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일곱 재앙 (15:1-16:21)
 요한계시록 12-13장은 하나님의 신실한 남은 자들에 대한 열국의 분노를 묘사하는 반면(계 11:18), 요한계시록 14장은 열국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경고를 기술한다. 15-16 장은 하나님의 진노가 사단의 삼위를 추종하는 자들과 경배하는 자들 위에 일곱 대접 재앙을 통하여 집행되고 있음을 묘사한다.

마지막 일곱 재앙을 위한 준비 (15:1-8)
 본 단원은 요한계시록 14장 14-20절과 이어진다. 그것은 악인들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최후의 진노를 집행하기 전에 있을 준비 사항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최후 진노는 마지막 일 곱 재앙을 쏟음으로 집행된다. 재앙이 내리기에 앞서, 요한은 최후의 위기를 통과한 후 위대한 구원을 송축하는 승리한 성도들을 본다(15:2-4). 요한계시록 15장 2-4절은 도약판 구절 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12-14장을 결론지으면서 마지막 일곱 재앙들의 서론 역할을 한다.1)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5: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하늘에 ... 이적을.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서와 같이, 헬라어 세메이온(semeion)은 주의를 사로잡는 현저한 시각적 장면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진노.
 헬라어 쒸모스(‘분노’, ‘격노’)는 강력한 또는 격정적인 분개 또는 분노를 뜻한다(계 14:10의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요한계시록 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노래.
 요한이 들었던 노래, 곧 유리바다 위에서 구속받은 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거의 전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약의 구절들로 구성되었다.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시 111:2-3 참조)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신 32:4; 시 145:17 참조) “만국의 왕.”(렘 10:6-7 참조) “오, 주여 누가 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 하오리까?”(렘 10:7 참조)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삼상 2:2 참조)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시 86:9; 렘 16:19 참조)
전능.
 요한계시록 1장 8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5: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요한계시록 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요한계시록 15:7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요한계시록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성전.
 헬라어 나오스는 요한계시록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나오스의 의미를 더 알기 원하면, 요한계시록 11장 1 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5:7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네 생물 중의 하나.
 아마도 높은 계급의 천사들인 것처럼 보이는 네 생물들은 땅에 하나님의 진노를 쏟는 일에 관여한다(6:1, 3, 5, 7; 15:7), 요한계시록 4장 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금 대접.
 구약에서 금 대접(헬, 피알레 phialé)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과 예물을 위하여 사용된 그릇이다(왕상 7:40, 45, 50; 왕하 12:13; 25:15; 계 5:8 참조), 요한계시록 15-16장의 금 대접들은 요한계시록 14장 10절의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주해)
요한계시록 15: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놀라운 새 장면이 요한의 주의를 사로잡는다. 그는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를 본다. 이 일곱 천사들은 아마도 재앙을 선포하기 위하여 나팔을 분 천사들과(8-9장) 동일한 천사들일 것이다. 이 재앙들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의도된 예비 심판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심판의 도구로서 나팔들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대접을 받았다. 마지막 일곱 재앙은 마지막 재앙으로 불렸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으로 마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일곱 재앙이 내림으로 반역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난다. 인간의 죄가 그 극에 달하였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나 자비가 섞인 부드러운 것이었다. 여기서 상황은 변한다. 악인들은 자비와 은혜가 섞이지 않은(계 14:10 참조) 하나님의 완전한 최후의 진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바벨론의 매혹적인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기로 선택한 자들에 대한 셋째 천사의 선언이 이 곳에서 성취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한다. 여섯째 인을 떼는 장면에서 묘사된 것과 같이, 악인들이 굴과 산 바위에 자신들을 숨기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최후의 진노로부터 피하기 위해서다(계 6:16-17). 마지막 재앙들은 최후의 심판을 앞 두고 회개치 않은 자들 위에 쏟아진다.
요한계시록 15: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요한계시록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요한계시록 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사단적 삼위를 추종하는 자들과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대상인 반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는다. 최후의 재앙들은 분명히 그들을 해하지 못한다. 요한은 그들이 유리바다같이 보이는 땅 위에 서 있는 것을 본다. 요한계시록 4장 6절에서 유리바다는 하늘 보좌실의 하나님 보좌 앞에 있다. 이것은 요한이 요한계시록 7장에서 본, 큰 환난에서 나온 구속받은 자들이 하늘 성전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계 7:9-15), 제4장에서 유리바다는 수정같이 맑았던 반면, 이번에는 불이 섞여 있다. 유리바다는 보좌 앞에서 타는 “일곱 등불”과 번개로 표현된 하나님의 다채로운 영광을 반사한다. 이 새로운 세부 사항은 하늘 보좌실의 찬란한 영광을 강조하기 위함이다.2)

 또한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거문고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다(계 5:8; 14:2). 구속받은 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구원과 원수들에 대한 그분의 심판으로 인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다. 모세의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애굽인들의 파멸을 목도하면서 부른 구원의 노래다(출 15장). 출애굽의 위대한 구원은 최후의 위기 때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할 위대한 구원의 모형으로서 이 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과 요한계시록 15-16장의 사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출애굽의 노래는 애굽인들에게 재앙이 내리고 이스라엘이 속박에서 풀려난 후에 부른 것인 반면, 요한계시록 15장의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는 마지막 일곱 재앙이 내리기 전에 부른다. 이는 요한계시록 15-16장에서 구속이라는 건설적인 요소가 심판이라는 부정적 요소보다 앞서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3)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충성이 가혹하게 시험을 받은 후 승리하여 큰 환난으로부터 빠져나온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에 저들의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계 7:14).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인들로부터 구원하신 후, 그들이 바닷가에서 그분에게 찬양을 돌린 것같이, 구속받은 자들은 사악한 삼위와 또한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린다. 그들의 구출과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의 결과다. 이것은 두 개의 노래가 아니라, 구속받은 자들이 당신을 신실히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위대한 구원을 송축하여 부르는 하나의 노래임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 14장 3절에 의하면,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이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들은 최후의 위기에서 역사상 어떤 인간도 경험하지 못했던 구원을 경험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초지일관 충성하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였으며, 사단적 삼위에 가담하여 짐승을 경배하여 그 이름의 수를 받기를 거절하였다. 이제 그들은 사단적 삼위를 이기고 그들의 승리를 송축한다. 요한은 이 승리의 노래를 홍해에서 부른 이스라엘의 송축을 토대로 하여 묘사한다.

 구속받은 자들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그분의 길은 의롭고 참되시며 자신들을 위한 그분의 일은 크고 기이하시다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를 찬양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구속받은 성도들이 그들 자신들의 성취나 공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4) 노래 전체는 전능하신 언약의 하나님, 곧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위대하신 구원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시련과 고통의 시간에 그들을 보호하셨고 보전하셨다. “이제 그들은 그분의 영광을 공유하고 있다.”5)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한 남은 백성이 얻은 승리는 그들의 인간적 성취의 결과로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기이하신 일들과 그분의 의롭고 참된 길들에 의해 얻은 승리다. 노래의 나머지 부분은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 대한 분명한 인유이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이는 구속받은 성도들이 세 천사의 영원한 복음 기별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바벨론과 그 죄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벨론이 받을 재앙을 받지 않는다.”(계 18:4)
요한계시록 15: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요한계시록 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요한계시록 15:7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이제 요한은 하늘에서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려 있는 것을 본다. 하늘 성전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인 반면, 요한계시록에서 하늘 성전은 백성이 복음을 거절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 발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하늘 성전은 ‘증거 장막’으로 언급되는 데, 이는 하나님의 율법이 구약 성막의 지성소 안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서 나온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나 국가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면 반드시 처벌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6) 재앙을 가진 천사들은 하나님의 복수의 사신들로서 하나님의 바로 면전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드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분의 의로운 진노를 쏟으신다. 마지막 일곱 재앙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열국의 분노에 대한 그분의 응답이다(계 13:11-17 참조).

