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성만찬
 교회 생활을 위해 제정된 또 하나의 성경적인 의식은 성만찬이다. 그리스도께서 배반을 당하셨던 밤에 그분이 친히 제정하신(마 26:20-30; 막 14:17-25; 눅 22:14-23) 그 예식은 성경에서 “주의 만찬”(고전 11:20),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고전 10:16) 그리고 “주의 식탁”(2절_으로 일컬어진다. 어떤 이들은 “떡을 뗌”(행 2:42; 참조 46절)에 대해 말하며, 어떤 이들은 순서에 참여하기 전에 감사를 드리기 위해 사용된 그리스어 유카리스테오에서 유래한 유카리스트(eucharist)라는 명칭을 선호한다(마 26:27; 고전 11:24). 그것은 공동식사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고린도에서는 공관복음에서 묘사되었던 대로 최후의 만찬 형식을 따라 떡과 잔을 나눴던 것으로 보인다. (644.5)
 공관복음의 종합적인 증언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예식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비록 최후의 만찬의 본질과 유대교 유월절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난제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공관복음이나 바울의 서신에서 그것은 유월절 식사의 모든 특징을 있다(고전 10:14-22; 11:23-34). 특히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고 말했다. 출애굽과 시내 언약 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한 유월절 의식이(출 24장) 이제는 죄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출애굽과 예수님의 피로 승인된 새로운 언약 수립의 기념이 되었다. (645.1)
 1. 성만찬의 의미
 a. 뒤를 돌아봄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성만찬의 기본적인 의미를 요약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업적뿐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그분의 구속적인 죽음에 관한 기념 의식이다. 유대교의 유월절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권능을 돌아보고 상기하는 것이듯이(출 12:14; 13:3, 8, 9; 신 16:3), 그리스도인들이 떡과 잔으로 참여하는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이루신 새로운 출애굽(참조 눅 9:31), 즉 죄와 죽음을 이기신 결정적인 사건을 기념한다. 떡과 잔은 교회의 기원이자(행 20:28),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기초인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그 의미를 교회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상기하게 한다. (645.2)
 b. 임재하는 상기자
 성만찬은 또한 이미 있는 진리를 제시한다. “주의 식탁”(고전 10:21)에 모인 자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하여 서로의 현재적인 연합을 가시적으로 표현한다(고전 10:16). 왜냐하면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17절)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보기에 성만찬은 연합의 기초를 제공한다.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지속되는 관계의 토대에는 각 예식마다 강조되는 새 언약이 자리하고 있다(마 26:28; 막 14:24; 고전 11:25). (645.3)
 c. 앞으로를 바라봄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대한 기념이자 현재적인 의미로서 제정하신 성만찬은 또한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미래적인 관점이다. 바울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고 했다. 예수님이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 참조 막 14:25; 눅 22:16, 18)고 하셨을 때에도 동일한 종말론적인 주제가 표현되었다. 유월절을 기념하는 동안 유대인들이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되돌아보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에 의한 새로운 구원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주의 식탁에 참여하여 교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이 전에 오셨고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며 다시 오시리라고 약속하셨음을 선포한다. (645.4)
 d. 상징적인 요소들
 성만찬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떡과 잔에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와의 실질적인 교재가 이뤄진다. 주께서 친히 이 예식을 제정하시고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하시며 제자들에게 떡을 나눠주실 때에도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의 떡과 잔에도 그것이 실제로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지시는분명하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25). 신자들은 그분을 기념하기 위해서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위격을 상징하기에 적합한 누룩이 없는 떡과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을 나눠 먹음으로써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과 구원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한다. (645.5)
 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0, 11장을 제외하면 성만찬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설명하는 곳은 거의 없다. 그러나 만약 그 예식이 본질적으로 신자 개인과 주님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상징한다면, 주의 식탁은 그분 안에서 구원에 참여하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 된다. 전제조건은 교회가 그 안에서 공개적인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자들을 질책하라는 바울의 긴급한 요구에서 유추해 볼수 있다(고전 5:1-5). 그러나 자신을 배반했던 제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는 과도한 배타주의를 조심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고한다(참조 예식들 III). (646.1)
 2. 세족예식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성만찬 예식은 세족예식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유대교의 유월절 예배에 더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셨던 것처럼 그분은 구약의 친절 의식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셔서 세족 의식이 성만찬 예식의 중요한 부분이 되게 하셨다(요 13:1-5). 그분의 모본은 그분과 더불어 겸손과 봉사의 삶을 함께했던 자들의 생각에 감명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순서를 통해서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제자들(참조 눅 22:24)을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셨다. (646.2)
 세족예식은 흙과 먼지로 더러워진 발을 씻기 위한 목적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발을 씻긴 다음에 예수님이 유다를 가리키며 그들이 깨끗하지만 다는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13:10, 1). 그리스도께서 이 예식을 제정하셨을 때 그 의도의 일부는 더 차원 높은 정결, 즉 마음의 정결이었다. 그것의 제도적인 또는 항구적인 특성은 그리스도의 지침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5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7절). (646.3)
 그렇다면 이 예식은 그리스도교의 위대함의 표지가 섬김이라는 명확한 교훈 외에 현 시대와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10절)고 하시며 베드로에게 주셨던 그리스도의 설명은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처럼 보인다. 신을 신은 제자들의 발이 더러워져 다시 씻을 필요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고 그분의 보혈로 정결하게 된 신자들도 신앙 여정 중에서 실수할 때 정결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더러움을 씻어낼 필요가 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재침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 세족예식은 침례 서약의 갱신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과 그에 따른 은혜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우리의 고백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5절; 참조 17절)고 하시며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하신 주의 명령은 성만찬에 대하여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고 하셨던 명령만큼 분명하다. 동사 포이에오(행하다)가 두 경우에 모두 사용되었다. 그 명령을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할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 예수님은 두 예식, 즉 세족예식을 포함한 성만찬과 침례식만 교회에 주셨다. 두 예식 모두 교회를 세우고 봉사를 위해 성도를 구비시킬 목적으로 제정되었다(참조 예식들 II). (6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