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 부 왕의 인격체 (1:1-4:16) 2. 봉사를 위한 왕의 준비 (3:1-4:16)
 세 공관복음서 모두는 예수의 시험을 그의 침례와 아들 되심에 대한 하나님의 확인 직후에 놓는다. 이제 예수께서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들이는 그의 사역에 공적으로 들어가실 준비가 되셨다. 그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는 어떻게 그가 자신의 과업을 성취하느냐이다. 우리가 앞부분에서 보았듯이, 그는 시편 2:7 (“이는 내 아들이요”)과 이사야 42:1 (“내 기뻐하는 자라”)의 말씀들이 아직도 그의 귀에 쟁쟁한 가운데 침례 장소를 떠나셨다(3:17). 이 두 구절 중에서 첫 번째 것은 정복하는 왕으로서의 역할을, 둘째는 고통당하는 종의 역할을 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봉사를 시작하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마주치신 가장 중요한 선택은 그 봉사가 어떤 성격의 것이어야 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정복하는 왕의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고난당하는 종의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보좌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예수께서 겪으신 시험들은 그것들이 지닌 메시야적 의미에 비추어 고찰되어야 한다. (77.1)
 지상 생애 전체를 통틀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큰 시험은 고난당하는 종의 십자가를 회피(回避)하는 것이었다. 이 시험이 마태복음 4장의 핵심에 위치해 있다. 또한 마태가 명확하게 하고 있다시피, 이 시험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고투하면서 겟세마네를 통과하기까지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계속 커다란 위기의 때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예컨대, 16:21-24; 26:36-44를 보라). (77.2)
 4장에서 마태는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그리스도와 맞서는 주된 적대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는 1절에서는 “마귀”로, 3절에서는 “유혹하는 자”로 불린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10절에서 그를 사단(대적)—그가 타락한 이래로 그의 고유 이름—으로 부르신다. 4장 이전에서는, 마귀는 헤롯을 통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막후(幕後)에서 왕성하게 활동해 왔지만, 이제 그는 전면에 나선다. (77.3)
 하나님도 성령도 그리스도의 시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마태는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어구를 선택하고 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by the devil)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1절).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한다(약 1:13).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품성의 계발을 위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이 시험을 당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곤경에 처하게 될 때, 하나님과 그들의 사이가 벌어져 있거나 그와 조화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껴서는 안 된다. 결국 그리스도의 시험들은 침례 때의 영적인 고양(高揚) 바로 직후에 이르러온 것이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세상의 압력들이 면제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들에게는 그런 압력들을 물리칠 능력이 주어진다(고전 10:13). 그것은 예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든 인류가 당하는 공통적인 시험들에 직면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리하셨다(히 4:15). (78.1)
 마귀는 먼저 예수의 일차적인 필요-음식-가 가장 격심해진 바로 그 순간에 그에게 접근했다. 모세(출 34:28)와 엘리야(왕상 19:8)의 전통을 따라 그리스도는 40주야를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내셨고, 마태가 표현한 바와 같이, 그는 “주리”셨다(2절). 사단은, 그가 우리 인간들 모두에게 그렇게 하듯이, 예수의 영혼의 성채로 들어가는 침투용 쐐기로서 예수의 당면한 필요에 매달리고 있다. (78.2)
 여기에 진정한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시기로 선택만 하신다면 친히 그 필요를 채우실 수 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마귀는 그리스도께서 침례 받으실 때 들으신 아버지의 바로 그 말씀을 끄집어낸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아들이요”(3:17)라고 확언하셨다. 사단은 이 말씀을 약간 왜곡시켰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3절)고 그는 도전한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에게 그러했듯이, 그 대적의 첫 번째 공격의 핵심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진실성에 대하여 의심과 불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창 3:1). 그리하여 그는 “네가 만일 ... 이라면”하고 말을 걸었다. (78.3)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은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는 분에게 겨누어진, 메시야적 시험이라는 것을 우리는 처음부터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79.1)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은 그대와 나에게는 아무런 시험거리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교회 주차장 뒤에 조성된 바위 정원에서 돌들에게 떡이 되라고 앞으로 3년 동안 아무리 명령할지라도 결코 떡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바로 이것이 이 시험의 요점이다—예수께서는 모든 창조의 장본인으로서(요 1:3) 돌을 떡으로, 혹은 심지어 무(無)에서도 떡을 만드실 수 있다. (79.2)
 예수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셨다(히 4:15)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놓고 끝없이 토론을 벌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성경을 그저 단순히 읽어만 보아도, 그의 인성이 어떤 인성이었든지 관계없이, 예수께서는 다른 어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시험보다 훨씬 더 큰 시험을 받으신 것처럼 보인다. 예수께서 받으신 대부분의 시험들은 우리에게는 시험거리조차도 안 된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 시험들에 반응을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79.3)