 천사들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서론에서(계 1:13) 소개된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은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이 천사들의 모습이 같은 것은 이 천사들이 자신들에게 사명을 위탁하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네 생물 중 하나가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찬 금 대접들을 준다. 이 대접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성전 대접이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에서 금 대접들은 향으로 가득 차 있다. 이 향은 이십사 장로가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를 대표한다(계 8:3-5 참조). 그러나 이번에 중보의 금 대접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찬 대접으로, 멸망의 도구로서 악인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질 자들에게 더 이상 자비는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드리는 기도에 의해 내리기 시작하였다.7)
요한계시록 15: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천사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받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이것은 광야 성전과(출 40:3-5) 솔로몬 성전의 헌당 장면을 반영한다(왕상 8:10-11), 두 경우 모두,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이 건물에 가득 찼기에 예배를 진행할 수 없었다. 이 곳 하늘 성전, 즉 인간을 중보하는 바로 그 장소가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으로 가득차게 되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유예의 기간은 끝났다. 더 이상 죄인들을 위한 중보는 없다. 죄인들은 복음에 대한 완고한 거절과 반대의 결과로 자비와 은혜가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완전한 최후의 진노를 경험해야 한다.
마지막 다섯 재앙의 집행 (16:1-11)
 반역한 인간 위에 일곱 천사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쏟아 부을 때가 이르렀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침을 받았고, 바람은 놓일 것이다(7:1-3 참조). 앞에서 묘사되었던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과(14:10) 포도주 틀을 밟는 일은(14:17-20) 이제 일곱 재앙을 쏟아 붓는 것 으로 상징되었다.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은 이제 자비와 은혜가 섞이지 않 은 하나님의 완전한 진노를 경험해야 한다. “그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 6:17)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6: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성전.
 15장 5-8절에서와 같이,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나오스다. 이 곳에서 나오스는 아마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를 가리켰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1장 1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6:2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악하고 독한 헌데.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헬코스(helkos 헌데, ‘종기’)인데, 헬라어 구약 성경(70인역)은 애굽을 친 여섯째 재앙의 종기와 관련하여(출 9:10-11)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동일한 단어가 욥에게 임한 고통과 연관하여 사용되었다. 그것은 욥에게 큰 아픔과 고통을 가져왔으므로(욥 2:7), 그는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었다 (욥 2:8). 그것은 발바닥에서 머리 정수리까지 온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심한 종기’로 묘사되어 있다(신 28:35; 욥 2:7). 이런 종류의 재앙은 종종 죄에 대한 형벌로 사용되었다(신 28:35; 왕하 5:25-27; 대하 26:16-21).
요한계시록 16: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물을 차지한 천사.
 이 천사는 요한계시록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위경서 인 에녹1서는 물을 담당한 천사들을 언급한다(66:2). 그러나 이것이 요한계시록 16장 5절에서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 표현은 아마도 그의 대접을 물 근원에 쏟아 피로 변하게 하는 천사를 가리킬 것이다.
요한계시록 16:6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합당하니이다.
 헬라어 악시오이 에이신(axioi eisin ‘그들은 합당하다’)은 ‘그들은 그것을 받아 마땅하다’라는 의미일 것이다(RSV, JB, 그리고 NIV가 그렇게 번역한다).
요한계시록 16: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제단.
 이것은 번제단일 것이다. 여섯째 인의 장면에서 순교당한 성도들은 그들의 원수들에 대하여 심판해 주시도록 이 제단 밑에서 부르짖었다(계 6:9의 어구 해설 참조). 이 곳에서 요한은 향단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다. 요한계시록 8장 3-4절에서 성도들의 기도는 이 향단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왜냐하면, 이 단은 ‘금 향단’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 8:3; 9:13)
전능하신.
 요한계시록 1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요한계시록 16: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하늘 성전의 지성소로부터 큰 음성이 천사들에게 그들의 대접을 악인들 위에 쏟으라고 명령한다. 지성소에서 나온 이 음성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인 것 같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복수의 사신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명을 받았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피를 “흘렸다”(계 16:6). 그러므로 이제 대접 재앙이 그들 위에 쏟아진다.
요한계시록 16:2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첫째 천사는 그의 대접을 땅 위에 쏟는다. 그 결과로, 악하고 독한 헌데가 인간을 괴롭힌다. 첫째 대접 재앙은 애굽을 친 여섯째 재앙의 종기를 상기시킨다(출 9:10-11; 신 28:27), 종기가 괴롭힌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오로지 애굽 사람들이었던 것같이, 마지막 재앙들 중 첫째 재앙인 독한 종기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을 경배한 자들만을 괴롭힌다. 나머지 대접 재앙을 받을 대상도 바로 이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일곱 재앙은 사악한 삼위 편에선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재앙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려 했던 압제자들이다(계 13:15-17; 16:5-6). 첫째 대접 재앙은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고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와 관련하여 셋째 천사가 선포한 경고를 수행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그의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는 경고를 받는다(계 14:9-10).
요한계시록 16:3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요한계시록 16:4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요한계시록 16:5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요한계시록 16:6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6: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둘째와 셋째 천사는 그들의 대접을 물에 쏟는다. 둘째 천사는 그의 대접을 바다에 쏟는다. 그것은 즉시로 죽은 자의 피같이 되고 모든 생물은 바다에서 죽었다. 셋째 천사가 그의 대접을 강들과 물 근원들에 쏟으매 그것들은 피가 되었다. 이것은 애굽의 재앙들 중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한 첫째 재앙을 상기시킨다(출 7:17-21), 이 두 대접 재앙은 물 근원의 삼분의 일에만 영향을 끼쳐 오염시킨,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생물의 삼분의 일을 파멸시킨 둘 째와 셋째 나팔의 재앙들과 유사하다(계 8:8-11). 이 대접 재앙은 완전히 끝을 내는 것이기에 아무런 비율도 언급하지 않는다. 마실 물이 없이는 반역한 인간은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사전 경고요 예비 심판에 불과한 나팔 재앙과는 달리, 대접 재앙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에게 격렬하게 집행된다.

 이제 요한은 그의 대접을 물에 쏟고 그것들을 피로 변하게 한 물을 다스리는 천사의 음성을 듣는다. 이 천사는 악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의 적합성을 선언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5장 3절의 구속받은 자들의 노래를 반향한다. 악인들은 실제로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기꺼이 쏟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악의적으로 핍박하는 것을 즐겼다. 이제는 그 들이 마실 피를 받는다. 악인들에게 내리는 재앙은 그들의 죄에 합당한 대가다.

