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부 록 A. 로마 세계에 있어서 행성 주간(Planetary Week)제도의 성립
 목성(Jupiter)- 금성(Venus)- 토성(Saturn)- 수성(Mercurry)- 화성(Mars)- 달- 태양으로 형성되는 바빌로니아 별 신(神)들의 계급조직은 빠르면 B.C 300년경에, 늦으면 히파르쿠스(Hipparechus)의 시대인 B.C 150년경에 희랍의 수학적 계산에 의해 재 배치되었다. 희랍인들이 자신의 구면 삼각법(Spherical Trigomometry)과 천문학적 관찰들을 통해서 여덟 천구(天球)의 질서를 세웠다. 즉 여덟 개의 행성들은 각각 그들이 지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가에 따라 지구와의 계급적인 서열 관계가 자리메김 되었다. (299.2)
 첫 번째 자리는 우주의 경계를 정하는 항성(恒星)들이 차지했다. 우주의 가장 바깥쪽에 형성된 이 경계선 안에 일곱 개 행성의 천구(天球)들이 거리 순으로 차례차례 자리 메김을 했다. 토성, 목성, 화성, 태양, 금성, 수성, 달의 순서였다. 새로 구성된 이 희랍식 “천구”들의 순서는 태양을 중간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태양의 위쪽에 위치한 세 개의 행성은 남성적이며 습기가 적은(토성을 제외하여) 별신들로 인식되었으며 태양의 아래쪽에 위치한 세 개의 행성은 여성적이며(양성 체로 간주된 수성을 제외하고) 습기가 많은 별신들로 간주되었다.29 (299.3)
 바빌로니아의 황도 12궁적인 역법은 이때에 수립된 새로운 질서에 의해 확인되었다. 태양은 겨울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하지(夏至: Summer Solstice) 에 이르고 그 다음에는 황도 12궁중의 물병자리(Aquarius)로 기울어졌다가 사자궁(Leo)의 자리로 내려간다. 고대의 동지(冬至:Winter solstice)달인 물병자리(Aquarius, 보병궁: 1월 20일부터 2월 18일 까지)는 행성 중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하는 토성의 몫이 되었다. 그다음 달인 쌍어궁(Pisces:2월 19일부터 3월 20일까지)자리는 지구에서 두 번째로 먼 거리에 위치하는 목성(Jupiter)에게 할당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자리인 목양궁(Aries:3월 21일부터 4월 19일까지)의 자리는 화성(Mars)에 할당되었다. 태양의 연례적인 순환은 “큰 날”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일 년의 다음 번 주기에 있어서도 그 해(year)의 정오의 자리는 태양의 몫으로 비어두어야 했다. (299.4)
 한 해의 정오의 자리는 천정(天頂)의 자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자리의 정반대의 자리를 가르킨다. 따라서 네 번째의 달인 금우궁(황소자리, Taurus:4월 20일부터 5월 20일까지)자리는 태양에 할당되지 않고(순서 상으로는 태양의 자리인데 태양을 정오의 위치에 자리 메김 하기 위하여) 그 다음 차례의 행성인 금성(Venus)에게 할당하였다. 금성은 봄의 “새벽별”이다. 다섯 번째의 달인 쌍자 궁(Genin. 쌍둥이 자리:5월 21일부터 6월 21일까지) 자리는 수성(Mercury)의 몫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의 달인 게자리 궁(Cancer:6월 22일부터 7월 22일까지)은 달(Moon)의 몫이다.30 (300.1)
 이러한 서열에서 일곱 번째의 달은 사자궁(Leo:7월 23일부터 8월 22일까지)이다. 이달부터 빛의 연례적인 하강 곡선이 기울여지기 시작하여 짧은 낮의 겨울로 내려간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빛이 이 전환점으로 내려가는 자리도 태양의 몫으로 마련되었다. 이제 태양계의 남아 있는 다섯 달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차례차례 다섯 별들에게 할당 되었다. 처녀궁(Virgo, 8월 23일부터 9월 22일까지)은 수성의 차지이고 천칭궁(Libra, 저울자리:9월 23일부터 11월 22일까지)은 금성의 차지이고 천갈궁(Scorpio, 전갈자리: 10월 23일 11월 22일까지)은 화성의 몫이고 인마궁(Sagittarius 궁수자리, 11월 23일부터 12월 21일 까지)은 목성의 몫이고 마지막으로 열두 번째의 달인 마갈궁(Capricornus, 염소자리, 12월 22일부터 1월 19일까지)은 토성의 몫으로 돌아와 토성이 다시 한 번 주권자의 자리에 앉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토성은 태양 주기의 일 년 순환을 시작하고 끝내는 중추적 행성으로 나타났다(그래서 토성은 달들의 순서에서 나란히 두 번씩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토성은 헬레니즘 시대의 신이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토성 신(Saturnos-Aion)인 크로노스(Kronos)는 시간의 순환만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일년 중 낮의 길이가 제일 짧은 동지 (Winter Solstice)의 순간에 빛의 새로운 탄생을 주관하는 태고의 아버지의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있다.31 (300.2)
