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3. 왕국의 원칙들 I (4:17-5:48)
 그리스도는 팔복에서 그리스도인 품성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는 이제 마태복음 5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품성으로 다시 돌아가시지만, 이번에는 구약과 유대인의 율법의 배경 내에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다루신다. (104.2)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분명하게 알기를 원하고 계시는 한 가지는 구약(그 당시의 유일한 성경)과 그의 관계이다. 가능한 가장 명백한 말씀으로 그는 그의 청중들에게 자신은 유대인의 성경(율법과 선지자들)과 조화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그것들 중 어떤 부분도 변경하거나 폐지하러 오시지 않고 그것들을 온전케 하려 오셨다(17, 18절). (104.3)
 온전케 하다(fulfill)라는 단어는 적어도 세 가지 방법으로 이해되어 왔다.

 (1) 예수께서는 자신 자신의 순종하는 생애를 통해서 구약의 요구들을 성취하셨거나 순종하셨다.

 (2) 그는 자신의 가르침들을 통해 성경의 충만한 의미를 밝히셨다.

 (3) 그는 구약의 예언적 요소들을 성취하셨다. 이런 요소들이 예언과 희생 봉사 두 가지 모두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다. (104.4)
 어떤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이 세 가지 방식 모두로 구약을 완전케 하셨지만, 17절18절에서 그의 가르침에 대한 직접적 문맥을 이루고 있는 것은 두 번째 것이다. 21-48절에서 예수께서는 구약에 제시된 몇몇 개념들의 충만한 의미를 밝혀내신다. (104.5)
 17절18절이 율법과 예수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데 반하여, 19절20절은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문제를 다룬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신실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쳐야 할 것에 대해서 확고하시다. (104.6)
 그런 후에, 그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가장 놀라운 진술의 하나를 하시게 된다. 즉 그들이 그 왕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그리스도인의 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그 율법의 교사들”)의 의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진술들을 절대적으로 경악스럽게 만드는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명상하고 그 요구에 부응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일평생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헌신한 종교인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책에서 613개의 계명(긍정적인 것 248개, 부정적인 것 365개)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것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엄청난 구전(口傳)들(혹은 구두 율법)을 만들어 내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안식일만 해도 1,521개의 규칙들을 계발해 내었다! 그들의 구전은 생활의 모든 측면들을 망라했다. 바리새인식 생활을 살려면 열성을 다해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05.1)
 예수의 말씀을 들은 청중들 중에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로울 수 있을까?’하고 생각한 사람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동일한 주제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고 불안을 가져다주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20절에서 그 사상들을 가르치셨을 리 없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즉 이 구절은 교회에 대해 어떤 새로운 율법주의를 부과하기를 갈망한 어떤 바리새적 그리스도인들이 후기에 덧붙인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105.2)
 20절이 담고 있는 의미로부터 피해 가는 더 흔한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된 의는 참으로 그들 자신의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의라고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해석은 믿음을 통한 값없는 은혜의 복음을 보존하려는 시도로서는 칭찬 받을 만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마태복음 5장의 전체적인 의미를 고찰할 때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20절“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명백히 진술한다. 그리고 21-48절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뛰어날 수 있고 뛰어날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105.3)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마태의 제시와 그 복음에 대한 바울의 제시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야고보처럼 마태는 주로 유대인들에게 쓰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율법과 행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강조한다. 이것은 마태(혹은 야고보)가 바울과는 구원받는 다른 방식을 믿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태가 예수의 가르침을 제시하면서 구원의 진리에 접근하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음과 같이 기록한 F. D. 브루너(F. D. Bruner)는 정로를 이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만일 우리가 마태에게 대하여 조금 더 인내하고, 그를 너무 빨리 바울 속에 침례 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복음을 가르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바로 지금 마태복음의 예수께서는 진정한 개인적 의를 우리에게 촉구하고 계신다.” 사실상, 브루너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더 큰 의에 대한 첫째 복음서의 강조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기도로 내몰 것이다(Bruner, 1:172). (106.1)
 21-48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안 되는 몇 가지 방법들을 예시하신다. 그의 초점은 더 많은 숫자의 명령들이나 금제(禁制) 조항들에 있지 않고 질의 문제에 있다. (106.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순종을 더 달성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 율법의 요구들을 가지고 장난을 했다. 존 스토트가 지적하듯이, 그들은 계명들을 제한했고, 율법의 허용들을 더 늘렸다(Stott, Christian Counter-Culture, 79, 80). 예컨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명백히 살인과 간음의 성경적 금지 조항들을 행위에만 제한시켰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확장(혹은 온전케)하셔서 성난 생각, 모욕하는 말들 그리고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들도 포함시키셨다(21-30절). (106.3)
