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3. 왕국의 원칙들 I (4:17-5:48)
 이와 같이 그 왕국은 초림 때에 출범은 했지만, 재림 때까지는 그것의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 왕이 통치하거나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곳이면 어디나 그곳이 왕국이다. 그 결과로, 온 세상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현시대의 끝을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 왕은 인간의 마음 속을 다스릴 수 있다. (90.2)
 이 시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서 예수의 주 되심(lordship)을 받아들일 때 그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태의 그 다음 몇 구절은 예수의 새 왕국의 첫 시민이 된 사람들 중 몇 사람을 묘사한다. 첫째, 마태는 제일 먼저 제자가 된 사람들 중의 네 사람의 부르심에 관하여 말한다(4:18-22). 그러고 나서 그는 그 왕국의 초기 일반 시민들 중의 몇 사람을 얻으신 것에 대하여 계속 말한다(23-25절). (90.3)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그리고 요한의 부르심에 대한 신비스러운 설명은 그 제자들의 부르심과 관련된 온전한 설명이 아니라 본보기식 설명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 본문은 또한 예수와의 사전 접촉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두 번 말함으로써 긍정적인 측면들이 강조되고 있다. 그 본문에서 부각되는 것은 두 가지 사항이다. 첫째로, 두 쌍의 형제들이 “즉시” 그들의 이전 생활 방식에서 돌아섰다. 그들은 예수의 부르심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전 직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좇았다”(20, 22절). 둘째로, 그들은 고기를 낚는 어부들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었다(19절). (91.1)
 이 최초기의 부르심들은 그리스도인 제자도(弟子道)의 급진적인 성격을 예시해 준다. 신약은 그리스도인의 길을 옛 방식들의 점진적인 성장이나 계속으로가 아니라 옛 생활의 가치와 목표들과의 단절로 묘사한다. 다른 계제(階梯)에서 예수께서는 그것을 새로 남(요 3:3, 5, new birth)이라고 부르신 반면에, 바울은 그리스도인 삶(왕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옛 방식에 대한 죽음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기술했다(롬 6:1-11). 첫 제자들은 요한과 예수의 핵심 기별(3:2; 4:17)에서 명백히 드러난바 옛 방식들로부터 돌아선 것에 대한 한 좋은 실례이다. (91.2)
 첫 제자들의 부름과 함께 교회의 기초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 외에도 우리는 그 교회의 선교적 성격에 대한 첫 암시를 얻게 된다. 결국 그 첫 구성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들이 되어야 했다. (91.3)
 마태는 제자들의 부름으로부터 백성들 가운데서 거두신 예수의 초기의 성공으로 신속하게 이동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왕의 삼중 방법론-가르침(teaching), 전파(preaching, 설교), 그리고 치료(healing)-을 제시한다(4:23).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 기술(記述)은 마태의 이해에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는 9:35에서 그것을 되풀이한다. 균형이 잘 잡힌 왕국 봉사는 이 세 가지 모두로 이루어진다. (91.4)
 전파(preaching, 설교)라는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는 헬라의 도성에서 일하던 전령(herald, 통보자)의 업무를 기술하는 단어이다. 그것은 당국자가 발하는 선언으로서 사람들이 유의해야 할 중대한 선언을 가리킨다. 예수의 선포는 “천국 복음”(4:23)으로 기술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천국이 도래했음을 통보하고 있었다. (92.1)
 가르침(teaching)은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회당에서 행해졌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의 전파(설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설교가 제기한 질문들을 해결해 준다. 산상설교는 예수의 가르침의 한 본보기이다. (92.2)
 치료(healing)는 예수께서 전파하고 가르칠 길을 닦아주었다. 이와 같이 4:24, 25에서 백성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그의 동정과 치유를 받는 대상이 된다. 그는 무리들의 병을 고친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를 좇고, 기꺼이 그의 말씀을 듣는다. 은혜는 예수의 명령보다 먼저 이르러오고, 치료는 산상설교보다 먼저 온다. (92.3)
 마태복음 5:1은 그의 불쌍히 여김에 마음이 이끌려 온 “허다한 무리”(4:25)가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산”에 모였다고 말한다.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산과 구약의 시내산 사이의 평행점을 보아 왔다. 예를 들어, W. D. 데이비스(W. D. Davies)와 D. C. 앨리슨(D. C. Allison)은 마태복음 1-5장이 출애굽기의 표상학(表象學) 위에 세워져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 복음은 모세의 출생과 유년 시절을 상기시키는 사건들로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이 물들을 통과하는 것과 평행을 이루는 예수의 침례가 있다. 그 다음에는 신명기에 자세히 설명된 광야의 시험들을 예수께서 재경험하는 시험이 뒤따른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모세처럼 계시의 산 위에 앉아 있는 4:23-5:2이 있다. 다시 말해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모든 주요 사건은 명백히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들에서 그 짝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마태복음의 사건 순서들-예수의 유년 시절, 시험, 계시의 산-은 오경에 기록된 사건들의 연대기적 순서-모세의 유년 시절, 출애굽, 광야로 들어감, 시내산-와 나란히 나타난다. 이와 같이 표상학은 광범위하며, 일관성 있게 숙고된 형태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산상에서 설교를 하기 위해 산에 오르실 때, 그는 모세적 메시야(mosaic Messiah)로서 말씀하시고, 메시야적 토라(messianic Torah)를 전달하시고 계셨다(Davies and Allison, 1:427, 강조 첨가). (92.4)
