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부 록 A. 로마 세계에 있어서 행성 주간(Planetary Week)제도의 성립
 바빌로니아 종교의 영향력에 대한 대 재앙같은 이 대 탄압 박해는 아르닥세르크세스 2세(Artaxerxes H, 404-359. B.C.)가 즉위하면서 다소 경감되었다. 그는 그의 이복 동생인 소(小)키루스(Cyrus the Lesser)와 싸우면서 페르시아의 왕가의 법통을 주장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과거로부터의 전통이 중요하게 되었다. 조로아스터 이전의 우상들이 도처에 세워졌다. 다리우스 1세 이후 유일 최고의 신으로 군림해왔던 아후라-마즈다는 이제(400년 B.C.경) 여신 아나히타(Anahita)와 남신 미트라(Mithra)와 더불어 자신의 최고위 자리를 나누어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국 전역에 우상들이 즐비한 다신교적 신전들이 들어서게 되었다.52 (305.3)
 그러나 이 때에 갈데아 별신(星神) 신학의 후계자들은 아나톨리아 지역과 지중해의 연안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 아직도 동방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통파 마즈다야스니안 마기(Mazdayasnian Magi)들과 이들에 의해 자신들의 본토에서 내몰린 다이빅(daevic)파마기들의 차이점에 대한 증거는 신약성경에도 나타나 있다. 마즈다야스니안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마기들은 우상 숭배를 배격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하여 동방의 먼 곳으로부터 베들레헴으로 찾아왔던 것이다(마 2:1). 그러나 서방 세계의 근처에 살고 있는 다른 마기들은 마귀적 마술의 종사들이며(행 8:9-24; 13:6-11), 중세의 “검은 마술”도 이들의 후예들이다.53 (305.4)
 소아시아에서 가장 눈을 끌만했던 헬레니즘의 도시국가로 출현한 나라가 페르가뭄 왕국(Pergamum:263-133. B.C.)인데 이 나라에서 갈대아 신앙과 페르시아의 다이빅(daevic) 신앙의 최종적인 결합이 이루어져 비로소 헬레니즘 시대의 미트라교(Mithraism)가 등장하게 되었다. 페르가뭄 왕국의 전성시대는 아탈루스 1세(Attains, 241-197 B.C.)의 치세에 이루어졌다. 아탈루스는 로마에 중요한 봉사를 제공하면서 전설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그는 예술을 부흥시키고 동방의 갈대아 학문을 후원하였다. 그리하여 바빌로니아로부터 유명한 점성술사인 수디네스(Sudines:바빌로니아에서는 Suiddina)를 초빙하였다. 수디네스는 궁정의 고문관으로서 왕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점을 쳤다. 특히 왕이 갈라티아인들과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B.C. 240년경에 그의 점치는 봉사가 두드러졌었다. 희랍어를 사용하는 점성술 연구자들에게 이 갈데아 점성술사가 학식 있는 교사로서 얼마나 중요시되었는가 하는 사실은 약 400년 후(A.D. 154-174)에 “수학자” 메티우스 발렌스(Vettius Valens)에 의해 이 갈대아 점성술사의 태음력 서판이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54 페르가뭄 왕국에 왕조적 전통으로 남아있는 왕실의 이 같은 문화적 후견활동의 영향으로 후계 국왕인 유메네스 2세(Eumenes I, 197-159 B.C.)의 치하에서 위대한 도서관이 건립되었다. 비치된 장서의 숫자에 있어서는 오직 당시 세계 최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만이 페르가뭄의 도서관을 능가했을 뿐이다. (306.1)
 유메네스 2세의 시대에 서방 미트라교가 처음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락탄티우스 플라시두스(Lactantius placidus, A.D. 300년경)에 의하면 이 종교는 페르시아인들로부터 프리기아인들(소아시아의 본토인들)에게 전승되고 다시 프리기아인들로부터 로마인들에게 전승되었다.55 헬레니즘 시대의 미트라교(Hellenistic Mithraism)에 관하여 알려진 모든 것에는 이러한 주장이 담겨 있다. 미트라신(神)과 그의 동료들이 프리기아인들의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은 로마제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것은 이 신이 최초로 출현한 곳이 소아시아라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트라를 숭배하기 위해 조성한 인조 동굴의 모양은 이러한 결론을 더욱 보강해 주고 있다. 이 동굴의 예술적인 특징은 서부 소아시아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56 이러한 여러 증거들에 의하면 서방 미트라교의 발생지역과 년대가 상당히 좁혀지고 결국 예술과 동방 학문의 후견자였던 페르가뭄을 그 발생지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306.2)
 서양 미트라 신(神)의 본성은 흥미롭다. 미트라 신(神)은 물론 페르시아의 신인데 이 신을 위한 예식에 포함되어있는 떠오르는 별 종교의 예식은 갈데아의 것이다. 이 신비 의식의 교사(선생)를 마구스(Magus)라 일컬었는데 즉 이들은 페르시아의 사제들이다. 그러나 이 마구스는 “바빌로니아의 책”이라고 일컬어지는 두루마리 경전을 가지고 가르쳤다.57 상당수의 고전들은 페르시아의 마기들과 갈데아 점성술가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이 제설혼합주의적 신앙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로마에서 나온 후기의 한 라틴 비문(A.D. 377)은 이 신비의 교사를 “미트라의 페르시아 신전의 바빌로니아 사제”라고 말함으로써 미트라종교의 혼합적 성격을 더욱 구체적으로 압축하고 있다.58 (306.3)
