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둘 사이의 차이점을 보면서 이스라엘과 교회는 완전히 분리된 백성이므로 섞이거나 혼동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두 가지 다른 계획을 가지고 하나는 이스라엘과 함께, 다른 하나는 교회를 통해서 실행하신다 그들은 종말까지 열방 중에 한 민족으로 부름으로 받은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그러한 구분을 주장한다(참조 민 23:9; 신7:6-8), 이러한 해석은 장래에 있을 이스라엘 민족의 번영을 묘사하는 구약 예언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630.6)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또 다른 입장은 그 둘을 연속성을 가진, 본질적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라본다. 예를 들어 신약 시대에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더 이상 민족적인 실체가 아닌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메시아를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마 21:43)에게 그 나라를 주심으로써 당신의 구원 사역을 지속시키신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呈 다름 아닌 교회이다(벧전 2:9). (631.1)
 2. 언약 관계
 성경에 따르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취급하시는 모든 방법은 근본적으로 야훼와 아브라함 사이에 체결된 언약에 기초해 있다(창 15:18; 17:2-7).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하나의 선명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그를 택하셨다(창 12:3).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상기하시며(출 2:24), 당신의 세계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시내산에서 그것을 갱신하셨다.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중” 그분의 ‘소유’“제사장 나라”(출 19:5, 6)가 되어야 했고,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께는 세상의 필요를 대변하기 위해 구별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택하심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택하심이 다른 민족의 배제를 내포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선택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5절)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특혜가 아닌 봉사, 더 나아가 열국을 위한 당신의 목적을 위해 택하셨다. (631.2)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1-8절;출 24:3-8). 그들의 순종의 결과로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한 땅을 그들에게 주시고(신 1:7, 8;참조 창 15:18) 그들에게 특별히 육체적이고, 지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허락하셔서(신 7:12-16; 28:1-6, 10, 13; 30:9, 10), 그들로 하여금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28:1)고 약속하셨다. 이 모든 언약의 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진심을 다해 협력할 때 기대할 수 있었다(신 4:5-8; 7:12-16). 이스라엘의 증언과 살아있는 모본에 감명을 받음으로 열방은 줄지어 참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예배와 섬김에 연합할 것이었다(신 28:1-14; 사 2:1-3; 19:18-22; 56:6, 7; 60:1-16; 슥 8:20-23). 우리는 출애굽기 19장의 서론부에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5절)이라고 설명한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이 조건적인 언약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스엘은 불순종하였으므로 부적격한 대표자가 되고 말았다. 그들의 결함은 바벨론 포로 생활과 가나안 땅의 몰수로 이어졌다. 포로기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충성하면 여전히 언약이 성취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던 당신의 종 선지자들의 약속대로(사 14:1, 2; 27:12, 13; 렘 16:14-16; 29:10-14; 스 34:11-16; 미 2:12, 13)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갱신하시고 그들을 언약의 땅으로 복귀시키셨다. (631.3)
 3. 영적 이스라엘로서의 교회
 하나님은 메시아를 파송하셨지만 그의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거부되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복권(復權)의 보증도 없었고, 대신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민족에 대하여 다음같이 선고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언약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약속과 축복은 영적인 이스라엘이자, 지상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도구인 교회로 옮겨졌다. (631.4)
 민족적인 이스라엘을 위해 주어진 구약 예언의 일부는 앞으로도 성취되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가나안 땅에 자리했던 민족에게 주어졌던 것이고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의 지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의 기자들은 구약에서 문자적인 이스라엘을 향해 주어졌던 그 밖의 약속들을 교회에 “영적으로” 적용했다 예를 들어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거부될 것을 예언한 후에 호세아는 그것이 회복되어서(호 2:18)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영원히 약혼할 것을 내다보았다(19, 23절). 거부당한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었다. 신약은 그 예언을 영적인 이스라엘 곧 교회에 적용한다.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으로 구성된 새로운 백성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기록한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롬 9:25). 사도는 다시 호 1:9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26절). (631.5)
 호세아처럼 요엘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견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야훼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욜 2:27). 이 약속 다음에 모든 육체에 성령이 부어진다는 놀라운 예언이 이어진다(28, 29절). 이것은 분명히 문자적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왜냐하면 그 예언이 이렇게 계속되기 때문이다. “보라 그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때에”(욜 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성령은 교회에 주어졌다.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행 2:16)라고 선언했다. 결론적으로 바울과 베드로는 문자적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영적인 이스라엘 곧 교회에 이르러 성취된다고 이해했다. 단,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유대인들도 개인의 자격으로 여전히 구원을얻을 수있다(롬 9:6; 11:1, 2). (632.1)
 여러 면에서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체했고,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도 모두가 그의 영적인 후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 2:28, 29;참조 4:16; 9:7, 8갈 3:29). 아브라함은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롬 4:11). 아브라함의 영적인 씨 즉 진정한 그의 영적인 자녀들은 민족적인 배경과 상관없이 믿음을 가진 남녀들이라는 사실을 필설로 더 이상 분명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되었다(갈 6:16;참조 세 천사의 기별 I, II). (632.2)
