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5 장. 안식일:구속의 기쁜 소식 II. 신약에 나타난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들
 “이제까지” 라는 부사의 의미. 전통적으로 “이제까지”라는 부사는(그것이 창조적인 일이든, 보존이나 구속적인 일이든 간에) 하나님의 계속적인 작업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따라서 안식일 계명을 무효화하거나 또는 폐기시키는 것이라고 주장되어왔다. 그러나 “이제까지”라는 부사구가 하나님은 안식일을 무시하고 계속적으로 일하시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일까? 이 부사 자체는, 더우기 동사 앞에 강조의 목적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특히, 항구성 보다는 극점(절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68 (136.1)
 그래서 이 부사구는 시작(테르미누스 아 쿠오)과 결말(테르미누스 아드 쿠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시작은 태초의 창조 안식일(창 2:2, 3)을 말하며 끝은 “밤이 오리니 그 때에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라고 하는 유사한 안식일 선언속에 내포되어 있는 최종적인 안식일 안식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문제의 귀절에서 말씀하시고저 하는 취지는 비록 하나님께서 창조의 완성과 함께 안식일을 제정하시기는 하셨지만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약속된 바 안식일 안식의 결실을 맺도록 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다”는 뜻이다. (136.2)
 “일하시고 있다”는 동사의 의미.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고 있다”는 말의 본질은 무엇인가?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일들이 반복하여 그리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나 또는 이 우주의 계속적인 유지와도 부합되고 있지를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사명과 일치되고 있다. 그 예로써 예수께서는 명백하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요 6:29)고 하셨다. 그분은 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 할찌라도 그 일을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 38; 4:34; 14:11; 15:24)고 하셨다.69 (136.3)
 하나님의 일의 이와 같은 구속적 성질은 소경을 치료해 주신 예수님의 행위 속에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명백하게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요 9:3). 따라서 이 귀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당신의 창조의 사업을 모두 마치셨지만 전반적인 일까지 마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구속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A. T. 링컨(Lincoln)의 말을 빌어 말한다면 “창조의 일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안식이 최종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누리어야 할 것으로서의 안식의 기능이 죄로 말미암아 방해를 받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제정, 목적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일하셨다”70고 할 수 있다. (136.4)
 신학적인 함축. 그리스도의 답변에 함축된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분은 안식일의 기능을 무가치하게 만들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일하심”에 호소하셨는가 아니면 오히려 안식일의 기능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는가? 그리스도의 답변의 취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안식일이 창조를 통하여 우주와 연결되어 있고(창 2:2~3; 출 20:11) 구속을 통하여 대 탈출(출애굽)과 연결되어 있음(신 5:15)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모든 세속 활동을 중단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였으며 동포들에 대하여 자비의 행위를 베풀므로써 구속주 하나님의 행위를 모방하고 있었다. (136.5)
 이 점은 안식일에 자신보다 더 불우한 형제에게 동정심을 베풀어야 하는 일반 백성들의 생활속에서만이 아니라 특별히 성전 봉사 속에서도 진실이다.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이스라엘 자손들 일반에게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을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이 구속적인 기능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인정하고 있던 이와 같은 안식일 신학의 기초 위에서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의 안식일에 “일 하심”의 합법성을 옹호하셨던 것이다.71 (136.6)
 예수님께서 중풍병 환자를 고치신 일 때문에 야기된 논쟁(요 7:22~24)을 침묵시키기 위하여 할례의 예(例)를 들었을 때 사용하신 논리들도 사실상 이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주장하시기를 만약에 새로 태어난 어린 아기에게 계약의 구원이 미치도록 하기 위하여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인간의 신체 가운데 지극히 적은 한 부분(랍비들의 계산에 따르면 할례를 행하는 부분은 인간의 248지체중의 하나라 한다)을 돌보는 것이 적법한 일이라면 안식일에 자신이 “사람의 전신(全身)을”(요 7:23) 건전케 해주었다고 해서 “노여워 할” 까닭이 없다고 하였다. (137.1)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전체적인 사람의 구속을 위하여 일하는 날이었다.72 이 점은 그리스도께서 전번에 당신이 치료해 주셨던 그 사람들을 역시 안식일에 일부러 찾으시고 만난측은 그들의 영적 필요에 응하여 권면하신 사실(요 5:14; 9:35~38)로도 입증되었다. 예수님의 대적들은 “외모로 판단하기”(요 7:24) 때문에 그리스도의 안식일 봉사의 구속적인 본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에게는 사회적인 재통일이나 또는 영적 시력의 회복보다는 “자리”(깔판)(요 5:10)나 “진흙”(요 9:14)같은 것이 더 중요한 것들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서는 안식일의 적극적인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만연되어 있는 그릇된 관념과 대항하여 행동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37.2)
 요한복음 9장 4절에 기록된 또 하나의 안식일 선언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추종자들에게 똑같은 구속적 연쇄(連鎖)의 고리들이 되라고 촉구하여 말씀하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밤”은 분명히 구속 역사의 종결이며 이 종결은 “이제까지”라는 부사구 속에 내포된 그 종결을 뜻하고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과 인간의 구속적인 활동이 종결될 때 창조의 안식일을 그 원형(原形)으로 하는 최종적인 안식일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137.3)
