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8부 제단으로의 초청 제44장 대속죄일의 심판은 헌신을 요구한다
 주님은 우리를 심연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얼굴을 진흙에서 건져주시고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나게 하실 것이다(단 12:3). (405.1)
 만일 당신이 환란의 때와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되는 때가 걱정된다면(계 22:11)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세상 끝 날까지”는 심판의 때와 환란의 때를 모두 포함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을 구원의 때까지 이른다. (405.2)
 만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꾸고 우리 품성을 죄로부터 깨끗케 하기를 기대한다면 우리 모두는 실패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죄로부터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수 있으시다(유 1:24). (405.3)
 하나님께서 우리 스스로에게는 불가능한 일인 성령님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딛 3:5~7), 우리 속에 그리스도를 거하시게 하겠다고 말씀하실 때(갈 2:20), 우리는 동정녀 마리아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마리아와 같이 대답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사건들로 인해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사건들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지배아래 있기 때문이다. (405.4)
 하나님께 있어서 한 회중 전체를 “흠 없이” 하시는 일은 특별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처녀 마리아가 성령님으로 잉태하는 것과 같이 이 특별한 일들을 해 오셨다(눅 1:35).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전했을 때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었다. (405.5)
 “먼저 의사에게 가서 과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 사례가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406.1)
 우리의 역할은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쫓았”던(수 14:14) 갈렙과 같은 충성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이 가 본적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실지 모르나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믿음의 본질은 우리에게 이상한 것이 아니다. (406.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라”(계 14:12), “어린 양을 따르라”, “흠 없이 되라”(4-5절)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말씀하신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흠 없이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성장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왔다. 하나님의 마지막 때를 사는 사람들이 특별한 것은 그들이 한 무리로서 흠 없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아직 이 일을 마치지 않으셨다. (406.3)
 만일 “흠 없이” 된다는 것이 목록에 있는 어떤 사항도 위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면 나는 율법적 노력으로 하나님의 표준에 맞게 살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끝없는 사랑이다. 그것은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렘 31:33). 왜냐하면 돌비석이나 CD-ROM은 사랑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있는 법의 목록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례에 불과하다. 사랑에는 그 어떤 빠져나갈 구멍이나 비집고 나갈 틈새도 없다. (406.4)
 우리의 의로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것을 넘어서야만 한다(마 5:20).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마음의 형상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창조주이신 그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이것을 나 스스로 하려고 시도한다면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으려고 하는 것이며, 처량한 어리석음에 부주의한 신성모독을 보태는 것이다. (407.1)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나의 소망을 불완전한 인간이 세운 표준에 맞춘다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이상에 턱없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천국을 얻기 위해 그 어떤 사람과도 경쟁할 필요가 없다. 운동장에서의 경기법칙이나 시에라(Sierra)에서의 야외 스포츠 규칙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시에라 산에서 저녁 캠프파이어를 즐기고 있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407.2)
 그 중 한 사람은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곰을 보았다· 그는 “곰이 오고 있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친구는 서둘러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람이 당황해서 “너 뭐하려고 그러는 거야? 네가 곰보다 빨리 뛸 수 있다고 생각해?”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는 곰보다 더 빨리 뛸 필요는 없어.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보다 더 빨리 뛰는 것이야”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그 곰과 같은 분이 아니시다. (407.3)
 내가 품성의 완전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나의 잘못들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와 같이 바람과 파도와 같은 장애물로 혼란스러워지고 결국 물에 빠지기 시작한다(마 14:30).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께 충성하기로 생각할 때면 내 시선이 그분께 고정되기 때문에 그 그림은 바뀌게 된다. (407.4)
 그분은 나의 모본이시며, 목자이시고, 안내자이시다(벧전 2:21~25). 품성의 완전함을 포함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원하시는 곳으로 그분을 따라가는 일 뿐이기에 나는 용기를 얻는다. 품성의 완전이라는 결과는 비슷하지만 초점은 다르다. 잘 교육받은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 스스로 어떤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스스로를 낮추고, 어린 양이시며 동시에 나의 목자이며 겸손하신 어린 양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으로 나는 그분이 어디로 가시든지, 심지어 그분의 백성들의 용서를 재확인하시는 하늘 성소의 지성소까지라도 따라갈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나는 그분의 심판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시 23:1,3). 의의 길은 환란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나를 반대편에 있는 ‘상을 베푸시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4~5절). (408.1)
 “반대편.” 내 삶의 모든 것은 종이 리본이 끊어지고 바다 반대편의 미국으로 항해하던 그 운명적인 날에 영향을 받아왔다. (408.2)
 종이 리본이 끊어지는 날처럼 나의 모든 지상의 후원과 인연이 끊어질 때, 방주의 문이 닫힐 때, 예수님과 반대로 행하는 일로부터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될 때의 영향은 더욱 클 것이다. (4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