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에서 비롯된 신조 및 교리 문답의 진술들에 창조가 얼마나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이 문서들 아홉 개에 대한 조사에서 루터의 1529년 〈소교리문답서〉만 창조에 관한 진술을 포함했으며, 그것도 만물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일 뿐이었다. 이 명백한 결여에 대한 이유는 이 주제에 관하여 개혁자들이 동의했으며, 그것이 그들과 로마교회 사이의 주된 논쟁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아마도 이 주제에 대해 합리적인 정도의 일치가 있었던 마지막 시기였다. 왜냐하면 합리주의 시대의 도래로 말미암아 그 다음 두 세기에는 이 의견일치가 매우 다른 견해들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525.3)
 G. 합리주의 시대
 17세기와 18세기에 과학적인 탐구의 상승과 함께 세계와 우주에 대한 새로운 사상들과 개념들이 철학적인 영역에 들어왔다.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하비 그리고 다른 이들의 발견들로 인해 우주의 운행에 대한 새롭고 기계론적인 견해가 대두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천연계에 창조하신 법칙들에 관한 연구로 시작했던 것이, 처음에는 그것들을 하나님과 연관시켰으나 나중에는 그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끝났다. 그것은 특히 아이작 뉴턴 경(AD 1642-1727년)의 경우에 사실이었다. 그 자신이 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이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 법칙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는 견해들을 개발하도록 이끄는 것들을 물리 법칙들의 세계에서 발견했다 우주는 스스로 있었고, 비록 법칙에 의해 운행되었지만그 법칙들은 우주에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보게 되었다. (525.4)
 우주가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보이게 되자, 그 시대의 사상가들의 사고에서 창조주가물러났다 이로 인해서 이신론적 우주관, 시계 제조자 모델이 대두되었다. 위대한 시계 제조자처럼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으나, 그후그분은그것이 그것과함께 창조하신 법칙들에 의하여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두셨다. 그 시계는 태엽이 감겨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 세상의 자연적인 운행에 개입할 수 없다는 추론이 내려졌다. 따라서 이제는 선지자들에게 어떤 직접적인 계시가 제외되었듯이, 기적들도 제외되었다. 본래의 창조주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세상을 창조한 후 그분은 세상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525.5)
 그 견해에서 한 발자국만 나아가 인류는 시계 제조자 하나님도 필요하지 않다는 개념이 생겼다. 우주는 스스로 있을 뿐 아니라 시계 제조자의 조력 없이 스스로 순간적으로 생겨나기도 했다. 이 철학적인 발전들이 다르지만 평행인 두 방식으로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는 성경 이야기에 대한 문학적인 비평을 통해서였고, 두 번째는 과학이 성경의 창조 이야기의 부정확성을 입증했다는 주장을 통해서였다. 성경의 기록에 대한 이 두 개의 평가 방법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두 개의 발전을, 그것들이 성경 이야기에 제기한 몇 가지 도전들과함께 여기서 조사한다. (525.6)
 1. 창세기에 대한 문학 비평과 창조 이야기
 창조 이야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비평가들 중 한사람은 네덜란드에 살았던 유대인 철학자 베네딕트스피노자(AD 1632-1677년)였다. 그러나 그의 논평은 다가올 일의 서문에 지나지 않았다. 창세기와 창조 이야기에 대한 현대의 문학 비평이 시작된 획기적인 연구는, 1753년에 창세기의 구성에 대한 그의 이론을 출판한 프랑스인 내과의사, 장 아스튀르크(AD1684-1766년)의 저서이다. 아스튀르크는 창세기의 모세 저작권을 고수했지만, 모세가 자료들을 사용했으며 그것들을 네 개의 열(列)로 배치했다고 제의했다 그리고 나중에 서기관들이 이 열들을 재배치하여 창세기의 현재의 배열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창세기 1장2장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이 다르게 사용된 것은 다른 자료들로부터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526.1)
