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력. 특별한 관심으로 엘렌 G. 화잇은 독자들에게 일상에서 분별력을 발휘하라고 촉구한다. 상식과 주의 깊은 사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분의 뜻에 대한 헌신, 적극적인 기도와 신앙적인 삶, 심지어 믿음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세상 일(청지기에게 보내는 권면, 159), 가정 재정(교회증언 제2권, 431), 사업상의 거래, 경비 절감에 신중을 기한다고 나무라지 않으신다. (821.6)
 “신앙적 의무 그리고 사업 분야에 대한 최고의 분별력이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재림신도의 가정, 381). 무분별하게 “스스로를 위험과 위기에 빠뜨리는 자들”을 화잇은 반대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스스로를 유혹에 노출시킨다. 그 유혹에서 손해와 오점 없이 빠져나오기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분별력과 조심성을 발휘하면서 겸손하고 신중하게 다가가야 한다.”(교회증언 제3권, 482). 지혜와 상식을 겸비한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강력한 도구가 된다. “어려움을 겪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를 위한 섭리의 작용을 우리 스스로 방해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 이유는 분별력, 선견지명, 각고의 노력을 신앙과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ChS 239; 참조 선지자와 왕, 633-645). (821.7)
 용기. 그리스도교에서는 끈기와 확고부동함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늘어나는 죄악 속에서도 단호히 대응하며 순응과 타협의 압력을 받아도 원칙대로 행동하겠다는 것이다 용기란 이처럼 불신의 세상에 맞서게 하는(교회증언 제1권 287) “강인한” 미덕이다(치료봉사, 391).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복음전도, 240) 세상이 닦아놓은 길에서 떠나 행동해야 할 때(각 시대의 대쟁투 597) 성령께서 자기 종들에게 견뎌낼 수 있는 불굴의 용기를 주실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657). “성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용감하고 희망에 차야 한다. 그들은 적극적인 덕성[용기, 영향력, 기운, 분별력]뿐 아니라 소극적인 덕성[온화함, 인내, 온유 친절]도 계발해야한다”(치료봉사, 497). (821.8)
 그러나 용기는 다른 덕목처럼 오직 의도적인 노력과 규율 잡힌 훈련으로만 얻을 수 있다(교회증언 제5권. 213).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엘렌 G. 화잇은 값진 충고를 전한다. “어떤 경우에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 불쾌한 경험을 생각에서 떨쳐버리고 힘이 되는 말만 하자. 우리는 자신을 쾌활한 분위기에 둘 수도 있고 우울한 분위기에 둘 수도 있다. 용기 주는 말을 하도록 연습하라”((SD 218). 더욱이 그녀는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으로 서는 것이 유일한 안전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소한다. “우리는 이 타락한 시대의 습관과 유행에 한 치도 양보하지 말고 도덕적으로 홀로 서서 부패한 우상숭배의 관습에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신앙 표준을 뛰어 넘으려면 용기와 독립 정신이 필요하다.”(교회증언 제5권, 78). (822.1)
 용서. 엘렌 G. 화잇은 여러 성경 교리를 체계적으로 통합하여 용서의 개념을 제시한다. 첫째, 인간의 본성은 죄로 물들었으므로 하나님, 이웃, 자신에 대한 인간의 자율적 행위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을 경우 도덕을 거스른다고 그녀는 단언한다(실물교훈, 311; 정로의 계단, 18, 19; 시대의 소망, 676). 둘째, 그녀는 죄를 우주에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궁극적인 악으로 묘사한다. 죄는 봐줄 수 없고(시대의 소망, 811; 치료봉사,451; 부조와 선지자, 738) 하나님의 정의, 거룩함, 진리를 희생해 가면서 용서할 수 없으며(7BC 912, 913) 정당화할 수도(교회증언 제4권, 370), 가볍게 다룰 수도 없다(정로의 계단, 33; 실물교훈, 248; 교육, 291). 하나님의 사랑으로도 죄를 봐줄 수는 없다(실물교훈, 316; 부조와 선지자, 522). (822.2)
 셋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는 죽음처럼 강하다”(시대의 소망, 57). 그러나 죄인을 향한 그분의 사랑은 그들의 죄보다 더 강하다(정로의 계단, 54; 교회증언 제5권, 644). “언제나 그리스도께서는 겸비한 영혼에게서 죄를 분리시키신다. 그분은 마귀의 활동을 분쇄하러 오셨고 회개하는 영혼 모두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보전할 만반의 대비책을 세우셨다.”(시대의 소망, 311). 죄가 존재하자마자 구주께서 계셨다(1BC 1084; 시대의 소망, 210).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주에서 죄가 소멸하고(시대의 소망,764) 완전히 박멸될 것을 확실하게 보증하셨다(부조와 선지자, 33). (822.3)
 넷째, 엘렌 G. 화잇의 신학 중 죄 용서는 인간 본성 안에서 죄가 파괴되는 대목에 자리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그들의 죄 속에서(in sin) 구원하신 게 아니라 그들의 죄로부터(from sin) 구원하셨다(시대의 소망, 668; 교회증언 제4권, 251; 산상보훈, 114). 그분은 죄의 형벌을 자신이 치러서 인간이 죄 안에 계속 머물지 않고(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161, 162) 용서받게 하심으로(교회증언 제3권, 372) 이 구원을 실현하셨다. 죄 용서의 경험에는 인간의 협력도 포함된다. 죄의 용서와 죄로부터의 용서는 값없이 주어진 것이기에 인간 자신의 고행으로 얻거나(산상보훈, 115, 116)사거나(각 시대의 대쟁투, 84) 확보하는 것(교회증언 제5권, 635; 각 시대의 대쟁투, 72)이 아니지만 우리가 그 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다(정로의 계단, 52; 교회증언 제5권, 630). 이와 같은 용서의 수용은 참회(증언보감 제2권, 94), 회개(7BC 916; 정로의 계단, 26, 27; SD 13; 가려 뽑은 기별 제1권, 393; 교회증언 제2권, 293) 그리고 죄의 고백으로 죄인이 그리스도께 다가와서(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108), 기꺼이 자신의 악한 길을 버리고(산상보훈 127, 정로의 계단, 32),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고자 할 때(실물교훈, 245-247;산상보훈, 113-116; 정로의 계단, 97) 나타난다. 용서는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값없이 이루어지지만, 인간이 이 선물을 받아들여야 개인에게 효력을 발휘한다(실물교훈, 251). 그러면 인간의 마음에는 확신(선지자와 왕, 668), 말할 수 없는 평화, 기쁨, 안식이 찾아온다(치료봉사, 267). (822.4)
 그런데 그 첫 단계는 “악하고 속수무책이고 도움이 필요한 우리의 처지 그대로”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약하고 어리석고 죄 있는 모습 그대로 다가가 그분의 발에 엎드려 참회할 수 있다. 그분은 사랑 어린 팔로 우리를 껴안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고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자신의 영광으로 여기신다. 수많은 사람이 바로 여기서 실패한다. 예수님이 직접 개인적으로 자신들을 용서하셨음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정로의 계단, 52). (823.1)
 용서라는 풍요로운 경험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웃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스도와 같은 용서의 정신을 지니면(교회증언 제2권, 566, 567)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잊어버리고 생각과 마음이 건설적이고 풍성해진다. 동정과 용서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회복시키고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제2의 기회를 준다(교회증언 제2권, 566). 이러한 덕목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희망 없는 노력에 불과하다(산상보훈, 21, 22; 참조 산상보훈, 21-24, 113-116; 정로의 계단, 9-56; 부조와 선지자, 359-362). (8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