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서는 성경처럼 창조를 많이 다룬다 희년서 2장과 3장에서는 언어가 창세기와 비슷하다. 창조는 창세기와 같은 순서로 엿새 동안 일어나지만 각각의 날에 대해 더 세부적이다. 연장한 한 단원은 제칠일, 첫 번째 안식일을 묘사한다. 이 진술의 목적은 안식년과 희년의 첫 번째 사이클을 시작할 기산점(起算點)을 주기 위함이다. (523.1)
 에녹1서에서 중요한 한 주제는, 별들과 해와 달이 그들의 궤도에서 움직이며 바람, 바다 그리고 계절이 그들의 규칙적인 사이클을 지키는 자연의 질서정연한 사이클이다. 이 사이클들은 이 책의 후반부에 있는 천문학적인 추론들을 위한 무대를 형성한다. 이 규칙적인 사이클들에 관해서 저자는 말한다. “그것들 모두는 영원히 사시는 분에게 속한다고 말한다. 그분의 작품은 해마다 진행되며 전진한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작품은 번성하며 그분에게 순종하고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으로 기능한다.”(에녹1서 5:1-3). 이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 및 유지 활동에 대한 구약의 관점과 분명히 일치한다. (523.2)
 에녹1서 10:17-22에 의하면, 새 땅이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의로써 경작될 것이며 축복의 나무들이 심겨질 것이다. 풀들, 나무들 그리고 포도나무들이 풍성히 날 것이며, 모든 오염과 죄악은 제거될 것이다. (523.3)
 C. 1세기의 유대 문헌들
 요세푸스(AD 37년경-100년경)의 <유대 고대사〉와 같은 역사적인 저서가, 그 자료들에 관한 논의 후 창세기에서 말해진 대로 창조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요세푸스의 저서에서 이 부분은 1권 27-42장을 포괄한다. 그 이야기는 성경 본문의 순서를 따른다 여기에 있는 확장 부분은 별로 많지 않다 (523.4)
 창세기 2장을다룰때, 요세푸스는 들과 동산의 상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곧바로 인간의 창조를 다룬다. 그는 창세기 2장의 강들을 이름과 위치로 묘사한다. 창세기 3장의 타락에 관하여 요세푸스는, 첫 부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 잠시 동안 “더 행복하게” 느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요약하면, 요세푸스는 창조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를 꽤 가깝게 따르며 그것을 역사적인 목적들을 위해 즉 이스라엘에 대한그의 역사에 대한서론으로서 사용한다. (523.5)
 AD 1세기의 전반부에 살고 활동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창조 이야기에 새로운 요소를 주입한다. 필론의 사고와 저술에 미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은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쉽게 드러난다. 창조 이야기 뒤에 있는 성경 종교의 핵심을 용감하게 주장하는 반면 그는 또한 그 이야기의 세부적인것들을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것들로 해석했다(창조에 관하여). (523.6)
 창조에 관한 필론의 견해는, 성경 이야기가 그리스철학 원리들을 따라서 어떻게 다시 읽혀지고 해석되었는지 보여 준다. 실재와 이상의 이분법이 영속되어 천지 창조를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왔을 때와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든다. 히브리인의 관점에서는 이 물질창조가 심히 좋았으나, 그리스인과 필론의 관점에서는 영적인 것 즉 이상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우월했다. (523.7)
 D. 초기교회:오리게네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오리게네스(AD185년경-254년경)는 이전에 필론으로 대표되었던 알렉산드리아 주석 방법을 추종했는데, 그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성경 본문들에서처럼 창세기 1장에서 오리게네스는 삼중 의미, 즉 문자적 의미, 도덕적 의미 그리고 풍유적 의미를 읽어내었는데 그 중에서 그는 확실히 풍유적 의미를 선호했다. (523.8)
 아우구스티누스(AD 354년-430년)는 창조 기록의 성격에 관하여 오리게네스와 매우 다른 견해를 취했다. 그는 연, 월, 일, 시가 하나님이 작동하게 하신 천체들의 운동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을 주목했다(하나님의 도성 12.15). 그는 창조의 첫 3일의 성격에 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위의 책, 11. 6), 창조 활동들 그 자체의 성격에 관해서는 분명히 했다 이것들은 비유적이거나 상징적이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천연계에서의 조화와 통일성은 창조주의 지혜를 분명히 찬양한다고 강조했다(참회록 7. 13). 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의인화한 무생물 피조물로부터도 창조주께 마땅히 돌려야 할 찬양에 많은 강조를 두었다(하나님의 도성 11. 4). 창조주간의 제칠일을 그는 문자적으로 취했으나 하나님의 안식은 영적이었다(위의 책, 11.8). (524.1)