 아스튀르크의 생각을 확장하여 이 자료들을 모세로부터 분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은, 이 자료들이 모세보다 오랜 후 다른 시대들과 서기관들에게서 유래했다고 주장한 요한 아이히 호른(AD 1752-1827년)에 의해서 이뤄졌다. 19세기의 다른 학자들이 이 이론에 더하여 마침내 문서가설이 그 최상의 종합으로 나타났는데, 율리우스 벨하우젠(1844-1918년)이 그의 저서 <육경의 구성과 구약의 역사서들(3판, 1899년)〉에서 제시한 그것이다. 이 이론은 계속해서 수정을 겪는다. 현재 오경의 주된 네 자료들, 즉 J, E, D, 1가 다윗 시대로부터 포로 후기까지 약 500년의 기간에 걸쳐 분포된다. (526.2)
 창세기의 시작에 있는 두 장은 각각 E 자료와이 자료로 배정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고 문학양식이 다른 것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창조 이야기들 중 어느 것도 모세에 의해서 기록되지 않았고 둘 다 차후의 서기관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 이야기들은, 성경의 역사에서 늦게 그리고 다른 시대들에 작업한 다른 그룹의 서기관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신뢰할 수 있는 역사로 간주될 수 없다. (526.3)
 유대인 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수적인 저자들은 문서가설을 광범위하게 비평했다. 이것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U. 캇수토(문서가설, 영역, 1961), M. H. 세갈(오경, 1967), Ο. T. 앨리스(모세오경, 1943)의 저서들이다. 이 논문의 1부 日에서 필자는 그 두 장을 동일한 저자와 연결하는 특징들을 지적함으로써 문서가설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응답했다. 그 두 내러티브 사이의 단어, 음절 그리고 악센트의 수에 있어서의 정확한 일치는 창세기 1장2장이 4세기나 그 이상의 기간에 의해 분리된 다른 서기관 학파들에 의해 생성되었음을 분명히 반대하여 말한다. 게다가 하나님의 이름 두 개의 사용은 그 두 장에서 하나님의 기능과 관련된 신학적인 의미가 있음이 나타났다. (526.4)
 문서가설은 히브리 문학의 운문과 산문에서의 평행적인, 반복적인 성격을 파악할수 없다. 창세기 2장의 이야기는, 히브리 평행 저술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처럼 창세기 1장에 있는 몇 개의 추려낸 요소들의 평행 반복이다. 창조 기록이 히브리 성경의 주된 진술이라면, 그것의 평행 반복을 기대할수 있다. (526.5)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다른 두 종류, 즉 이스라엘을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 및 문화들과 일률적으로 다루는 자들 그리고 이스라엘을 독특한 것으로 구별하는 자들로 모이는 경향이 있다. 문예 비평가들은 창세기의 두 창조 내러티브를 함께 묶는 그 요소들을 무시하면서 그 두 내러티브를 분리하는 요소들을 찾아왔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것들을 함께 묶는 주된 문예적인 기교, 즉 사상의 반복적인 평행대구를 무시했다. (526.6)
 성경 본문을 분석하는 다른 기교들이 문서가설을 따라왔다. 이것들 중 하나가 H. 궁켈(창세기의 전설)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된 양식비평이다. (527.1)
 이 사상 학파는 그 이야기를 낳은 “삶의 정황”을 강조하고 그 내러티브가 전달된 단위들을 조사한다. 궁켈은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의 카오스창조 신화와 연결하려고 시도했다〈참조 IV. A. 1). 카오스 주제는 창세기 1장에서 어떤 의미심장한 범위로 잔존하지 못했으므로, 궁켈은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고 세상이 하나님과 카오스의 충돌 후에 창조되는 이야기 형태를 추측할 수 있다.”(궁켈, 74; 고딕체 첨가)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주된 기능어는 “추측”이다. 환언하면, 카오스는 우리가 오늘 갖고 있는 성경 본문에는 있지 않으므로, 그 이야기는 카오스와의 전투 이야기를 하는 그런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 두 내러티브가 공통점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빌로니아 신화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재구성되는 표준이 된다. (527.2)