 점성술적인 역법의 역사에서 계속적으로 중요해진 사항은 행성들의 서열에 있어서 태양신이 영향력 있는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태양이 언제 출발하여 언제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 행성 역법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것에 의하여 어느 두 달이 각 행성에 배치되느냐가 결정되었다(단지 해와 달에게만 일년에 두 달이 아니라 한 달씩만 배당 되었다). 점성술적인 역법으로는 한 해가 동지(冬至)의 “자정”에 출발하여 봄에 “새벽”을 맞이하고 한 여름에 정오를 맞이하는 태양의 코스를 따라갔다. 이러한 관찰을 마음에 두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점성술적으로 한 해가 출발하는 시각(새해의 첫 날)이 태양의 새로운 출생이 시작되는 깊은 겨울에 해당될 것으로 잘못 판단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열두 천궁도의 달들은 태양의 능력이 크게 “고양”되는 춘분기에 봄의 “새벽”과 더불어 자신의 숫자적인 차례에 따라 시작되는 것이다.32 이와 같은 이중적인 출발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비유가 헬레니즘 시대의 천문학적인 날짜 인식에 대해서도 진실되기 때문이다. 일 년을 주기로 하는 태양의 출발 시점 즉 동지의 개념을 한 날 주기에 적용한다면 하루의 시작은 태양이 다시 태어나는 밤 자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페르시아의 점성술 학자들인 마기(Magi)들은 오래된 페르시아의 관습을 쫓아 계속해서 아침 일출(日出)부터 하루를 계산하였다.33 (300.3)
 소아시아에서 희랍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학문적인 수학의 발전과 헬레니즘의 시대에 이집트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점성술의 발전이 어떻게 서로 작용했느냐 하는 것은 그 시대 최대의 천문학자였던 히파르쿠스(Hipparchus, 190-126B.C.)의 위치와 역할에 의해 잘 예증되고 있다. 그는 소아시아에서 천체를 관측하고 수학적으로 이것을 계산하였지만 그가 소아시아의 서남쪽 해안에 인접해 있는 로데스(Rhodes) 섬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쳐갈 무렵에 발표한, 점성술에 대한 옹호를 포함하는 그의 여러 가지 발견과 주장들은 헬레니즘시대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센터라고 할 수 있었던 알렉산드리의 희랍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가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하였는지는 알렉산드리 아의 프톨레마이우스(Claudius Plolemaeus, A.D. 150년 경에 사망)의 저술들에 잘 나타나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17세기까지 점성술학의 경전으로 인정받아온「알마게스트」(Almagest)를 저술하였다. 이 책의 저자는 현대까지도 가장 중요한 점성술의 논문으로 간주되고 있는「테트라비블로스」(tetrabiblos)도 저술하였다. 그러나 주목되어야 할 사실은 희랍의 점성술의 최고봉을 대표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술들은 대부분 아시아의 희랍인이었던 히파르쿠스의 저술에 기초하였다는것이다.34 (301.1)
 진실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점성술학의 기술에 대한 최초의 교범의 하나가 작성된 것은 히파르쿠스의 당대인 B.C. 150년경의 일이었다. 이 교범의 작성자는 B.C. 6세기의 이집트의 파라오인 네케프소(Nechepso)와 그의 서기인 페토시리스(Petosiris)로 되어있다. 이 작품이 헬레니즘 시대의 학자의 것이라는 사실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자료가 B.C. 2세기에 로마에서 사용된 점성술 안내서였다는 것으로도 분명해지고 있다.35 같은 시기에 시간 단위를 측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바빌로니아와 희랍과 이집트의 방식이 서로 통합되었다. 이것은 점성학의 발전과 행성 주간의 기원에 있어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천문학자들이 하루의 한 부분들로서 주야 평분 “시간들”을 처음으로 표시한 곳은 알렉산드리아였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의 사제들은 오래 동안 밤과 낮을 열 두개의 균등한 부분으로 나누어 왔었으며 그리고 희랍인들은 이 제도를 채택했었다.36 그러나 이집트의 사제들은 전통적으로 밤-낮 전체의 순환을 이십 사개의 항구적인 단위로 나누는 방식에 익숙해 있었다. 