 그 최종적인 안식을 이룩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을 “하고 계시며”(요 5:17) 우리 또한 이 구원을 남에게까지 미치도록 하기 위하여 “일 해야 하는”(요 9:4) 것이다. 요한이 전하고 있는 두개의 안식일 치료 이야기는 앞서 누가복음에서 우리가 관찰한 안식일의 구속적인 의미, 즉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룩된 구원의 축복을 경험하고 나누어 갖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137.4)
 5.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름.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이야기(막 2:23~28; 마 12:1~8; 눅 6:1~5)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걸어가고 계셨다. 제자들은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다”(마 12:1). 역시, 안식일에 밀밭에 나와 있었을 바리새인들이 그같은, 행동을 안식일의 명백한 모독행위로 간주하여 그리스도에게 불평하여 말하기를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막 2:24)하였다. (138.1)
 혹자는 제일 먼저 어찌하여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음으로써 그들의 주림을 면하여야 했는가? 를 궁금히 여길 것이다. 그들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끼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필시 그들은 함께 회당의 안식일 예배에 참석했었는데 점심 초대를 받지 못하고 그래서 제자들이 쉴 곳을 찾아, 밀밭을 지나 가다가 밀 이삭을 잘라 먹게 된 것 같다.73 만약에 사실이 이와 같았었다면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특히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 호 6:6)고 하신 대답 속에는 그들이 안식일의 환대를 잊고 있음을 은근히 나무라시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138.2)
 다윗의 예(例).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논지로서 제자들을 안식일 범법의 비난으로부터 옹호하였다. 첫째로 그분은 주장하기를 만약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거북한 떡을 먹어 굶주림을 면한것(삼상 21:1~7)이 옳은 일이었다면 제자들이 거룩한 안식일에 시장한 연고로 밀 이삭을 잘라 먹은것도 적법한 것이라 하셨다.74  (138.3)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원칙은 어떤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마치 다윗이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의 지위가 특별하기 때문에 “법을 초월한다”75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평민에게만 구속력을 가진 그런 법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각각 평민과 특권층을 위한 두개의 기준을 가지고 통치하고 계시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그렇지만 여기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거룩한 떡을 먹을 당시의 다윗은 이 아니라 “핍절하고 시장한”(막 2:25)자들이었기 때문에 특권 운운하는 것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우선하여 주장된 것은 인간의 핍절함이지 지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간급환자를 병원으로 옮기려 할 때 평시민이라고 해서 과속으로 달릴 면책권이 없는가? (138.4)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의 굶주린 정도가 다윗의 그 당시 주렸던 정도 만큼은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의 예를 제자들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76 랍비들의 이같은 추론은 구약 성경에도, 예수님의 말씀에도 없다. 성경에는 인간의 핍절함이 어느 정도라야 그런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말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하신 가르침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막 2:27)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육체적, 영적 안녕을 위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복지(調祉)는 안식일의 적절한 준수로 말미암아 제한을 받지 않고 오히려 보장을 받는다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의 육체적인 필요를 거부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궁핍한 날이 아니라 즐거운 날로 제정된 이 날의 기본 기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77 안식일의 인간적인 기능에 대해서는 “안식일:봉사의 기쁜 소식”이라는 제목으로 다음의 장(章)에서 살피게 될 것이다. (138.5)
 제사장들의 예(例). 주님이 사용하신 두번째 논거(論據)는 그리스도의 구속 봉사와 안식일 관계의 문제에 좀 더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우리 주님은 구약 성경의 선지서(다윗의 예: 삼상 21:1~7)에만 호소한 것이 아니라 토라(율법)서에도 호소 하였다. 즉 그분은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안되는”(마 12:5; 민 28:9~10; 레 24:8~9) 제사장들의 예(例)를 들었다. (139.1)
 보통 사람이 안식일에 행하면 죄가 되는 수많은 활동들을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행했다. 안식일에는 매일 드리는 정규 제사에 흠없는 수 양들과 고운 가루와 기름이 추가되었다(마 28:9~10).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더 많이 활동했지만 “죄가 안되었다”(마 12:5). 왜 그런가? 그들은 대신에 다른 하루를 휴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인가? 아니다. 구약 성경에는 제사장들을 위한 또 하나의 휴일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이야말로 칠일 중 어느 날을 안식일로 삼아도 좋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반론이 아닐 수 없다. (139.2)
 도날드 카손(Donald Carson)은 이점을 시인하여 말하기를 “만약에 구약의 원칙이 칠일 중 비특정의 어느 한 날을 휴식과 예배일로 한다는 것이었다면 구약이 제사장들을 위하여 다른 휴식을 마련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그런데도 그러한 입법이 없다는 사실은 구약에 있어서 제칠일 사상의 중요성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며 일요일을 구약의 제칠일로 삼을려는, 즉 특정 제칠일이 아니라 칠일 중 하루라는 원칙과 반대되는”78 것이라고 하였다. (139.3)
 그러면 어찌하여 제사장들에게는 “죄가 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제사장들이 행한 안식일 활동의 구속적인 본질 속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 활동의 구속적인 본질에 대해서 언급하신 사실을 보았었다. 즉 그분은 할례의 일을 말씀하시면서 그 의식의 구속적인 의의 때문에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그 의식을 행해도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하셨다(요 7:22~23). 예수님은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수행해도 죄가 되지 않는 제사 의식들로서 이밖에도 여러 가지를 거론하시고 그 이유로서는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의 용서와 구원을 위한 장치들이기 때문이라 하셨다(히 7:27; 9:12, 22).79  (1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