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우리의 구원 (구속론) 제 5 장 영광화(Glorification)
 엘렌. 지. 화잇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의 바탕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입혀주신 의에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의 역사하시는 영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셨다.”(정로의 계단 원문 63)라고 진술함으로써 바울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119.4)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소망이다. 사도의 이 진리는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소망도 영화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지금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119.5)
 시내산에서 모세의 얼굴로부터 사라져 가는 찬란함과 비교해 볼 때, 그리스도인은 지금 시작해서 날마다 증가할 탁월한 영광을 가지고 있다. (120.1)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니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3, 18) (120.2)
 사람이 바로 지금 그러한 영광을 반사하기 위해서 어떻게 주님의 영광을 명상하며 바라볼 수 있는가? (120.3)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신약 성경에 있는 복음서의 기자들에 의해 묘사되고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으로, 예수님 곧 그분의 형상에 우리의 눈을 고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매력적인 품성의 아름다움을 바라봄으로 각 신자는 도덕적 동화(同化)에 의해 그의 형상으로 변환하게 될 것이다. 엘렌. 지. 화잇은 이것을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나누어주시는 의를 받아들임으로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그와 같이 된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간직되며, 그것은 전 존재를 사로잡는다.”(본 교회 성경주석 6권 1098페이지) (120.4)
 “그리스도께서 자신보다 더 사랑을 받게 될 때 구세주의 아름다운 형상은 신자 속에 반사된다 ∙∙∙ 자신이 희생제단에 놓이게 될때까지는 그리스도는 품성 가운데서 반사되지 않을 것이다. 자아가 매몰되고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보좌에 좌정하실 때, 영혼을 감싸는 도덕적 분위기를 깨끗게 해 줄 원칙들이 계시될 것이다.”(상동) (120.5)
 “마음은 육욕적 장질부사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 사상들은 정결해질 필요가 있다. 만약 육체적 치료가 마음과 정신의 정결과 활력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남녀들이 깨달았더라면, 그들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본 교회 성경주석 7권 909) (120.6)
 “사단은 우리의 시야로부터 예수를 가리우고 그의 빛을 잠식시키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영광의 한 섬광이라도 보게 되면 우리는 그에게 끌리기 때문이다. 죄는 예수의 다함없는 매력을 우리의 시야로부터 가리운다.”(본교회 성경주석 6권 1097) (121.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을 반사하는 것으로 인정했다.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 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었던 자들은 사단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4절)가 아직도 가리워져 있었다. (121.2)
 미래를 맛봄(Tasting the Future)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계발되고 성령의 동참자가 된 자들은 실제적으로 “내세의 능력을 맛 본(히 6:5) 것이다. 즉 그리스도안에서 미래에 있을 영광의 능력은 벌써 이 시대에 터트러져 왔으며, 이 능력과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의해 지금 “맛보고” 경험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미래에 있을 하늘의 영광을 믿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마음속에 기쁨과 희락의 영광들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121.3)
 바울은 만일 우리가 지금 그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다면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121.4)
 그는 이러한 고난들을 항상 앞으로 다가올 영광의 영원한 기쁨의 전망 가운데서 본다. 사도는 그의 급진적인 평가로써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여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한다. (122.1)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그런 강력한 어법들을 사용할 수 있었던바, 그는 “세째하늘 ∙∙∙ ∙∙∙ 낙원에 이끌려” 갔었으며, 그리고 “말할수 없는 말과 ∙∙∙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 (고후 12:2, 4) 그는 단지 하늘의 영광을 하나님 자신의 영광처럼 묘사할 수는 없으나 압도적인 실재였다고 다음과 같이 증거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사 64:4과 비교하라) (122.2)
 약속된 영광은 바울에게 있어서 지극히 극적인 실재(dramatically real)이었으므로,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모든 고통과 재난의 년수를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라 하였다. 이 환란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그와 그의 동역자들을 위해 이루고 있었다.(고후 4:17) (122.3)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야말로 얼마나 진실되고 귀한 분이었는가! 바울은 단순하고 완전하게 실체(實體)를 보았던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했다. (122.4)
 미래에 있을 실체는 그에게 현재보다 무게로 더하였으며, 따라서 이것은 그로 하여금 이생에서 고난받을 태도를 취하게 했다. (122.5)
 이것은 고난이 바울에게 전적으로 부적당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품성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꾼이나 도구로 보았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 즉 많은 사람들이 믿는대로 그의 나쁜 시력으로 인한 신체적인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탄원했다.(갈 4:156:11 을 비교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고 하시면서 거절하셨다. 사도는 이 대답을 그를 정결케하시고 보호하는 하나님의 방편으로 해석했으며, “여러 계시를 받는 것이 지극히 크므로 나를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7절) 한다고 했다. 이와같이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10절)고하여, 핍박과 환란중에서 기뻐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에 협력했다. (122.6)
 바울은 모든 그의 시련들을 영원한 가치성에 비추어서 판단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탁월한 능력 때문에, 극심한 시련 가운데 있는 한 사람으로 견고히 서 있었다. 그가 당한 고난의 위대한 목적을 설명하고자 노력하면서, 그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임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1)고 했다.(11:23-29도 보라) (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