 그 순간에 요한은 제단의 소리를 듣는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이 제단은 아마도 다섯째 인을 뗄 때의 장면에서 언급된 번제단일 것이다. 그 곳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 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 6:10) 그들은 정해진 때에 이르러 그들의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는 소리를 들었다. 제단의 소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가 마침내 재앙을 통해 응답되고 있음을 바로 이 곳에서 확증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압제한 자들에 대한 그분의 불쾌감을 온전히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공의가 온전히 옹호되고 있다.
요한계시록 16:8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요한계시록 16: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넷째 천사는 그의 대접을 해 위에 쏟는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을 태웠다. 넷째 나팔을 불 때, 해의 강도는 부분적으로 약해져서 땅이 부분적으로 어두워졌다(계 8:12 참조), 그러나 넷째 대접 재앙은, 다른 재앙들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해가 내 뿜는 열기가 엄청나게 증가되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크게 태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재앙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길을 바꾸지 않는다. 그들은 이 재앙들을 쏟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였다. 이 사람들은 재앙을 쏟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회개하는 대신, 그들은 그들과 한편이었던 짐승이 그랬듯 이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다(계 13:6). 그들은 저들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에 대하여 반역적으로 하나님께 욕을 돌린다. 이것은 그의 당대의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한 바울의 말과 유사하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 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요한계시록 16:10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요한계시록 16:11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다섯째 천사는 그의 대접을 짐승의 보좌 위에 쏟는다. 일반적으로 첫 네 대접 재앙이 인간에게 영향을 끼친 반면, 다섯째 재앙은 사단의 권세의 중심 자체를 공격한다. 바다 짐승에게 그 보좌를 위임하고 큰 권세를 준 것은 사단이다. 그 짐승은 땅의 짐승의 도움을 받아 땅에 대한 권세를 행사하였다. 그들은 땅의 거민들로 사단적 삼위 편에 서게 하였다(계 13:12). 그러나 짐승의 보좌 자체도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장면은 애굽의 여섯째 재앙을 상기시킨다. 이 재앙은 바로의 술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들은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였다(출 9:11), 재앙에 대한 공포는 칠흑같이 어둡게 된 짐승의 왕국에 혼란을 가져온다. 이 초자연적 암흑은 애굽 온 땅에 심한 어둠을 가져온 아홉 번째 재앙과 유사하다(출 10:21-23), 짐승의 권위는 땅의 거민들 앞에서 엄청난 굴욕을 당한다. 땅의 거민들은 사악한 삼위가 재앙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데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다섯째 재앙의 흑암은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고통 때문에 자신들의 혀를 깨물만큼 대단한 공포를 가중시킨다. 각 재앙의 공포와 고통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강팍케 한다. 두렵고 감당키 어려운 재앙들조차도 악인들을 회개시키지 못한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경고의 기별을 거절함으로(계 14:6-12), 악인들은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거부하였다. 하늘 성소에서 중보는 끝났다.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계 15:8) 하나님께로 돌이키기에 너무 늦기까지 악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최후의 대기만을 위한 옥토가 된다. 이 기만, 곧 여섯째 재앙의 장면에서 묘사된 기만은(계 16:13-14) 온 세계를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있을 큰 싸움터로 몰아갈 것이다.

여섯째 재앙 (16:12-16)
 여섯째 재앙은 그것이 세상 역사의 절정의 도입이라는 점에서 앞의 다섯 재앙들과 다르다. 여섯째 재앙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실한 백성 그리고 사단과 짐승의 경배자들 사이에 있을 다가오는 최후의 전쟁 준비에 대하여 기술한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6:12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큰 강 유브라데.
 ‘큰 강’(창 15:18; 신 1:7; 수 1:4)이라 불린 구약의 유프라테스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원수들, 즉 앗수르와 바벨론(계 9:14 어구 해설 참조)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다.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그 곳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침공하곤 하였다. 유프라테스 강에 대한 비유적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이 특출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것 같다. 유프라테스 는 고대 바벨론을 가로질러 흘렀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강은 그 도시의 중요 부분이었으며, 그 곳의 작물들을 자라게 하였고, 그 도시의 거민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었다. 그 강이 없이 바벨론은 생존할 수 없었다. 유프라테스에 대한 개념은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부분에서 바벨론이 차지하는 특이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 같다(계 14:8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17장은 유프라테스 강이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음녀 바벨론은 “많은 물”(17:1) 위에 앉아 있다. 예레미야 51장 13절은, ‘많은 물’이라는 표현은 유프라테스 강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임을 나타낸다. 이 ‘많은 물’ 곁에는 바벨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천사는 요한에게 음녀 바벨론이 앉아 있는 물은 세상의 국가적 권세들, 즉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계 17:15). 이들은 종말적 바벨론을 섬길 것이며,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대적할 것이다.
강물이 말라서.
 구약에서 강물이 마른다는 것은 종종 당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능한 행사를 상징한다. 홍해가 그랬었고(출 14:21-22), 요단강이 그러했다(수 3:14-17).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벨론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그 바다를 말리며 그 샘을 말리리니.”(렘 51:36) 이사야서에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사 44:27) 하나님께서 물들을 말리신 사건은 구약의 다른 곳에도 나온다. 그것은 당신의 백성을 모으셔서 그들의 땅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그분의 준비 작업이었다(사 11:15-16; 51:10; 즉 10:10-11 참조).

 요한계시록 16장 12절에서, 유프라테스 강이 말랐다는 말은 특별히 고대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메아리친다. 이 심판을 선포한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었다. 이사야는 유프라테스 강물을 말리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하였다. 그 약속은 강물을 말림으로 고레스를 입성시켜 그 도성을 정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사 44:27-28), 예레미야는 유프라테스 강이 마른 결과로 바벨론이 몰락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렘 50:35-38; 51:36-37).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한 바벨론의 몰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바벨론의 몰락은 하나님의 목적, 곧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그 압제자로부터 구원하시고 그들의 고토로 돌아가게 하여 예루살렘과 유대를 재건하시려는 그분의 목적에 이바지하였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이 함께 학대를 받는도다 그들을 사로잡은 자는 다 그들을 엄히 지켜 놓아주지 아니하거니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니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 결코 그들의 원을 펴서 그 땅에 평안함을 주고 바벨론 거민으로 불안케 하리라.”(렘 50:33-34)

 이 사건들의 대행자인 바사 왕 고레스는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사 44:26-28; 45:1-5, 13)로, 또한 “나의 목자”로 지칭되었다(44:28), 하나님께서는, 후일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위하여 유보된 가장 영예로운 칭호들을 이 이방 군주에게 부여하셨다(사 45:4), 고레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마르게 함으로 바벨론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유랑에서 구원해 줄 하나님의 선택된 도구였다.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놓으리라.”(사 45:13; 44:28 참조) 그러므로 한스 라론델이 강조하듯이, “그의 구원 사역에서 고레스는 메시야의 해방 사명의 한 모형이 되었다.”8)

 이러한 예언의 역사적 성취는 후에 유명한 헬라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에 의하여 기록되었고,9) 현대에 와서는 고레스의 원통(Cyrus Cylinder)에 의하여 확증되었다.10) 헤로도 토스에 의하면, 바사 사람 고레스는 그 도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을 말림으로 바벨론을 정복하였다. 바벨론에 접근하였을 때, 고레스는 성벽과 방어가 너무 견고하며 도성이 앞으로 수년 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비축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고레스는, 수위가 낮아졌을 때, 그 강으로 유입하는 물길을 돌려 호수로 흘러 들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군사 중 일부를 사용하였다. 다니엘 5장에 의하면, 바벨론이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그 밤에, 바사 군인들은 도성의 성벽 아래에 있는 마른 하상(河床)을 따라 기습 공격하여 그 도시로 들어가 바벨론의 수비를 과신하고 있었던 자들을 정복하였다. 후에 고레스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본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칙령을 내렸다. 요한은 종말적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실제의 역사적 사건을 이용하였음이 분명한 것 같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종말적 백성을 그 압제자들로부터 구원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동방에서[해 돋는 곳에서] 오는 왕들.
 ‘해 돋는 곳’이란 고대의 동쪽을 일컫는다(계 7:2의 어구 해설 참조).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란 바사 사람 고레스와 그의 동맹들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고레스, 즉 그의 메시야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44:28; 45:1), 고레스는 바벨론을 대적하여 “동방에서”(사 41:2; 46:11), 또는 “해 돋는 곳”(사 41:25)에서 올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의로 그[고레스]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 을 ... 놓으리라.”(사 45:13) 라론델에 의하면, “고레스는 오기는 동편에서 왔지만, 공격하기는 바벨론의 북편에서부터 하였다.”11) 그렇다면 복수 형태의 ‘왕들’이라는 말이 왜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었는가? 고레스는 메대와 바사의 왕들로 구성된 동맹군들의 총사령관이었다(렘 51:11, 28), 유프라테스의 강물이 마름으로 고레스와 그의 동맹군들, 즉 ‘동방에서 오는 왕들’에게 길이 열렸고, 그들은 바벨론을 정복하고 압도하여 그 세계적 정부를 접수하였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본국으로 자유롭게 되돌아 갈 수 있게 하였다(에 1:1-4 참조).

