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말하면서 겸비함 가운데서 부르짖는, 예수의 비유 속의 세리와 함께 서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헬라어 본문은 실제적으로 “어떤 죄인”(“a sinner”)이 아니라 “그 죄인”(“the sinner”)이라고 말한다. 그 세리는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다는 것을 느꼈다. 의미 심장하게도 예수께서는 왕국에 들어간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대단히 뽐내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심령이 겸손한 세리였다고 말씀하신다(눅 18:9-14). 존 R. W. 스토트(John R. W. Stott)가 표현하듯이, 그 복음 이야기에서 왕국을 받은 사람들은, “저들이 너무도 가난해서 그들이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고 성취할 것도 전혀 없다는 것을 안 사람, 즉 인간 사회에서 배척을 받은 사람들인 세리들과 창기들”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께 자비를 탄원하는 일이었고, 그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Stott, Christian Counter-Culture, 40).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5:3). (95.3)
자신의 속절없음과 영적인 빈곤을 깨달은 후에, 그 다음 단계는 회개의 슬픔이다(4절). 우리의 영적인 빈곤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인하여 애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엘렌 화잇은 “여기에 보여진 애통은 죄에 대한 참된 마음의 슬픔이다”(화잇, 산상보훈, 9)라고 하였다. (96.1)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 생활은, 어떤 사람이 우리로 그렇게 믿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듯이, 근심 걱정이 없는 계속적인 기쁨과 웃음의 생활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결점들, 곧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결점들을 인하여 운다. (96.2)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애통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들의 비탄을 경감시킬 수 있는 유일한 위로—하나님의 용서—로 위로를 받을 것이다. (96.3)
그리스도의 점층적인 목록의 세 번째 특질은 온유함이다(5절). ‘온유한’(meek)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유순한”, “겸손한”, “사려 깊은”, 그리고 “젠체하지 않는”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 그리고 자신의 가난에 대하여 애통하는 자들은 또한 온유하거나 겸비할 것이다. (96.4)
온유함은 나약함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온유한 자들은 큰 권위와 세력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온유한 자들의 세력에는 겸비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의존이 수반된다. 리언 모리스(Leon Morris)는 “이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강자들은 지배하기를 사양하는 강자들이다”(Morris, Matthew, 98)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1:29에서 자신을 겸손한 자라고 기술하신다. 그는 그 덕성을 완전하게 예시하신 분이다. 그는 전능한 능력을 가졌지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고, 평화스럽게 십자가로 나아가셨다. 그것은 메시야가 무력으로 로마를 전복하기를 기대했던 열심당(Zealot party)의 강령과 정반대였다. (96.5)
강하든 약하든 간에 온유한 자들은 겸비와 유순함의 덕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죄된 인간들에게 있어서 온유함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려고 노력할 때 겪는 속절없음과 죄에 대한 그들의 감각에서 흘러나온다. 자기 주장을 앞세우는 권력자들이 아닌 이런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땅을 상속할 것이다. 물론, 세 번째 복에서의 축복은 대단히 종말론적(마지막 때)인 초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성취는 다른 복들과 관계되어 있는 축복들 이상으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96.6)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은 예수께서 부각시킨 그리스도인 성품의 네 번째 특성이다. 우리는 이제 팔복에서 하나의 주요 전환점에 이르렀다. 처음 두 복은 우리의 인간적 연약성과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예증한 반면에, 세 번째 복은 그 연약성에 비추어 본 그리스도인의 겸비를 표현했다. 네 번째 복은, 대조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의 적극적인 측면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주림과 목마름이다. (97.1)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 생활은 과거의 죄에 대하여 애통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또한 미래의 의에 대하여 배고파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고 예수같이 되고 싶어하는 갈망이다. D. 마틴 로이드—존스(D. Martyn Lloyd—Jones)가 표현하듯이, 의에 대하여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것은 “생애에서 우리의 최고의 갈망이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는 것, 그리고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과 동행하는 것임을 의미한다”(Lloyd—Jones, 1:79). 이런 사람들은 실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채움을 받을 것이다. (97.2)
네 번째 복은 처음 네 복과 두 번째 네 복을 연결시키는 자연적인 다리 역할을 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배고파하는 성품의 의는 하나님뿐 아니라 그들의 동료 인간들과 결부되어 있다. 이리하여 다섯 번째 복이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7절). (97.3)
자비는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신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미 보여주신 그 자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태가 쓴 복음서의 위대한 교훈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이미 베푸신 그 자비를 그들이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줄 필요성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이 원칙에 대한 예수의 가장 큰 예증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일 것이다(18:21-35; 참고 6:12, 14). (97.4)
여섯 번째 복은 심령의 순결이다(8절). 헬라어 원어로, “청결한”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지한 마음, 거짓과 간계가 없는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98.1)
성경에서 마음은 사람의 내적 상태 전체를 대표한다. 육적인 마음은 자아중심적이고 부정하지만, 예수께서는 변화된 마음을 요구하신다. 그런 변화는 그리스도인 삶에 대단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가 나중에 말씀하실 것이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15:19)이기 때문이다. 심령의 순결은 대단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마음이 생명의 샘이기 때문이다. 순결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더 온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내세에서 그를 대면하여 만나게 될 것이다. (98.2)
일곱 번째 복은 화평케 하는 것이다(9절). 화평케 하는 것은 청결한 마음의 자연적인 결과인데, 이는 싸움의 가장 흔한 원인은 음모와 이기심이기 때문이다. 화평케 하는 것은 신성한 행위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화해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평케 하는 분이다. 그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골 1:20; 참고 사 9:6) 하려고 “그를 통하여” 역사하셨다. (98.3)
하나님은 위대한 화평케 하는 분(Peacemaker)인 반면에, 마귀는 지독한 분쟁 야기자(troublemaker)이다. 불행하게도, 화평케 하는 그리스도인은 때때로 대결을 통하여 평화를 얻고자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예수의 생애에서 그러하였고, 우리의 생애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얻는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원칙에 기초한 평화이다. 이러한 평화는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동기를 유발시키는 힘이 된다. (98.4)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을 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결국, 그들은 그저 그들의 아버지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99.1)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복은 일곱 번째 복과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역설적이다. 화평케 하는 자들이 핍박으로 상을 받는다(10-12절). 그런 사태는 어떤 사람들이 평화를 거부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육적인 마음은 하나님의 이상을 대적하고 그것들에 반기를 든다. 이와 같이 5:10-12의 핍박은 추상적인 면에서의 핍박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를 인하여”(10절) 그리고 “나[예수]를 인하여”(11절) 핍박을 받는다. (99.2)
현실주의적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의 원칙들과 하늘 왕국의 원칙들 사이의 투쟁을 고려에 넣는다. 이 두 쌍의 원칙들은 완전히 반대된다. 한 쪽의 토대는 교만과 이기심이다. 다른 쪽의 기초는 겸비와 다른 이들에 대한 봉사이다. 이 두 쌍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놓고 벌어지는,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는 성경과 일상 생활 모두에서 경험되는 궁극적인 실재(實在)들 중의 하나이다. (99.3)
그로 인한 최후의 결과는, 겸비하고 화평케 하는 자들은 그들의 원칙들과 충성 때문에 핍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이런 모든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12절)고 말씀한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환난에 당면해도 “기뻐 뛸” 수 있게 만드는 이유이다(눅 6:23). 그들이 이생에서의 총체적인 복락을 약속받지 못했지만, 그들은 최후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받아 왔다. (99.4)
이 열 개의 간결한 구절들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성품의 측면을 제시하신다. 다음으로 그는 그리스도인의 감화력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