 되었다(점점 분명해지다)”를 뜻해야 한다. (115.3)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두 가지의 중요한 반대가 있다. 첫째는 “옵세 데 사바톤”“안식일 늦게”로 번역하면 마태복음과 다른 복음서의 설명들이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복음서들은 여자들이 일요일 아침 일찍이 무덤에 갔다고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반대는 마태복음 28장의 이야기의 전체 진행이 거기에 기록된 사건이 저녁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낮에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인들은 천사가 그들에게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빈 무덤을 급히 떠났었다(28:5-8).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로마 군대의 일부 파수병들이 시내로 들어와서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이 부활한 깜짝 놀랄 소식을 보고했다. 대제사장들은 시급히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였으며 산헤드린은 병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밤에 파수병사들이 졸고 있는 동안에 제자들이 몰래 들어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말을 하게 하였다. 이야기의 흐름을 미루어 볼 때 이런 일들은 낮에 일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115.4)
 그렇다면 마태복음 28:1절에 있는 두 개의 시간적인 묘사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옵세(opse)는 일차적으로 문제의 기간의 늦은 또는 끝을 뜻하는 시간 부사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4:35에서는 “그 날 늦게”, 즉 저녁을 의미한다. 그러나 “옵세”“후에”(after)를 뜻하는 변칙 전치사(improper preposition)로도 사용 될 수가 있다. 따라서 영어 성경 개역 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이나 최근에 나온 대부분의 영어 번역 성경들이 “돕세 삽바톤”“안식일 후에”로 번역했다. 이처럼 문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안식일 늦게”로도 또는 “안식일 후에”로도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들과의 비교와 해당 성경절의 문맥과 “주간의 첫째 날의 미명”이라는 구절이 두번째의 번역 쪽으로 기울게 하고 있다. 즉 “안식일 후인 첫째날의 미명에”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116.1)
 두 사람의 마리아들이 아침 일찍이 무덤을 보러 왔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은 사랑의 최종적인 표시로서 예수의 몸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하여 왔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그들이 무덤을 보러 온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시대의 유대인들은 세상을 떠난 가족을 위하여 두 차례의 애곡 기간을 지켰다. 하나는 가족이 죽은 시각으로부터 그를 매장하기까지의 애곡기간이며 다른 하나는 그를 매장한 다음의 애곡 기간이다. 그러면 마태복음의 이야기는 이 두번째의 애곡을 위해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간 이야기인가? 가능한 주장이다. 어찌했든 간에, 위경인「베드로의 복음」에는 “우리가 비록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날에 애곡하고 울 수가 없었을 지라도 이제 그의 무덤에서라도 애곡하자”라고 기록되어있다(베드로의 복음. 12:52). (1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