 신약에서, ‘해 돋는 곳’ 또는 ‘동쪽’은 종종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돋는 해”(눅 1:78)로, “새벽별”(계 22:16)로 일컬어진다.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해 돋는 동쪽에서 오는 것으로 묘사하셨다(마 24:27-31), 요한계시록 7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해 돋는 곳에서 올라온다(계 7:2의 어구해설 참조). 그렇다면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이 왕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해 돋는 곳에서’ 온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한스 라론델은 이들을 “하늘의 전사들로 소개된” 타락하지 않은 하나님의 천사들, 즉 세상의 모든 왕들과 전쟁을 벌이기 위하여 오는 왕들이라고 주장한다(계 19:14).12)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성도들은 최후의 전쟁에서 능동적인 역할보다. 수동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승리에 참여할 것이다.”13) 맥스웰(Mervyn Maxwell)은, 요한계시록 16장 12절이 하나님과 그리스 도를 “동방에서 오는 왕들로서 무대에 등장하실” 분들로 말한다고 주장한다.14)

 그러나 계시자 요한은 그들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요한계시록 19장 11-19절 495 은 최후의 쟁투에 등장하는 적대적인 두 군대 곧 “짐승과 땅의 왕들과 그들의 군대” 그리고 그들을 대항하여 싸울 용사 그리스도와 그분의 군대들(계 19:19; 16:13-16; 19:11-16 참조)에 관하여 기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서, 또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은 진실한” 자들과 함께 하는 분으로 언급되어 있다(계 17:14; 19:16 참조). 신약에서 ‘부르심을 입은’, ‘빼내심을 얻은’, ‘진실한’ 등의 호칭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롬 1:6-7 참조; 고전 1:2; 벧전 2:9), ‘주들’‘왕들’이라는 칭호는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왕들과 제사장들로 밝혀진 성도들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한다(계 1:6; 5:10; 20:4, 6 참조). 요한계시록 7장에서 성도들은 상징적 군대들로 묘사되었다. 그들은 최후의 싸움을 위 하여 준비가 된 1000명 단위의(7:2-8), 총 144개의 군부대로 조직된 마지막 때의 군대이다(계 7:4의 어구 해설 참조), 그들은 “하늘에 있는 군대들”(계 19:14)로 지칭되었는데, 이는 요한계시의 144,000인은 이미 하늘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계 14:1; 15:2; 19:1-5 참조),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서, 그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긴 자들”로 묘사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언제나 “땅에 거하는 자들”로 언급된다(계 6:10 어구 해설 참조), 그리스도의 ‘하늘 군대인 성도들은, 그러므로 땅의 왕들과 대치하고 있다. 땅의 왕들은 사단적 삼위의 지도 아래 있으며(계 16:14; 19:19), 그것의 상징적 수는 ‘이만만[2억]’이다(계 9:16), 만일 ‘땅의 왕들’이 최후의 전투에서 사단적 삼위를 섬기는 세상의 세속적, 정치적 세력들이라면,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왕들은 분명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이신 그리스도와 성도들로 이루어진 그분의 군대이다. 이들은 사단의 동맹들과 대적하여 싸우며, 그들 최후의 그리고 궁극적 구원을 위하여 준비한다(계 19:14-16).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군대이면서도 최후의 위기에서 구원받을 자들이라는 언급은 요한계시록에서 유일하게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9절에서, 성도들은 어린양의 신부이면서 또한 혼인 잔치의 손님으로 묘사된다.
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입.
 요한계시록에서 사단과 관련하여 ‘입’의미를 알려면, 요한계시록 9장 19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거짓 선지자.
 거짓 선지자는 이 곳과 요한계시록 19장 20절; 20장 10절에 나오는데, 언제나 용과 바다 짐승과 함께 나란히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19장 20절은 거짓 선지자를 바다 짐승 앞에서 이적들을 행한 자로 묘사한다. 그는 그 이적들을 행함으로 짐승의 표를 가지고 그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을 속였다. 이러한 양상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둘째 짐승의 종교적 성격과 활동들에 대한 묘사와 같다. 땅의 짐승은 큰 이적들을 행하고 짐승 앞에서 그가 행한 이적들을 통하여 땅에 사는 자들을 속인다(계 13:13-14).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와 땅의 짐승이 하는 일은 동일하다. 땅의 짐승은 13장 이후에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대신 사단적 삼위의 일원인 거짓 선지자로 지칭된다. 거짓 선지자는 새로운 역할을 하는 땅의 짐승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짐승의 우상”과 동맹 관계에 있으며, 백성을 속여서 사단적 삼위 편에 서게 하고 바다 짐승을 경배하게 한다(계 13:15-17). 성경상 거짓 선지자의 특징인 기만적 성격과 활동을 표현하기 위하여 땅의 짐승에게 새 호칭이 사용되었다(마 7:15; 24:24; 벧후 2:1; 요일 4:1, 요이 7 참조).
요한계시록 16: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영[들].
 헬라어 프뉴마(pneuma)‘영’이나 ‘호흡’이라는 의미다.
전능한.
 요한계시록 1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깨어 자기 옷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칠복 가운데 세 번째 복이다(계 1:3 어구 해설 참조), 브루스(Bruce)는 미쉬나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예루살렘의 한 성전 대장이 야간에 성전을 지키는 군인들을 점검하기 위해 성전 경내를 순찰하는데, 누구든지 자기 초소에서 졸다가 들키면 그의 옷은 벗겨져 태워졌고, 벌거벗은 채로 수치를 당하면서 내쫓겨났다고 한다.15) 이 관습은 본문의 의미에 약간의 빛을 던져줄 것이다.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고대 세계에서 벌거벗음은 가혹한 굴욕으로 간주되었다(계 3:8의 어구 해설 참조), 패배한 군대는 옷을 벗긴 채로 포로로 끌려감으로 가혹하게 굴욕을 당하였다. 이사야는 앗수르가 애굽의 포로들을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20:4).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는 종말적 바벨론을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계 17:16) 함으로써 심판하실 것이다. 구약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표였다.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옷을 벗기고,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게”(겔 16:37-38) 하실 것이라고 에스겔은 예언하였다. 니느웨에 관한 예언에서, 나훔은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의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라고 선언하였다(나 3:5).
요한계시록 16: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
 ‘아마겟돈’(헬, 하르마게돈 harmagedōn)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에서 오직 이 곳에만 나온다. ‘아마겟돈’이라는 지명은 매우 불확실하며, 어려운 단어로, 본문은 히브리 음이라고 하였다. 이 단어는 하르(har 산)와 마게돈(magedón)의 합성어다. 마게돈(magedōn)은 70인역에 세 차례 나오며(수 12:22; 삿 1:27; 대하 35:22), 마겟돈(mageddōn)은 열왕기하 9장 27절에 므깃도와 관련하여 한 번 나온다. 그러므로 아마겟 돈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므깃도는 잘 알려진 성채-도시로, 이스라엘의 북편 지중해와 갈릴리 바다 사이의 갈멜산 능선에 자리 잡은 에스드랄론 평야에 있다. 이 도시는 이스르엘 혹은 에스드랄론 골짜기의 애굽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큰 길 상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팔레스틴 공격을 위한 천연적 통과 지역을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그 지역은 유명한 전쟁터 중의 하나로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굵직하고 가장 결정적인 전투들이 있 었던 곳이다. 므깃도에서 바락과 드보라는 시스라와 그의 군대를 패퇴시켰고(삿 5:19-21), 아하스는 예후의 칼을 받았고(왕하 9:27), 그리고 요시야는 바로 느고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왕하 23:29-30; 슥 12:11), 아마도 기드온이 미디안을 이긴 전쟁(삿 7장)과 블레셋에 의하여 사울이 패한 전쟁(삼상 31:1-7) 등의 중요한 전투가 므깃도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므깃도가 산위에 위치하지 않고 평야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이다. 므깃도의 산은 없다. 그 문제에 대하여 여러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가장 그럴듯한 견해는 ‘므깃도의 산 은 므깃도에 근접해 있는 갈멜산을 가리킨다는 것이다.16) 갈멜산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들 중 하나가 있었던 곳으로, 곧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도륙한 곳이다(왕상 18장). 이 영적 전투가 요한계시록 16장 16절의 아마겟돈 전쟁의 배후가 되는 것 같다. 우리는 갈멜산 사건에 대한 비유적 표현을 요한계시록 13장 13-14절에서 이미 관찰할 수 있었다. 땅의 짐승은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한다. 이것은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한 불을 상기시킨다(왕상 18:38). 이 사건은 경배 받아야 할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었다.