이집트의 유서 깊은 이 방식이 결국 희랍어를 사용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이집트 방식의 시간 구분법이 알렉산드리아에 채택 되었다. 그러나 천문학자들은 아직도 갈데아의 점성술적 사고의 영향아래 있었으므로 바빌로니아의 육십진법의 계산 방식을 이집트의 시간에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각 시간은 60개의 균등한 부분으로 나뉘어 짐으로써 60분으로써 한 시간이 되었다.37 (301.2)
 이와 같이 행성 주간의 제도가 형성되기 앞서 여러 가지 필요한 요소들이 통합되었다. 이를테면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행성 신(별신)들의 개념과 희랍인들의 수학, 그리고 이집트인들의 “데칸스”(dekans 또는 시간) 개념들이 그것들이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창의적이고 독특한 문화의 소유자들인 영향력있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 곳은 위의 요소들뿐만 아니라 그 어떤 요소들보다도 더 결정적인 요소인 히브리식 주간 순환의 방식을 도입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였다. 히브리 사상가들 중에 유대교의 정통적인 방식을 벗어나서 사색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천상의 세계 중에서 토성이 다스리는 가장 높은 구체(球體)를 “옛적부터 항상 계시는 자”(단 7:22)의 천체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38 이러한 생각은 아모스 선지자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모스 선지자는 우상 숭배를 꾸짖으면서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최고의 별신으로 생각하고 있던 “기윤”을 지적하여 정죄 하였다.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암 5:26)하였다. 그런데 이 “기윤”이 갈데아와 페르시아에서는 토성의 신이었다.37 점성술적인 주간의 기초를 형성한 두 개의 기초적 요소는 이와같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 존재했던 것이다. 유대 공동체는 그들에게 고유한 일곱으로 된 시간 사이클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헬레니즘 세계의 점성술 학자들에게 더 흥미로왔던 사실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오래 전부터 그들의 “큰” 날을 토성이 지배하는 날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302.1)
 훌륭한 학자였던 로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는 A.D. 210년과 220년 사이의 어느 때로 그 연대가 추정되는 한글에서 점성술적인 주간(week)의 기원에 관하여 후세들에게 말했다. 디오에 의하면 “오늘날 모든 인류들이 사용하고 있는” 행성 주간은 이집트에서 제도화되었다. 그리고 디오 카시우스의 시대로부터 비교적 얼마 오래지 않은 시기에 고안된 제도였다. 디오가 말하고 있듯이 행성들이 날들을 지배한다는 관념은 행성들이 하루 이십사 시간들을 지배한다는 인식과 함께 발생하였다. 이 주간은 가장 높은 행성인 토성과 히브리 주간의 가장 높은 날인 안식일과 더불어 시작하며 첫 시간과 첫 날은 모두 토성에 할당되어있다. 일곱 행성들은 지구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차례로 배열되었으므로 일곱 행성들의 하나 하나는 시간에 있어서도 차례대로 그 순번에 해당하는 시간의 지배자로 할당되었다. 토성의 날의 첫째, 여덟째, 열 다섯째, 스물 둘째의 시간은 토성이 다스리는 시간이 되었다. 토요일의 순번이 끝나게 되면 스물 세 번째 시간이 목성의 몫이 되고 스물 네 번째 시간은 화성의 몫으로 떨어진다. 그 다음 날의 첫 번째 시간은 네 번째 순번인 태양의 몫이 되며 일요일은 태양의 지배에 맡겨진다. 이런 방식으로 시간의 통치자들인 행성들이 그 자신들의 위치를 회전하는 방식으로 교대하듯이 주간의 모든 날들도 그 날의 “첫째 시간을 통치하는 행성의 이름을 따랐다.”39 (302.2)