 아우구스티누스는 노아 홍수 이전의 사람들에 관한 족보(창세기 5장)에 있는 연수(年數)에 많이 주목했다. 그는 그들의 나이를 명확히 계산하기 위하여 히브리어와 헬라어 사본들을 비교했다. 그는 노아 홍수에 대한 달력을 근거로 그들의 연수는 우리의 연수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의로부터 그는 아담과 하와를 포함하여 노아홍수 이전의 사람들을 문자적인 출생과 사망 나이들을 가진 문자적인 개인들로 간주했다(위의 책, 15.10-15). 그는 그의 연구로부터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에 근거하여, 세상은 아직 6,000년이 되지 않았다고 마침내 결론지었다(위의 책, 20.7). (524.2)
 E. 중세:하나의 실례로서의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AD 1225년경-1274년)의 가장 위대한 저서는 중세 신학적 체계화의 최고의 업적인 그의 〈숨마 테올로기아이(Summa Theologiae, 신학대전)〉이다. 3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하나님, 그분의 본성 그리고 만물이 어떻게 그분으로부터 유래했는지 다루고 있다. 비록 다양한 영역에서 아퀴나스에게는 이성이 중요할지라도, 세상의 창조를 포함하여 근본적인 그리스도교 가르침들 중 많은 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이른다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와 같은 그러한 진리들은 이성과 모순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524.3)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대부분의 그의 주장들은 천연계, 즉 창조로부터 도출된다 제1 운동자가 창조를 작동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작동으로부터 그분에 관해서 안다 제1 원인으로서 그분은 이 창조가 시작되도록 야기했으며 그 후의 연쇄적인 원인들을 주도했다. 죄가 그 완전한 창조에 입힌 손상도 물론 고려해야만 한다. 천연계의 합리적인 설계에 대한 아퀴나스의 주장은 현대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애용하는 것이다. 천연계에서 손쉽게 뚜렷한 설계를 볼 수 있어 비록 공식적으로는 거룩한 설계자(Designer)를 예배하지 않을지라도, 그분에게로 다시 인도되는 일종의 “세속적인유신론”이 현대인들중에서 일어났다. (524.4)
 F. 종교개혁:하나의 실례로서의 마르틴 루터
 루터는 1512년 10월 18일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주일 후 그는 창세기에 관해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이 초기의 강의들은 소실되었다. 그러나 1535년 6월 1일에 시작한 두 번째 세트의 〈창세기에 대한 강의들〉은 현존한다. 창세기의 첫 다섯 장에 대한 그의 강의들은 성숙한 루터가 창조에 관해서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관한 좋은 개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루터의 저작들, 1권). (524.5)
 루터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믿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저서의 서두에 “모세로부터 우리는 세상이 6,000년 전에는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위의 책, 1.3)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창조가 이 저서에 꽤 문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여러 본문들에서 명백하다. 그는 “모세가 하늘과 땅이라고 부르는것은, 현재의 그것들과 같은 종류가 아니라 그때까지 그것들의 거칠고 무정형인 덩어리들이었다. 물은 검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보다 가벼웠고 조용한 무정형의 땅 자체를 분비물 또는 짙은 안개처럼 둘러 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십계명의 분명한 말씀에 의하면(출 20:11), 하나님은 차후의 사역을 위한 원물질을 6일 범위 밖이 아니라 첫째 날의 시작에 창조하셨다.”(위의책,6)라고썼다. (524.6)
 이 상태를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묘사한 것을, 루터는 텅 비고 형태가 없으며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위의 책, 7). (525.1)
 루터는 여기서 철학자들의 추론을 거절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제1 운동자를 언급했으나, 이 개념으로 괴롭힘을 받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모세를 따라서 이 모든 현상들이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일어나며 지배된다고 선포하라.”(위의 책, 30)고 단언했다. 루터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창조 이야기의 어떤 면들은 믿음에 의해 믿어지도록 하나님께 맡겼다. 물의 분리에 대해서 그는 “그러나 그분은 친히 당신의 질서의 유일한 주인과 당신의 세계의 심판관으로 남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너무 지나치게 꼬치꼬치 캐묻기 좋아해서는 안된다.”(위의 책, 33)라고 주장했다. (5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