 윌리엄 H. 셰이는 요한계시록 16장의 아마겟돈 전쟁과 열왕기상 18장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지적한다.17) 예를 들면, 엘리야는 누가 참 하나님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아합에 게 모든 이스라엘을 소집하라고 요구하였듯이, 사단적 삼위도 그 추종자들을 아마겟돈으로 불러 모은다. 아마겟돈 전쟁에 연루된 배도한 종교 체제가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큰 음녀로 대표되어 있다. 이 음녀는 갈멜산 사건에서 주역을 맡았던 이세벨 여왕에 해당된다. 요한계시록 16장 13절에 의하면, 아마겟돈으로 군대를 모으는 일에 거짓 선지자가 주요 역할을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곳이다.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이 엘리야를 대적하기 위해 갈멜산에 모였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엘리야에 의해 살육되었듯이(왕상 18:40), 사단적 삼위의 추종자들도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검에 의하여 유사한 방식으로 패배할 것이다(계 19:21 참조).

 그리스도와 흑암의 군대 사이에 있을 최후의 쟁투를 묘사함에 있어, 이 모든 것들은 요한 이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로부터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기록하였음을 시사한다. 아마겟돈의 이름은 상징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것은 팔레스타인이나 그 외의 지리적 장소가 아닌 세계적인 최후의 영적 투쟁을 가리킨다. 이 싸움에서 사단적 삼위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군대에 의하여 총체적이고 최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다.
(주해)
요한계시록 16:12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여섯째 천사가 그의 대접을 큰 강 유프라테스에 쏟아 붓는다. 그리하여 그 강물은 말라버렸다. 유프라테스의 상징적 고갈로 하나님의 마지막 백성을 압제하는 종말적 바벨론은 붕괴된다. 이 비유적 표현은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 원수인 고대 바벨론의 멸망에서 전적으로 끌어온 것이다. 한스 라론델의 말처럼, “바벨론의 장래 멸망은 그것의 운명적 모형으로서 고대 바벨론의 멸망에 의하여 투시되어 있다. 본질적인 신학적 내용은 그대로 있지만, 민족적 국지적 제한이 우주적 세계적 차원에 의하여 제거된다.18)

 고대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그 압제자들로부터 구원하시고 속박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어 본토로 데려오기를 원하셨다(렘 50:33-34). 그러므로 유프라테스 강의 마름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였다.19) 유프라테스 강의 갑작스런 마름으로 고대 바벨론이 망하게 되었듯이(사 44:27-28; 렘 50:35-38; 51:36-37), “큰 강 유프라테스의 상징적 마름”은 종말적 바벨론을 몰락시키기 위한 예비 단계다. 이러한 개념은 “종말적 바벨론의 확실한 몰락”을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보장한다.20) 고대 바벨론의 몰락이 예언의 성취였듯이, 종말적 바벨론도 몰락할 것이다.

 계시자 요한은 이 곳의 유프라테스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분명히 한다. 후에 그는 17장 15절에서 종말적 바벨론이 거주하는 유프라테스 강은(17:1; 렘 51:13 참조) 세계의 국가적 권세들, 즉 종말적 바벨론을 섬기게 될 ‘백성, 무리, 열국, 방언’ 등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계 17:18). 그러므로 유프라테스 강은 세상의 백성과 “마지막 때에 바벨론의 종교적 권세를 지원할 국가적 권세”를 대표한다.21) 따라서 유프라테스 강의 상징적 마름은 종말적 바벨론을 섬기는 세속 권력들과 세계의 국가들이 이 종교 체제를 위한 지원을 중단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

 불행히도, 요한은 무엇이 세속 세력으로 하여금 바벨론에 대한 그들의 동맹을 철회하게 하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다(계 17:15-16 참조). 그러나 여 섯째 재앙을 위한 준비로서 어떤 상황이 표면화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세 천사의 영원한 복음 선포는 분명히 여섯째 재앙을 위한 길을 예비한다. 그러나 세속 세력이 그 태도를 급격히 바꾼 것은 분명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의 공포로부터 추종자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바벨론의 무능력을 깨달은 결과에서 오는 것임에 틀림없다. 땅의 민족들은 자신도 보호하지 못하는 바벨론의 무능력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사단의 권세의 보좌까지도 여러 재앙을 받기 때문이다(계 16:10-11), 한편,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뿐만 아니라 분명 재앙의 해를 받지 않는다. 환멸을 느낀 국가들은 연합하여 바벨론에 대한 그들의 지원을 철회할 것이며, 그 지원은 증오로 변하여 바벨론을 완전히 파멸시킬 것이다(계 17:16-17 참조), 유프라테스의 고갈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벨론의 붕괴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유프라테스의 고갈은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을 예비한다. 그리스도(만왕의 왕, 만주의 주)와 그분의 군대, 즉 성도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은 진실한” 자들(계 17:14), 또한 왕들과 제사장들인(계 1:6; 5:10) 그들이 사단적 삼위의 지도를 받는 세상의 동맹체들을 대항하여 싸울 것이라고 말한 곳은 바로 여기다. 즉, 이들은 마지막 때 사단 자신의 지휘를 받는 악한 자들의 동맹체에 직접적으로 대항하여 싸울 준비가 된 성도들의 동맹체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단 12:1)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 사는 자기 백성을 돕기 위하여 오셔서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신다.