 율법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그들에게 편리하게끔 제한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또한 그 허용 범위를 넓혔다. 그처럼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혼 허용 범위를 성경적 사유인 “수치되는 어떤 일”(신 24:1) 너머까지 확장하여 남자가 그의 아내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거의 어떤 불쾌한 일도 포함시키려고 애썼다. 예수께서는 이혼 사유는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고 논하심으로써 이런 의미 확장들에 대해 반대하셨다(31, 32절). (106.4)
 본질적으로, 예수께서는 계명들의 요구들을 제한시키고 그들의 허용을 확장하려는 유대인의 경향을 되돌리고 계셨다. 율법은 예수의 해석 하에서 유대인들이 그것을 하찮게 만들어 버렸을 때보다 지키기가 훨씬 더 어렵게, 무한히 더 어렵게 되었다. 그들은 율법의 자구(字句)들의 어떤 측면들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였다. 예수께서는 그것은 정신으로도 지켜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107.1)
 21-48절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깊이를 여섯 가지 예증들을 들어 우리에게 설명해 주신다. 저 바로 그 깊이는 마음의 의(heart righteousness), 그 정신으로 지켜지지 않을 때에 용서하시는 은혜의 필요와, 그 율법이 일상 생활에서 참으로 실천되지 않는다면, 능력을 주시는 은혜가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리켜 준다. 이 마음의 의는 메시야 시대에 관하여 예언된 바로 그 의이다. 예레미야는 “내가 나의 법을 그들 속에 두고 그 마음에 기록하”리라(렘 31:33)고 기록하였고, 에스겔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겔 36:26, 27)라고 기록하였다. (107.2)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한 외적인 순응이 충분한 의가 될 것이라고 가르친 반면에, 예수께서는 더 깊고 더 충만한 의를 요구하신다. 그는 율법의 자구뿐 아니라 그 정신도 지키는 의, 바리새인의 그것보다 더 깊고 더 위대한 의를 설파하신다. 율법에 대한 이 영적인 준수는 능력을 주시는 영으로 위로부터 난 바 되었기에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5:16, 45, 48; 6:9; 요 3:3, 5)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결국, 간음의 행위 그 자체는 피하고 얼마간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자신의 원수를 내내 사랑하려면 변화시키는 은혜의 행위가 필요하다(43-48절). (107.3)
 그처럼 예수께서는 그의 청중들에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것을 초월하는 의의 핵심에 놓여 있는 율법의 정신을 예시하는 여섯 가지 예들을 제공하신다(20절). 그 과정에서 그는 어떤 율법 교사들도 감히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자신을 권위자로 제시하신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18절). 그리고 “···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27, 28절). 이것이 예수의 접근 방식이었다. 진실로 그는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7:29). 자신이 드신 여섯 가지 실례들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구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시지 않고 구약 율법들 주위에 무성하게 자라나 버린 인간의 전통에 이의를 제기하고 계셨다는 것을 지나는 김에 언급하는 바이다. 그는 구약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그 의미를 채우기(온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17절). (107.4)
 21-48절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48절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성경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큰 의를 가지라고 촉구하고 있는 20절과 연관되어 있다. 이 두 성경절은 율법의 깊이에 관한 예수의 여섯 가지 예들을 일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들은 저 예증들 전후(前後)에서 하나님의 이상을 제시한다. (108.1)
 그와 같이,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저 율법주의적 자구에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과 동일시된다. 데이비스와 앨리슨이 지적하듯이, “그 부분[21-48절]의 여섯 단락들은 각기 ‘완전’을 요구하고 있다. 즉 각기 결코 그 보다 더 큰 요구가 없는 그런 절대적인 요구를 한다. 예를 들어, 음욕을 마음에서 몰아내는 것보다 우리가 그것에 관해서 할 그 이상의 일이 있을 수 있을까(5:27-30)? 그리고 사람이 원수를 사랑한 이후에 그밖에 사랑할 만한 사람이 더 있을까?(5:43-48)”(Davies and Allison, 1:560). (108.2)
 그러나 더욱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48절43절에서 시작되는 단락에 속한다. 이 사실은 45절48절을 비교함으로써 입증된다. 둘 모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처럼 되라고 촉구한다. 43-47절은 그렇게 되는 것이 무엇과 같은지 명확하게 말해준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추상적인 것들을 다루고 계시지 않다. 아버지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원수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결국, 그는 선인(善人)에 대해서 하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악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햇빛과 비를 마련해 주시지 않는가? 어떤 사람도, 심지어 세리도 자신의 친구들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초자연적 사랑을 요구하신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경건치 않았던 자들과 그의 원수들을 위하여 죽도록 그의 아들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요 3:16; 롬 5:6-10),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악의적으로 이용해 먹는 자들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닮음에 있어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이다. (108.3)
 48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개념은 누가복음 6장에 있는 평행 구절에 의해 더욱 공고해진다. 32-35절에서 예수께서는 누가판(版) 산상설교에서 원수 사랑을 논하신다. 그런 다음 그는 36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처럼 누가와 마태는 완전한 사랑을 ‘자비를 보이는 것’과 같게 본다. 자신의 원수에게까지 자비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품성의 정수(精髓)를 모방하는 것이다. (1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