 E. 교회는 가시적인가, 비가시적인가?
 교회에 대한 모든 견해의 중심에는 교회의 가시성 또는 비가시성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모든 이가 가시적인 표지로 식별할 수 있는 가시적인 교회, 가시적인 기관 이외의 다른 교회의 존재를 부정한다. 다른 이들은 교회란 비가시적이며 성령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아신 바 된 모든 사람을 진정한 그분의 자녀로 포괄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는 차이는 지역교회와 세계교회의 차이와 같지 않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다루려는 사안은 교회가 어디까지 현재 기관의 범위를 인정해야 하느냐는 문제이다. (632.3)
 1. 두 극단
 첫째 그룹의 옹호자들은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구조가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면 그것을 진정한 교회의 일부로 간주한다.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서 스스로 조직을 갖추고 성경을 연구하며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스스 루를 교회로 부른다 할지라도, 만약 그들의 기원이 역사적으로 사도들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다면, 즉 사도들로부터 단절 없이 이어져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교회가 아니다. (632.4)
 그들의 확신 못지않게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자들도 있다. 그것이야말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그와 같이 거듭난 신자들의 합(合)이다. 그들이 가시적인 그룹 안에서 모이든지 모이지 않든지 그들은 교회를 구성한다 한 곳의 가시적인 교회의 회원이라고 구원이 보증되지 않는다면, 가시적인 조직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어떤 경우에는 형식적인 조직만큼 혐오스러운 것도 없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개별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의 질적인 특성이다. (632.5)
 간혹 그런 경우가 있듯이 어쩌면 이 두 극단 사이에 이 문제의 성경적인 해결점이 있을지 모른다. 성경은 교회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교회의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차원을 모두 언급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632.6)
 2. 믿음과 회개가우선함
 구원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 예수님은 개인의 믿음과 영적인 상태를 우선시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군중들에게도 이렇게 강조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니고데모에게는 이렇게 진술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참조 5절). 회의적인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는 말에 아연실색 했다. 그 같은 문제를 마주했을 때 사도들도 ‘회개’, ‘회심’과 함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장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질문을 받은 베드로와 동료 사도들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대답했다(행 2:37, 38). 행 3:12-264:7-12에서도 베드로의 답변은 같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라고 물었던 빌립보 간수의 질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대답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31절). 이러한 예 가운데 어느 것도 구원이 어떤 가시적인 기관 또는 신자들의 그룹과의 관계에 좌우된다는 암시는 없다. (633.1)
 3. 유형의 가시적인 교회
 믿음과 회개가 우선함을 인정한다고 해서 교회의 가시적인 차원에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성경의증거를 축소시키기는 어렵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설교에 반응하여 “그 말을 받은”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고,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에 연합했다(행 2:14-41). 이후로 더 많은 사람들이 합류했고, 누가가 “온 교회”(행 5:11)라고 부른 무리의 규모는 5, 000명까지 성장했다(행 4:4). 분명하게 이 초기 신자들은 집합적이고 가시적인 공동체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행 2:42)에 전념하면서, 서로 친교를 나눴고(42절), 침례식과 성만찬식을 거행했으며(38, 41, 42절), 기도회로 모였고(42절), 함께 예배를 드렸으며(46절), 궁핍한 자들을 도왔다(44, 45절). 다소 막연해 보이지만 이런 것들이야말로 가시적이고 조직된 지역 교회의 특징이다. (6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