 예수께서는 의심할 나위 없이 배가 고프셨고,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제안이 매력적임에 틀림없었지만, 우리가 이 첫 번째 시험을 그저 그의 식욕을 채우라는 시험으로만 본다면 그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그 시험의 핵심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예수께서 가지신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은 그가 아담의 다른 모든 자녀들처럼 살기로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셨더라면 구속의 경륜은 치명타를 입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이 땅에 오기로 하신 그의 계획에 관한 약속을 위반하신 것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돕기 위해 그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예수께서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정치적인 왕이 되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가리켰을 것이다. (79.4)
 그 떡 시험에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거기에는 극히 중요한 십자가를 피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내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즉각적으로 경제적/정치적 왕국을 세우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그를 기쁨으로 따랐을 것이다. 그 점은 예수께서 5,000명을 먹이신 요한복음 6장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 이적 가운데서 유대인들은 모세와 같을 예언된 그 선지자(신 18:18)를 보았다. 결국 예수께서는 만나의 기적과 맞먹는 것을 행하지 않으셨던가? 요한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6:14). 그들의 의도는 그를 “억지로 잡아 임금으로 삼으려는”(15절) 것이었다. 그때에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만들려는 그 운동에 휩쓸려 버렸다(마 14:22). (79.5)
 이 떡 시험의 핵심은 예수께서 십자가 없이 그의 왕국을 세우라는 시험, 그가 유대인들이 기대해 온 정치적/경제적/군사적 메시야가 되라는 시험이다. 사단에게 응수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기 위하여 위세(威勢)의 길을 배척하셨다. 그 대신에 그는 하나님께서 보고 기뻐하실 수 있는, 그의 고난당하는 종이 되기로 선택하신다. (80.1)
 세 시험 모두에서 예수께서는 성경의 말씀으로 마귀에게 응수하신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기록되었으되”가 시종일관 그의 대답이다. 세 번에 걸친 그의 대답은 모두 신명기 8:3; 6:16; 그리고 6:13에서 인용한 것이다. 예수는 성경 학도였다. (80.2)
 차이점들이 있긴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시험은 첫 번째 시험과 같은 관점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만일 예수의 첫 번째 시험이 그의 당면한 연약성(배고픔)이 극대화된 시점에 이르러 왔다면, 두 번째는 그의 최대의 강점—성경과 그의 약속들에 대한 그의 정통함—에 과녁이 맞추어졌다. 사단은 시편 91:11, 12을 인용하면서 예수더러 뛰어내려 유명하게 되라고 제안한다(5-7절). 사단은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데려간 다음 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수께서 발 밑의 몰려든 군중들 속으로 뛰어내리면 그의 신성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제안한다. (80.3)
 우리에게는 아주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이 제안은 아주 형편없는 제안은 아니었다. 결국, 유대인들은 그가 오실 때 그를 메시야로 확인해 줄 “표적”(12:38; 고전 1:22)을 항상 찾고 있지 않았는가? 여기 완전한 표적이 있다. 아래의 힌놈의 골짜기 위로 400피트(130미터) 이상 솟아 있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실로 인상적일 것이다! 말라기는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라(말 3:1)고 예언했다. 그리고 어떤 랍비들은 “왕—메시야갸 나타날 때 그는 성전 지붕 위에 서실 것이다”(Pesikta Rabbati, 36)라고 예언했었다. (80.4)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경 예언을 성취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백성들은 그런 유형의 메시야가 나타나면 그의 뒤로 쉽게 줄지어 설 것이었다. 그들은 눈부시고 호화찬란한 메시야를 원했다.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그것이 추종자들을 얻는 면에 있어서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보다는 더 인기 있을 뿐 아니라 고통 없는 방법일 것이기 때문에 시험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들은 즉시 나타났을 것이다. (81.1)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성경으로 사단에게 웅수하신다. 그는 이번에는 성경으로 성경에 대항하신다( 기록되었으되”7절). 이 방법은, 사단이 시편 91편에서 인용한 그의 구절을 잘못 적용했기 때문에, 이번 경우에는 특별히 적절하다. 예수께서는 사단에게 하신 답변을 통하여, 영감받은 저술들에서 단순히 인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저 인용구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속한 직접적인 문맥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품성의 전반적인 배경 안에서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문맥과는 상관없이 인용구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사람을 광신자로 만들 수 있으며, 이런 행습은 사람들을 마태의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 (81.2)
 세 번째 시험은 예수께서 성취하러 이 세상에 오신 바로 그 목적에 과녁이 맞추어졌다. 그는 만일 사단에게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기만 하면(9절), 세계의 통치자(World Ruler)가 되실 수 있다(그리고 추측컨대 그런 과정에서 그의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건지실 수 있다[1:21]). 셋째 시험의 요점은 유대인들이 세계적 주권을 갖는 것이 메시야적 기능이라고 인식한 점(사 2:2; 렘 3:17)은 옳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미워해 온 로마를 타도할 정치적인 메시야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81.3)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나 그의 방법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복하는 왕과 고난당하는 종의 역할 사이의 긴장이 그의 귀에 아직도 쟁쟁한 가운데 시험에 들어가셨다. 그는 결심이 선 채 그 경험에서 나오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기를 원하시는 고난당하는 종의 길, 결국에는 혐오스러운 십자가로 나아가게 만들 그 길을 따르실 것이다. 결국 그것이 정복하시는 왕이 되시려는 그의 목표 달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유일한 합법적 길이다(계 19 참고). (82.1)
 시험은 끝났다. 예수께서는 편의(便宜)와 최소한의 저항의 길보다는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셨다. 그는 십자가, 마태복음의 절정을 이룰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다. (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