 요한계시록 16장 12절은 저 유명한 바사 사람 고레스와 그의 연합군이 고대 바벨론을 정복 한 사건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사야는 고레스를 하나님의 메시야로(사 45:1), ‘동방에서 오는’ 자로 지칭한다(사 41:25; 41:2; 46:11 참조), 유프라테스 강이 마름으로 고레스와 그의 군대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압제자인 고대 바벨론을 멸망시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포로의 신세에서 구출되어 본토로 돌아가게 되었다(사 45:13; 렘 50:33-38; 51:36-37), 요한은 잘 알려진 이 사건을 그리스도와 사단 간에 있을 최후의 전쟁 준비를 예증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요한계시록은 고레스의 바벨론 함락과 연 이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하나의 보증으로 삼는다. 즉, 종말적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제공함에 있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군대가 행할 역할에 대한 보증이다(계 19:1-19). 22)
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요한계시록 16: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요한은 이제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종말적 백성을 대항하여 최후의 전쟁을 벌이기 위하여 정렬해 있는 군대로 향하게 한다. 그는 사단적 삼위, 곧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세 더러운 영을 본다. 이 곳에서는 요한계시록 13 장 11-17절에 등장했던 땅의 짐승에 대하여 백성을 오도하는 기만적 인물인 거짓 선지자라는 새로운 호칭이 소개된다. 성경에서 이것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주요 특징들이다. H. B. 스위트 (Swete)는 거짓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마음을 그릇 해석하는” 자들이며, “참 종교에게는 이들 보다 더 나쁜 원수가 없고, 사단에게는 이들보다 더 좋은 동맹이 없다”고 묘사한다.23) 거짓 선지자로서 땅의 짐승은 백성을 미혹하여 하나님 대신 사단적 삼위 편에 서게 하고 그들을 경배하게 한다. 이전에 결코 대면해 보지 못했던 규모의 격렬한 마귀의 활동들이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있었던 것처럼, 지상 역사의 마지막에도 그러할 것이다.24) 감람산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종말의 때가 다가오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막 13:22; 마 24:24; 벧후 2:1 참조)고 하셨다.

 사단적 삼위의 입에서 나오는 세 더러운 영은 개구리를 닮았다. 깨끗지 못한 동물로서 개구리는 부정(不淨)함을 대표한다. 부정함은 진실로 종말적 바벨론(사단적 삼위를 지칭하는 이 름)의 특징이다. 바벨론은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계 17:4).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이다(계 18:2). 개구리 모양으로 나타나는 더러운 영은 애굽의 개구리 재앙을 상기시킨다(출 8:1-15). 애굽의 개구리 재앙과 관련하여 특별히 의미 있는 것은, 이 개구리 재앙은 그들의 기만적 기교를 통하여 모세의 이적들을 모방한 바로의 술사들이 그들의 능력으로 술수를 부릴 수 있었던 마지막 재앙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바로와 애굽인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였다.25) 다시 말하면, 개구리들은 술사들이 바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게 하고, 모세를 통한 그분의 기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마지막 기만이었다. 여섯째 재앙에 등장하는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은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위조하려는 사단의 마지막 시도다. 왜냐하면 세 더러운 영들은 요한계시록 14장의 세 천사에 대한 악한 대응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기별은 세 천사가 선포한 경고의 기별과는 정반대의 기별이다.

 개구리 같은 악령들은 사단적 삼위의 입에서 나온다. 이는 악령들이 사단의 강력한 선전(宣傳) 대리자들로서 최후의 전쟁에서 설득력 있는 기만을 펼칠 것임을 의미한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악령들은 최후의 기만에 사단적 삼위의 ‘호흡’ 자체다. 사단은 최후의 위기에서 승리를 쟁취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는 악마적 영들이 이적을 통한 표적을 베풀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분명히 요한계시록 13장 13-14절을 상기시킨다. 이적을 통한 표적은 사단의 종말적 기만의 한 부분으로서, 그것의 목적은 참 하나님의 편보다 사단적 삼위의 편에 서도록 백성을 설득하기 위함이다.

 마지막 때 최후의 위기에서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이적을 통하여 기만하는 목적은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려고 설득하기 위함이다. 기만은 사단의 설득 방법이다(계 13:13-14; 20:7-9 참조), 이것은 아합 왕을 미혹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신 기별을 거절하게 하고 그를 전쟁으로 내몬 “거짓말 하는 영"을 생각나게 한다(왕상 22:21-23). 이 곳에서 사단적 삼위는 마귀적 세 천사를 거짓 복음과 함께 내보내는데, 이는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당국자들과 세상의 권세들이 그들 편에 서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대적하도록 설득하려는 목적이 있다. 강신술은 ‘세상을 휩쓸’ 최후의 기만의 한 부분이 될 것 같다.26)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미구에 하늘에는 이적을 행하는 마귀의 능력을 알려주는 증거로서 초자연적 무서운 광경이 나타날 것이다. 마귀의 영은 땅의 왕들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나아가 속임수로 그들을 얽어매어 하늘 정부를 대적하는 그의 마지막 투쟁에 사단과 연합하도록 그들을 강요할 것이다. 그 악한 영들로 말미암아 통치자들과 백성은 다 같이 속을 것이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리스도라고 자칭할 것이며, 구주께 속한 칭호와 예배를 요구할 것이다. 그들은 병을 고치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고 성경의 증거와 반대되는 계시를 하늘로부터 받았노라고 공언할 것이다.27)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최후의 전쟁을 대비한 대단한 준비와 회집에 관한 이 그림 같은 묘사의 중간에, 요한은 준비하여 속지 말라고 당신의 백성에게 진지하게 호소하시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불현듯이 삽입한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여기에 언급된 예수님의 임하심은 최후의 쟁투와 관련이 있다. 당신의 종말적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호소는 “다가오는 종말의 실 체를 바라보면서 그들의 현재 삶을 바른 방향에 놓으라는 것이다.”28) 기만적인 설득에 의하여, 사단적 삼위는 세상의 세속적, 정치적 세력들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고레스가 고대 바벨론을 이겼듯이(참조 단 5장), 그리스도의 개입으로 종말적 바벨론을 이길 것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2-3) 예수께서는 종종 최후의 위기와 당신의 강림의 돌연성에 대하여 경고하셨다(마 24:42-44; 눅 21:34-35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역사상 이같이 매우 중요한 시기에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고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촉구하신다. 그들은 영적으로 깨어 근신하며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날이 어느 순간에도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옷을 입은 채로 경계를 서는 군인들과 같다. 예수께서는 감람산에서 하신 당신의 설교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 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 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4-36)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에는지, 밤중에는지, 닭 울때에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막 13:35-37)