 선진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적인 점성들이 B.C. 1세기에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의 상류층이 알렉산드리아의 점성술을 수용했다는 사실은 B.C. 87년에 집정관 옥타비우스(Octavius)의 시체에서 발견된 점성술적인 그림에 의해서 예증되고 있다.40 행성 주간이 서방의 이탈리아로 파급되기 시작했던 시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 자신은 B.C. 24에 제조한 자신의 주화(Coins)들에 자신의 출생을 나타내는 12궁 성좌인 자갈 궁(Capricom, 염소자리)을 새겨넣었다.41 의심할 나위없이 행성주간의 최종적인 확산의 무대를 마련한 사람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Septimius Severus, A.D. 193-211)였다.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점성술의 열렬한 신봉자였다.42 따라서 그의 재임 중에 로마인들이 공식적으로 가장 중요한 날짜들의 년수(年數)뿐만 아니라 주간의 날 수까지 표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관습의 현존하는 자료로 최초의 것은 A.D. 205년 5월 23일의 경우이다.43 (302.3)
 이교 세계에서 이루어진 일요일 준수
 고대자료들에 의하면 일요일의 종교적인 준수를 널리 퍼뜨린 가장 중요한 매체로 한 종교를 지적하고 있다. 명성이 높은 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가 점성술과 이 점성술의 산물인 행성 주간을 양육했다고 한다면 일요일을 주간의 가장 중요한 날로 드높인 종교는 다름 아닌 미트라(Mithra)신을 신봉하는 “페르시아” 종교였다.44 북아프리카 출신의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A.D. 150-230)는 태양의 날을 존중했다는 사람에게 대답하면서 그의 시대에 태양을 위한 축제의 날이 “페르시아”의 축제일로 간주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은∙∙∙.. 태양을 우리들의 신이라고 믿고 있다. 비록 우리들은 아마포 조각에 그려져 있는 날의 구체(球體)를 예배하지 않지만(태양을 우리들의 신으로 믿는다면) 우리도 아마 페르시아 사람들로 간주될 것이다.”45 (303.1)
 초기 기독교 시대에 가장 강력한 기독교 적대자의 한 사람인 에피쿠리우스파 철학자 켈수스(Celsus, A.D. 140-180)는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신의 한 저서에서 행성을 이끄는 비유적인 “길”(road)을 설명하는 “페르시아인들의 논법과 미트라교의 입교의식”에 대하여 말했다. 지상의 일들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길은 일곱문의 사다리로 이해되었는데 이 사다리의 일곱문 하나 하나는 일곱 행성들의 하나 하나와 연관되어 있었다.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여덟번째의 출입문이 있으며 이 문은 최고의 영역인 항성들의 세계를 대표하였다.46 행성의 체현(體現)을 통하여 지상의 차원에서 천상의 차원으로 올라가는 이 단계적 질서는 태양과 빛을 신격화한 미트라가 장성하고 성장하여 점성술적인 태양력의 일년질서 안에서 자신의 절정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과정을 모방하고 있다. 태양이 자신의 출생의 자리(일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기간)로부터 행성들의 “영역들”과 12궁성좌의 표징들을 차례로 거쳐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켈수스가 말하는 행성의 사다리들도 지구로부터 가장 먼 자리에 위치하며 또 동지(冬至)를 다스리는 자인 토성으로부터 시작하여 하지(夏至, 일년 중 낮이 제일 긴)의 지배자인 태양에 이르러 진행이 끝나고 있다. 그러나 신격화된 이 빛의 성장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행성 주간을 확인하는 기능까지 하게 되었다. 사다리는 토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주간의 신들의 단계적 차례를 거꾸로 거슬러 진행함으로써 태양이 일곱번째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토성-금성-목성-수성-화성-달-해).47 (303.2)
 미트라 신의 신자들에게 태양이 얼마나 중요한 대상이냐 하는 것은 로마제국 시대의 이탈리아의 해안 도시인 오스티아(Ostia)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서도 잘 드러났다. 일곱개의 정문이 늘어서 있는 미트라 신전 안에 일곱문들이 모자이크 모양으로 성전의 통로들에 그 그림자를 내려뜨린 채 늘어서 있다. 이 광경 중에서 즉각적으로 사람의 주의를 잡아끄는 곳은 중앙에 있는 큰 문(gate)이다. 이 중앙 문의 양 옆으로 세개의 작은 정문들(portals)이 늘어서 있다. 더 안 쪽에 위치한 성소 안에는 일곱 행성들이 옆 벽면에 그려져 있다. 켈수스가 언급한 일곱문들의 경우에서처럼 겉으로 보기에도 이 문들은 행성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전의 문 중앙에 있는 큰 문의 문지방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행성들의 “공간적인” 서열에 관한 희랍인들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태양이 중앙 정문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입교자를 성전으로 인도하는 태양의 “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304.1)