 일반적으로 미트라교의 급속한 확산에 특별히 영향력을 끼친 두 가지 요소가 지적되고 있다. 그 첫째는 미트라교가 확산되기 이전에 권위있는 여러 토착 종교들이 파산되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로마가 종교적으로 소아시아에 의존하는 정도가 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트라교는 언제 로마로 도입되었으며 로마에 미트라교가 들어 온 이후에 이 종교는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 (307.1)
 플루타르크(Plutarck)의 보고에 따르면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Pompey)가 B.C. 67년에 길리기아 해안(소아시아의 동남쪽 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하였을 때 미트라를 신봉하는 일부 죄수들도 로마로 함께 데려왔다. 즉 이탈리아에 미트라교를 소개한 자들은 바로 이들 길리기아의 해적들이었던 것이다(Vita Pompei 24). 두 개의 고고학적 발굴이 이 보고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 첫번째 발굴 결과는 B.C. 62년에 안티오쿠스 1세 에파파네스에 의해 공인된 바위 부조(浮彫)들이다. 이것은 폼페우스의 당대에 길리기아의 동쪽 지역에 헬레니즘시대의 점성술적인 미트라교가 대단히 중요시되었다는 증거이다. 콤마게네(Commagene)의 니므루드 다그(Nimrud Dagh)의 정상에서 발견된 바위 비명(碑銘)과 부조(浮彫)들은 미트라교에서 말하는 “사자”(Lion)의 계급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안티오쿠스 왕과 악수하는 미트라신(神)을 조각으로 묘사하고 있다.59 (307.2)
 또 다른 고고학 발굴 결과는 한 세기 뒤에 이탈리아에서 나왔다. 폼페이에서 나온 한 그림(graffito)은 그 년대가 A.D. 62년 전의 것인데 이른바 로타스-사토르(ROTAS-SATOR) 정사각형이라는 미트라의 마술 기장(記章)을 스케치하고 있다. 라틴 알파벳을 이용한 이 비법의 사각형은 젊은 사람들의 군사훈련을 위해 따로 구별된 구역인 유베네스(luvenes)의 영역에서 발견되었다.60 미트라교(Mithraism)가 일세기 중반에 이탈리아에 뿌리를 내렸다는 증거인 것이다. 로마의 병사들 사이에 미트라교 신자들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미트라교는 악과 어둠의 세력에 맞서는 싸움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군대의 종교로서의 우위를 누리게 되었다. 트라야누스 황제(A.D. 98-117) 시대부터 로마군대의 깃발이 꽂히는 곳마다 미트라교가 우세하기 시작했다.61 (307.3)
 A.D. 1세기에 미트라교가 로마 사회에 끼친 영향은 스타티우스(Statius)에 의해서도 지적되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미트라 신이 황소를 죽이는 신비의 의식을 묘사한 그림인 타우록토누우스 미트라(Tauroctonous Mithra)를 보았다고 말했다.62 기독교 복음의 사법적인 장점에 대해 공식적으로 귀를 기울였던(행 25:12; 딤후 4:16) 최초의 황제라는 네로(Nero)는 또한 미트라의 호소를 인정한 최초의 황제였다.63 A.D. 66년에 아르메니아의 국왕이며 미트라교의 사제이기도 한 티리다테스 1세(Tiridates 1)가 그를 수행하는 마기와 함께 네로 황제를 찾아 왔을 때 네로는 이 동방의 군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나는 나의 신인 그대에게, 미트라에게 경배하듯 그대를 경배하기 위해 찾아왔다.”64 트리다테스는 네로를 미트라 신앙으로 입문 시켰다.65 그리고 네로는 이러한 찬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트리다테스에게 아르메니아의 통치자의 자리를 확인하였다. (307.4)
 기독교와 미트라교의 영향력은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A.D. 306-337)에게도 미쳤다. 이 때에 빛의 신(神)인 미트라는 대중들 사이에 로마의 국가 종교인 불패의 태양신(헬리오스, 솔 인빅투스, Hilios, Sol Inuictus)과 동일시 되었다.66 행성 주간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사실은 미트라가 황제 가족의 신(神)의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조카로서 후에 황제가 되어 기독교를 배교한 율리우스(Julian the Apostate)가 미트라 신(神)을 수호신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설명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A.D. 312년에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황제는 계속적으로 미트라 숭배의 형식을 통해 기독교의 신앙을 이해하였다. 그가 이교 신학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었다는 한 실례는 그와 동시대의 교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의 논평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개종한 것으로 알려진 콘스탄티누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모든 병사들에게 주의 날〈일요일〉을 존경하도록 열렬히 가르쳤다. 주의 날은 또 빛의 날, 태양의 날로 일컬어진다.”67 “빛의 날 즉 태양의 날”이라는 관용구는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인가! 미트라를 빛의 신이며 태양 신 솔의 자식으로 만든 것은 로마의 군대였다. 각 행성은 특정한 날의 “주(主)”가 되었지만 “빛과 태양의 날의” 주인(主人)인 미트라는 누구인가? (308.1)
 A.D. 321년 3월 7일에 콘스탄티누스는 그 유명한 “일요일 법”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모든 판사들, 도시의 백성들과 장인들은 태양의 존경스러운 날에 쉬어야 한다. 그러나 농촌 사람들은 방해받지 말고 농업에 종사해도 좋다.”68 이 칙령의 반포와 더불어 태양의 날은 기독교 세계를 통치한 사람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그 이후 행성신들의 주간은 “신성화된” 일곱시간 단위로 다시 나타났으며 서방 세계는 이 제도를 상속하였다. (3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