 이 중요한 시점에서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특징이 될 것이다. 로버트 마운스가 말하듯이, 그들은 “비상벨이 울렸을 때, 옷을 찾을 수 없어서 벗은 채로 도망 가야 하는 군인처럼 기습 공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29) 또는 성전 문에서 졸다가 상관에게 걸려 옷은 태워지고 수치스럽게 벗은 채로 쫓겨나는 보초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계 16:15 어구 해설 참조). 그러므로 각 그리스도인은 그의 옷을 지켜 벗은 채로 다녀서 그의 수치를 보지 않게 해야 한다. 이 권고는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유사한 호소를 상기시킨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 3:18) 흰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만날 사람들의 필수 조건이다 (계 19:7-9; 마 22:11-14),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타협없는 충성과 신실함을 상징한다(계 3:4-5: 6:11; 7:9, 13-14; 19:8), 다른 한 편으로, 벌거벗음은 바벨론의 기만적 설득에 의해 그에게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계 17:2; 18:3 참조), 바벨론을 패배시키실 때, 하나님께서는 패배한 군대의 가혹한 굴욕의 표처럼(사 20:4 참조) 바벨론을 “망하게 하고 벌게 벗기”실 것이다(계 17:16). 바벨론과 타협하는 자들은 분명히 바벨론의 굴욕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자들만이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 들을 시험하는 때”에(계 3:10)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6: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요한은 마귀의 기만적 이적들이 어떤 예측이나 기대를 넘어 성공할 것임을 보여준다. 참 복음을 거절함으로 사람들은 “억제하기 힘든 강력한 미혹으로 다가오는 거짓을 믿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놀라운 이적’이 수반될 것이다(살후 2:9-12 참조).30) 사단은 세상의 종교적, 세속적 권세들을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므깃도의 산)으로 모이도록 설득할 수 있다. 브루스 메츠거(Bruece M. Metzger)는 “고대에 결정적인 전투들이 빈번하게 벌어졌던” 므깃도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삿 5:19-21; 왕하 9:27; 23:29), “요한은 선과 악의 군대들 사이에서 일어날 최후의 쟁투, 즉 악이 무기에 의해 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19:13) 패할 전쟁을 상징하기 위하여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고 정확히 지적하였다.31) 종교적, 세속적 세력들은 사단적 삼위의 지도하에 하나의 군대로 조직되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의 전쟁을 위하여 모두 연합한다. 이것은 시편 2편 2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아마겟돈 전쟁은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 간에 벌어진 갈멜산의 유명한 싸움을 반향한다(왕상 18장), 영원히 해결되어야 할 갈멜산의 쟁점은 참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 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동일한 문제가 아마겟돈이라는 대 결전에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즉, 따라야 하고 경배해야 할 대상이 참된 삼위 하나님인가 아니면 가짜인 사단적 삼위인가? 그 전쟁은 마침내 사단이 처음에 제기하였던 쟁점을 해결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가 우주의 합법적인 통치자인가? 이것은 아마겟돈이라는 최후 전쟁이 군사적인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 즉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전쟁임을 암시한다. 아마겟돈 전쟁의 결론은 엘리야 당시에 갈멜산에 운집 한 백성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라고 인정한(왕상 18:21) 갈멜산의 쟁투와 같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6장 12-16절은 실제적인 전쟁이 아닌, 다만 반역한 인간의 종교적 및 세속적 세력들의 아마겟돈 준비와 아마겟돈으로의 대 회집을 묘사한다. 여섯째 재앙 다음에는 실제적인 싸움이 있는데, 요한계시록 16장 17절-19장 21절에 나온다. 후에 요한은 성도들로 구성된 자기 군대에 둘러싸여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하늘에서 오시는 그리스도와 “전쟁을 하기 위해 모여든 짐승과 땅의 왕들과 그들의 군대”를 본다(계 19:19; 17:14 참조), 전쟁은 진실로 합법적인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분께서(계 19:16) 짐승과 그의 군대를 완전히 패배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일곱째 재앙 (16:17-21)
 본 단원은 마지막 일곱 재앙에 대한 묵시를 결론짓는다. 일곱째 재앙과 함께 독자들은 아마겟돈 전쟁 시작점으로 이끌린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6:17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성전.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늘 성전(헬, 나오스)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11장 1, 19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보좌.
 요한계시록 4장 2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6:18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지진.
 이 지진은 분명히 이전에 여섯째 인(계 6:12)을 뗄 때 언급된 지진과는 다 른 지진이다. 요한계시록 6장 12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6: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세 갈래.
 요한계시록 8장 7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큰 성 바벨론.
 요한계시록 14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진노의 포도주 잔.
 요한계시록 14장 10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6:21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구약에서 우박은 종종 하나님의 심판의 무기다. 애굽에 내린 일곱째 재앙의 파괴적인 우박은 그 땅을 초토화시켰다(출 9:24-25). 여호수아가 지휘한 전투에서 우박은 아모리의 다섯 왕을 친 하나님의 무기였는데, 칼에 죽은 사람보다 우박에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수 10:11).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곡과 마곡에게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겔 38:22)을 쏟으실 것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렇게 질문하셨다.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욥 38:22, 23) 이사야와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불신실한 자들을 심판하실 때 쏟으실 비와 큰 우박에 대하여 말한다(사 28:2; 30:30; 겔 13:10-14). 일곱째 대접 재앙때 내리는 우박 하나는 그 중수가 약 ‘한 달란트’나 되었다. 한 달란트의 정확한 무게는 확실하지 않아 ‘사람과 시대에 따라’ 달랐다. 그 무게는 오십에서 일백 파운드 사이였을 것이다. 일곱째 재앙의 우박은 분명 엄청나게 컸으며 그 결과, 파괴력이 대단하였다.
심히 큼이러라.
 일곱째 재앙의 가혹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 서는 사용하지 않은 헬라어 스포드라(sphodra ‘심히’, ‘매우’)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주해)
요한계시록 16:17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요한계시록 16:18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일곱째 재앙은 바로 하나님의 면전에서부터 시작된다. 일곱 천사들 중 마지막 천사가 자신의 대접을 공기 중에 쏟는다. 그 순간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성전에서 나온 큰 음성이 일곱 천사들에게 그들의 대접을 쏟으라고 명령한 요한계시록 16 장 1절을 상기시킨다. 그 음성은 하늘의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서부터 나온다(계 4-5장 참조), 요한계시록에서 성전과 보좌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보좌는 우주의 통제소다. 그것은 하나님의 바로 면전을 의미하며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주권적 권위를 뜻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사단의 보좌(계 2:13; 13:2) 및 짐승의 보좌(계 16:10)와 대립해 있다. 이 음성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음성이 이같이 선언하신다. 되었다. 이것은 사단에 대한 승리와 종말적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갈바리의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의 반복이다(요 19:30).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그 동일한 음성이 지상 역사의 결말과 사단과 흑암의 세력들에 대한 최후의 승리를 선언한다. 한번 더 이 음성은 요한계시록에서 들려질 것이다(21:6). 그것은 죄의 도말과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의 영광스러운 출발을 알릴 것이다.

 그 순간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현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보좌와 연관되어 있다(계 4:5; 8:5; 11:19 참조). 게다가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다. 구약에서 지진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즉 여호와의 날로 지칭된 그 날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요한계시록 16: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격렬한 지진이 큰 성을 깨뜨려 세 갈래로 나눈다. ‘큰 성’은 바벨론을 일컫는다(계 17:18; 18:10 참조), 요한계시록에서 사단의 왕국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말적 바벨론은 사단적 삼위의 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때 바벨론은 용, 바다 짐승, 그리고 땅의 짐승의 세 부분으로 갈라진다. 사단적 삼위의 연합이 파쇄된다. 바벨론이 갈라진 후, 만국의 성들이 무너졌다. 요한계시록에서 만국은 종말적 바벨론을 지원하였고, 땅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좌절시켰던 세상의 정치적, 세속적 권세들을 의미한다. 종말적 바벨론의 붕괴는 그 권세들의 피할 수 없는 몰락으로 이어진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이것은 요한계시록 18장 5-6절을 기대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죄를 기억하셔서, “그녀가 섞은 잔”으로 그녀를 벌하시고, 그녀를 위하여 두 배로 섞으신다. 그것은 또한, 짐승과 그의 우상을 경배하고 그 표를 받는 자들은 “그의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고 경고하는 요한계시록 14장 10절을 생각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였던 바벨론이(계 14:8; 7:2; 18:3)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는 장면을 본다. 요한계시록 14장 19절은 바벨론과 또한 그와 한편이 되기로 선택한 모든 자들의 위에 쏟아질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6: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요한계시록 16:21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격렬한 지진이 모든 섬과 산들을 가라앉힌다. 이것은 여섯째 인을 뗄 때, “모든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겨진 장면을 연상시킨다(계 6:14), 히브리서 저자는 “진동치 아니하는 것”, 즉 하나님의 왕국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피조계가 최후로 흔들릴 것을 지적하였다(히 12:26-28). 마지막으로 무게가 약 한 달란트 되는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에게 내렸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에서 끌어온 하나님의 또 다른 심판의 양상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멸하시기 위해 우박을 보내셨듯이(수 10:11; 겔 38:22 참조), 이 경우에도 우리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에게 내리는, 섞인 것이 없는 최후의 심판을 목격한다.