 켈수스가 출입문들에 관해 설명한 묘사에 놀라울 만큼 유사한 사실들은 그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바, 일곱 세계들로 구성된 미트라 신전 안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곱 문들은 여기에서도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곱 정문들이 내부 성전의 중앙마당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여기서는 문들이 입교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즉 일곱 문은 일곱 차례의 신비 의식들이 차례로 치루어져야 하는 일곱 세계의 영역들과 관련 되어 있었다. 각각의 출입문이 죽음과 재탄생을 표시하는 일종의 변이점(變移点)으로 생각되었다는 것은 출입구의 포장 도로에 죽음을 유도하는 단도(dagger)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으로도 암시되고 있다. (304.2)
 태양의 날에 바쳐진 존경심이 테르툴리아누스와 켈수스가 “페르시아”의 신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은 부연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미트라는 페르시아의 아주 오래된 신이었지만 로마제국시대에 로마의 전역에 퍼진 헬레니즘 형태의 미트라교는 페르시아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별들을 신앙하는 신비종교의 모양을 띠고 있는 서방 세계의 미트라교는 갈데아와 아나톨리아에서 신봉된 “다이빅”(daevic)파로 일컬어지는 비 정통적인 종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조로아스터교로 발전한 이란의 정통파 미트라 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다.48 서방세계에 퍼진 미트라교는 페르시아의 마기(Magi) 승족들과 갈데아인들 사이에 이루어진 상호 교류의 결과로 최초로 나타났다. (304.3)
 이러한 현상의 첫번째 경우는 B.C. 539년에 바빌로니아 제국이 메도-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몰락할 때 발생하였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몰락과 함께 주로 농촌 지역에 살았으며 문맹이었던 페르시아의 비 정통파 마기(Magi)들은 즉각 갈데아 점성술사들의 세련된 영향력 아래 종속되었다. 갈데아의 점성술사들은 인상적인 점성술 문헌들과 여러가지 신비어린 상징물이 가득한 도시 사원들과 12궁성좌 표지들과 행성 심볼들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더 결정적인 사태는 B.C. 521년에 발생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이른바 마고포니아(Magophonia), 또는 “마기들의 학살”이라고 일컬어지는 집단 사형 명령을 내려 이란의 비종정파 점성술사들인 다이빅(Daevic)그룹의 마기(Magi)들을 하루 아침에 진멸시키려 했다.49 (304.4)
 다리우스가 힘들게 싸워야 했던 마기 사제집단은 자신들의 종교를 갈데아의 별신(M)신앙과 결합시킨 이란의 다신교 숭배자들이었다. 선지자 조로아스터의 진정한 마기들 즉 마즈다의 숭배자들(Mazdayasnians)들은 이와는 크게 대조적으로 세상에는 선한 신 아흐라 마즈다(Ahura-Mazda) 하나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정통파들은 아후라 마즈다를 어느 신들과 동등할 수 없는 초월적인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였다. 아후라 마즈다 신(神)은 너무나 위대하고 영적인 주체여서 그를 신상으로 표현하는 것 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50 (305.1)
 정통파 그룹으로부터 갈려나간 무리들인 이 다신론 신앙 그룹의 점성술가들은 B.C. 482년에 더 큰 타격을 받았다. 다리우스를 계승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주권자가 된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1)는 이 분파의 예배 곧 다이바스(daevas, 또는 demons)에 대한 예배행위를 금지시켰다. 제국의 이같은 금지 조치로써 모든 갈데아 신전들이 폐지되었다. 바벨론의 위용을 대표했던 에사길라(Esagila) 신전이 이 때에 허물어졌으며 높이 18피트, 무게 800파운드에 달하는 말둑신의 금 신상도 철거되어 용광로에서 녹아 금괴로 변하고 말았다.51 (3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