 심혈을 기울여 구성한 책에 나타난 이와 같은 평행적 표상학을 마태의 유대인 독자들은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 산에서 구약의 원칙들을 제시하셨다면, 그처럼 그분은 마태복음 5:1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산 위에서 예수를 통하여 신약 왕국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계신 것이다. (93.1)
 예수께서는 자신의 왕국의 원칙들을 일곱 부분으로 제시하신다. 그 첫째 부분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다룬다. (93.2)
 그리스도인의 성품
 마태복음 5:3-12의 팔복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이상적인 특성들을 기술한다. 어떤 것은 한 사람에게, 그리고 다른 것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들과는 달리, 이 모든 여덟 가지 특성들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특색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온유하든지 아니면 마음이 순결한 사람이 아니라, 온유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순결한 사람이다. 그것은 다른 여섯 가지 특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여덟 가지 특성들은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도덕적 특색이 되어야 한다. 이 특성들은 그의 왕국의 원칙들이요, 그 시민들의 필수적인 특성들이다. (93.3)
 물론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백성들에게 상이나 축복을 안겨다 주는 원칙들은 일반 세상에서 상을 받는 그런 것들과는 같지 않다. 예를 들어, 현세의 질서의 지혜대로라면 공격적인 사람(온유한 사람이 아니라)이 대부분의 세상을 소유한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왕국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가 아니라 거만한 자와 오만한 자에게 속한다. 다른 복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요점은 하나님의 왕국의 원칙들은 이 세상의 왕국들의 원칙과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쌍의 원칙들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의 핵심에 놓여 있다. (93.4)
 더욱이, 이 여덟 가지 특성들은 성경이 육에 속한 사람으로 일컫고 있는 사람들의 특성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들은 하나님의 변화시키며 능력을 주는 은혜의 열매이다. 그것들은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한 세상의 이상(理想)과 정반대되는 사람의 이상을 대표한다. 그것들은 그 왕국을 위해 그들의 옛적 방식들에 대해 회개한 사람들의 열매를 대표한다(3:2; 4:17). 그것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3:8)의 일부이다. 또한 그것들은 그들의 옛적 방식들을 포기하고 “그를 좇은”(4:22, 25) 사람들의 이상을 대표한다. (94.1)
 예수의 팔복(10-12절은 이중이로 표현된 하나의 축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은 각각 마카리오스(makarios)라는 헬라어 단어로 시작한다. 그 단어는 “복받은”(“blessed,” 「새국제역」, 「제임스왕역」, 「개정표준역」, 기타)과 “행복한”(“happy,” 「필립스역」, 「리빙 바이블」, 기타) 등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 5:3-12에서 마카리오스“행복한”(“happy”)으로 번역하는 것은 예수의 의도를 잘못 읽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께서는 주관적인 상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런 사람들에 관하여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현재의 상태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느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다. (94.2)
 각 축복의 후반부는 여덟 가지 복들을 기술한다. 그리스도인의 여덟 가지 특성들이 각 신자들에 대한 이상을 대표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여덟 가지 복 모두는 각 신자들에게 속한다. 그 왕국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 축복들은 부분적으로는 현재의 경험이요, 부분적으로는 미래의 경험이다. 현재의 맛보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왕국의 절정으로 그것의 충만함에 도달할 것이다. 이와 같이, 애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약간의 위로를 얻는 한편, 그때에는 충만히 위로를 받을 것이다. 등등. (94.3)
 팔복에 대한 가장 간단한 구분은 그것을 율법의 두 돌비와 같은 방식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첫 네 복은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반면에, 두 번째 네 복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들은 각 특성이 다음 특성으로 연결되도록 점층적인 순서로 배열되었음을 또한 주목해야 한다. (95.1)
 그리스도인 특성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분류의 바로 시작 부분에 심령의 가난이 있다(3절). 구약에서 가난은 하나님께 대한 겸비한 의존과 동일시된 영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부자들과 자만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힘을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던 데 반하여,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구원과, 환난의 때의 도움을 위하여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를 구하러 오셨다(사 57:15; 참고 41:17, 18; 시 34:6). 예수께서 천국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러 보내심을 받으신 것도 바로 이런 “가난한” 자들에게였다(사 61:1, 2; 눅 4:18; 마 11:5). (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