 그러나 이 지극히 큰 우박들도 악인들의 태도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우박을 맞는 자들은 우박 재앙을 인하여 하나님을 비방하였는데, 이는 그 재앙이 심히 컸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6장에서 반복되는 주제다. 마지막 재앙을 당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하여 회개하기를 거부함으로 응수한다(16:9, 11, 21). 이는 유예 기간이 끝났고, 더 이상 중보가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해할 만하다(계 15:8 참조). 종말이 이르렀다. 분명한 구분선이 하나님을 따른 자들과 그분을 반대한 자들 사이에 그어졌다. 더 이상 회개의 기회는 없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돌이킬 수 없다. 여섯째 인의 장면에서, 그들 자신들은 “그의 진노의 큰 날”(계 6:16)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심히 큰 재앙’조차도 하 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바꿀 수 없었으며, 그분에게로 돌아오게 할 수 없었다.
15:1-16:21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15-16장의 목적은 “당신의 신실한 백성의 승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전에 정해 놓으신 계획을 드러내는” 것이다.34)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일곱 재앙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멸하려는 종말적 바벨론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응답이다. 15-16장은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을 위한 그분의 계획을 던져버린 결과로서 세상이 거두게 될 결과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것을 어기는 자들에게 파멸을 몰고 온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땅을 파멸시키고 있던 자들은 그들 자신의 파멸을 경험할 것이다(계 11:18). 그러나 비록 요한계시록이 일련의 두려운 사건들로 종말을 묘사하고 있을지라도, 폴린은 “이 사건들은 인간을 세심하게 돌보시는 한 분, 즉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죽고자 하셨던 분의 통제 하에 있다”고 언급한다(계 5:5-12).35)

 일곱 재앙의 절정은 아마겟돈 전쟁이다. 라론델이 지적하듯이, “아마겟돈은 바벨론의 압제자들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이스라엘의 울부짖음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다.”36) 아마겟돈 전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의 세력들이 마침내 하나님의 고난받는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의 종국을 맞게 될 것임을 보증한다(계 6:9-10 참조), 최후의 싸움을 위한 준비가 여섯째 재앙의 장면에 묘사되어 있는 반면, 전쟁 자체는 요한계시록 16장 17절-19장 21절에 기술되어 있다.

 아마겟돈 전쟁의 참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 나오는 막간이다.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대단한 준비를 그림같이 묘사하는 중간에, 그리고 최후의 전 쟁을 묘사하기 직전에, 요한은 사전 경고로 당신의 교회에 보내시는 예수님의 호소를 삽입한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경고가 삽입된 목적은 최후의 기만에 직면할 하나님의 백성에게 확고한 보증을 주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아마겟돈 전쟁의 한 복판에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최후 위기의 때 절정의 사건은 예수의 재림이라는 사실이다. 영광과 위엄 중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대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37) 예수님은 영적으로 자신들을 준비하며, 이 세상 역사에 있을 중요한 사건을 대비해 준비하며 또 충성하라고 촉구하신다.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최후의 전쟁 준비를 위하여 그 전쟁의 참 성격을 이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 마지막 때에 사는 당신의 백성에게 하신 경고는, 그들이 장차 연루될 최후의 전쟁의 참 성격은 정치적이거나 군사적 인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이며 영적인 전쟁이 될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경제적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전쟁이 아니다. 한스 라론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는 동떨어진, 순전히 세속적 성격의 전쟁을 예측하는 것들은 구약의 언약 예언들이나 신약의 아마겟돈 전쟁의 한 부분이 아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나라들 간에 있는 세속적, 정치적 싸움이 결코 아니다.”38) 아마겟돈은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의 마음과 지성을 점유하기 위한 전쟁이다.”39) 바울은 그리스도인 전쟁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3-5)

 요한계시록은 최후의 전쟁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적,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 사이에 있을 우주적 전쟁의 한 부분으로 묘사한다. 아마겟돈 전쟁의 선동자는 하늘에서 전쟁을 일으킨 바로 사단 자신이다. 그는 하늘에서 패배하였으며, 계속적인 좌절 가운데 분노하여 “여자와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 키는 자들”(계 12:17)에게로 갔다. 아마겟돈 전쟁은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고 땅 위에 하나님의 왕국을 서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마지막 시도와 그의 확고한 결심을 대표하는 것이다. 바울은 마지막 때 사단의 활동에는 설득이 포함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의 때가 곧 우리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경험하고 있지 못한 경험, 즉 사람들이 얻기를 너무도 게을리 하는 한 가지 경험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실제로 당하는 환난이 가벼운 것이 상례이지만, 우리 앞에 있는 위기는 그렇지 않다. 가장 자세하게 묘사하여도 그 시련의 크기를 여실히 표현할 수 없다. 그 환난의 때에 각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40)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적 식별력이 필요한데, 이는 그들이 최후의 위기를 직면할 때 당할 기만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아마겟돈 전쟁은 땅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아니면 사단에게 충성을 해야 하는 전쟁이다. 갈멜산에서 그러하였듯이, 궁극적인 쟁점은 누가 하나님이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갈멜산에서 행하신 일을 최후의 전쟁에서 한 번 더 행하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압제하는 자들을 누르고 개선하실 것이다. 그러나 라론델이 말하듯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히 바벨론의 멸망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땅 위에 영원한 평화와 공의로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41)

주(註) ——————
1. Beale, 784. 
2. Mounce, 286. 
3. Beasley-Murray, 233. 
4.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20. 
5. 상게서, 2:27. 
6. 상게서, 2:121. 
7. Morris, 185. 
8. LaRondelle, Chariots of Salvation, 115. 
9. Herodotus, History 1.191. trans. George Rawlinson.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Chicago:Encyclopaedia Britanica, 1952), 6:43 참조.
10. 고레스 원통은 고레스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바벨론을 정복했다고 기술한다. “아무런 전투도 없이, 그(마르둑 신)는 리고레스를 자신의 성 바벨론으로 들어가게 하여 바벨론에 어떠한 해도 입지 않게 하였다.”(J. B. Pri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3d ed. Princeton, 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315) 이 주제에 대하여 William H. Shea의 글을 참조하라. “The Location and Significance of Armageddon in Rev 16:16,”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18(1980), 157-158.
11. LaRondelle, Chariots of Salvation, 116. 
12. 상게서, 120; idem, The Good News about Armageddon, 24-25, 120-121. 
13. LaRondelle, “Contextual Approach to the Seven Last Plagues,” 149. 
14. Maxwell, 443. 
15. Bruce, 657; 참조 Mishnah Middoth 2. 1.
16. Shea, “The Location and Significance of Armageddon” 160. 
17. 상게서, 161. 
18. Hans K. LaRondelle, “Armageddon: Six and Seventh Plagues” in Symposium on Revelation, Book 2,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7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384. 
19. LaRondelle, The Good News about Armageddon, 16. 
20. LaRondelle, Chariots of Salvation, 119. 
21.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133. 
22.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4:265. 
23. Swete, 207. 
24. Desmond Ford, 2:571. 
25. Beale, 832. 
26. Desmond Ford, 571. 
27. White, The Great Controversy, 624. 
28. Boring, Revelation, 178. 
29. Mounce, 301. 
30, Desimond Ford, 571.
31. Metzger, Breaking the Code, 84. 
32. Mounce, 304, n. 40. 
33. Beale, 845. 34.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390. 
35.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149. 
36. LaRondelle, Chariots of Salvation, 144. 
37. Ladd, 214. 
38. LaRondelle, “Armageddon: Sixth and Seventh Plagues” 390. 
39.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136. 
40. White, The Great Controversy, 622. 
41. LaRondelle, Chariots of Salvation, 121.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부가적인 해석은, Hans K. LaRondelle, Chariots of Salvation과 “Armageddon: Sixth and Seventh Plagues"를 참조하라. 최후의 전쟁이 갖는 중요성과 그 의미를 보기 위해서는 Jon Paulien, What the Bible Says about the End-Time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94), 131-150; C, Mervyn Maxwell, The Message of Revelation, God Cares 2(Boise, ID: Pacific Press, 1985), 428-451과 Hans K. LaRondelle, The Good News about Armageddon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90)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