 2. 창세기에 대한 과학 비평과 창조 이야기
 과학 분야가 창조 이야기를 비판하고 창조 이야기와 함께 홍수 이야기를 비판한 첫 번째 수단은 지질학의 발견물들과 이론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앞섰지만, 현대 진화론적 지질학의 기초는 제임스 하튼(AD 1726-1797년)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암석 형성들을 조사했을 때, 그는 움직이는 물이 땅을 마모시키는 침식과 새로운 암석들을 형성하는 퇴적 활동이 느리다는 것을 대단히 강조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의 상태가 항상 그러했다고 주장하는 동일과정설에 대한 이론적인 기초를 놓았다. 만약 현재는 과거에 대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열쇠라고 가정하면, 동일과정설의 가정들이 과거 시간에 대한 척도가 되는데, 침식과 퇴적의 거의 끝없는 사이클의 과정으로 뻗어나간다. 이기본적인 제안으로 지질학적 시간은, 오래되지 않은 성경의 창조가 포함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훨씬 너머로 확장되었다. 프랑스의 조르주 퀴비에(George Cuvier)는 이런 식으로 곧 화석에 대한 자신의 연구들을 퇴적된 지층에 첨가했다. (527.3)
 a. 19세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윌리엄 스트레이터 스미쓰라는 이름의 영국인 땅 측량기사는 자신이 측량하는 일을 하면서 발견한 다른 암석 시스템을 조직화함으로써 이 시스템을 향상시켰다. 스미쓰는 자신이 친숙했던 암석충들을 근거로 영국 중부의 지질학적 지도를 만든 “지표 화석들”의 개념을 정립했다. 이 지도의 수용은 지질학적 지도 제작 프로젝트를 영국 전역으로 확장하도록 그를 격려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퀴비에와 동시대인이었으나, 그의 제한된 교육 때문에 필시 퀴비에의 비슷한 성질의 저서와 결코 친숙하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527.4)
 하튼, 퀴비에 그리고 스미쓰의 저서들은, 광대한 시간대들이 지질학적 지층들과 그것들이 포함하고 있는 화석들의 퇴적에 관련되었다는 개념을 지지하고 확장했지만, 이 과정에 대한 도식(圖式)은 1844년에 출판되었다. 〈만물에 대한 박물학의 흔적들〉이라는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그 책이 출판될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영문학 사전〉으로 유명한 출판업자인 로버트 체임버스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 저자로 인정되었다. 화석들에서 발견되듯이 무척추생물에서 물고기로, 양서류에서 포유류와 사람으로의 진보가 일종의 연속 또는 진화라고 이 책은 주장했다. 진화의 도식은 아직 제안되지 않았지만, 이것들이 긴 시대들에 걸친 연속적인 생명체들이라는 개념은 찰스 다윈의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유포되어 있었다. (527.5)
 그 동안에 동일과정설의 진화론적 지질학 법칙들이 찰스 리엘(1979-1875년)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지질학에 대한 이 접근법은 그의 저서〈지질학의 법칙들〉에 제시되었는데, 세 권 중 제1권은 1830년에 출판되었다. 놀랍게도 리엘은 오랫동안 자기 저서의 진화론적 함의들을 저항했다. 그는 체임버스의 책〈만물에 대한 박물학의 흔적들〉을 거부하고 다윈의 이론이 출판되었을 때 그것을 저항했다. 마침내 그는 후년에 항복하고 그것을 수용했다. 리엘의〈지질학의 법칙들〉은 잘 알려져, 창조에 대한 성경의 짧은 연대기로부터 동일과정설의 지질학의 극도로 긴 기간으로의 재조정을 야기하는 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다윈은 비글호로 떠나는 그의 항해에 리엘의 책을 휴대했다. 따라서 그 책은, 그가 마침내 정립한 그 생물학적 이론에 대한 지질학적 입문서 역할을 했다. 다윈 자신의 진화론은, 연속되는 종들로 진보하기 위한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에 의존했다. 이것은 1859년 그의 저서 종의 기원에 발표되었다. (5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