솨바투(shabbatu)라는 용어는 히브리어의 솨바트(shabbat)라는 단어와 놀랍게 유사하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서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어휘는 분명히 그 달의 15일, 즉 만월의 날을 의미했다. 그 날을 숫자로 보다는 이름으로 칭하므로, 창세기는 하나님의 안식일이 달의 기울기와 관련시킨 이방 국가의 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그것은 천체의 주기와는 어떤 관계도 없는, 영구적인 질서 안에서의 일곱째 날일 것이다. (50.5)
 영구적인 질서를 나타내므로, 일곱째 날은 창조 이야기의 우주적인 기별 곧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이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아울러 지속적인 통치자가 되신다는 기별을 강화한다. 그러나 출애굽에서 일곱째 날이 창세기의 문맥에서 이 우주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서 주어진 것은, 그 날이 명백히 “안식일”을 의미하고 있으며, 분명히 그 날의 새로운 역사적이고도 구속적인 기능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50.6)
 (4)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공식이 일곱째 날을 위해서 사용되지 않음
 창조의 이야기에서 일곱째 날과 관련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문구가 생략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안식일이 앞에 나온 육일과는 달리 문자적인 24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쉼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시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데일 라쯔라프는 기록하기를 “창세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곱째 날의 쉼의 끝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라’는 문구의 생략에 의해 지속되는 상태로 제시되고 있다는고 한다.”95) 그는 이러한 공식의 부재를 “그 첫 번째의 일곱째 날의 조건과 특성이 하나님에 의해 계속되도록 고안되었으며, 아담과 하와의 죄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계속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96) (51.1)
 영원한 쉼
 랍비와 그리스도인 기자들 모두는 창조의 일곱째 날과 관련하여 “저녁과 아침”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는 것을 구속받은 자들의 미래에 있을 영원한 안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참회록(Confessions)의 마지막 쪽에서 다음과 같은 우아한 기도문에서 이런 해석의 가장 적절한 본보기를 제공한다. “오 여호와 하나님이여,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 . 쉼의 평화, 저녁이 없는 안식일의 평화를. 왜냐하면 이 모든 사물의 가장 아름다운 질서, ‘매우 좋았더라’는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는 아침과 저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결코 저녁이 없으며, 어떤 황혼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께서 그 날을 영원히 계속되도록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며. . . 우리 역시 일을 마친 후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당신 안에서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97) (51.2)
 창조 안식일에 대한 이런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은, 제4장에서 본 것처럼, 평화와 쉼, 그리고 첫 번째 안식일의 번영이 앞으로 올 세상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번영에 대한 예언적인 이상에 영감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다소의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역시 히브리서 4장에서도 발견되는데, 거기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아 있는 안식의 쉼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라는 요청 받고 있기 때문이다(히 4:9, 11). (51.3)
 문자적인 날
 저녁이 없는 창조의 일곱째 날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은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의 이유 때문에 그 날의 24시간의 주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51.4)
 첫째, 일곱째 날은 앞에 나오는 육일과 같이 열거되고 있다. 성경에서 “날”(day-yom)이 숫자와 함께 나올 때는 언제나 24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51.5)
 둘째, 십계명 그 자체는 육일 동안 일하신 하나님께서 창조 주일의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출 20:11). 만일 첫 육일이 통상적인 지상의 날들이었다면, 우리는 그 일곱째 날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51.6)
 셋째, 창조의 일곱째 날을 지상의 안식의 기초로 언급하고 있는 모든 페이지는 그 날을 보통의 날(출 20:11; 31:17; 막 2:27; 히 4:4 참조)로 간주한다. (51.7)
 마지막으로, 안식일을 창조—안식을 기억하는 날로 지키라는 계명은(출 20:11) 본래 문자적인 24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들이 엿새동안 일하고, 자신의 본을 따라서 비록 일곱째 날이 문자적인 일곱째 날이 아닐지라도 쉬라고는 명령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51.8)
 “그리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라”라는 문구의 생략은 일곱째 날 뒤에 다른 창조 일들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문구는 창조의 첫 날들을 그 다음에 따르는 다른 날들과 구별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창조의 마지막 날이 되는 일곱째 날은 더 이상 구별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 뒤를 따르는 “여덟째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창조주일의 종료를 표하기 위해, 일곱째 날은 더 이상 그 날들의 종료라는 말로 제한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더 이상 창조의 날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51.9)
 제4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또 다른 제안은 안식일이 탁월한 빛 가운데서 축복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메시야의 시대에 관해 언급하면서, 스가랴는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7)라고 주목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일곱째 날이 “저녁과 아침”에 대한 언급이 없는 날이라는 가능한 암시를 가지게 된다. 그러한 자세한 것은 랍비에 의해서 안식일이 특별히 초자연적이고, 지속적인 빛에 의해서 특별한 축복을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4장으로 돌아간다. (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