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이 피를 고기와 분리하는 것은 단순히 단 밑에 피를 쏟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레 4:7, 18, 25, 30, 34 참고). 그러나 제사장은 피를 단 사방에 뿌렸다. 피를 제단에 바르는 것은 레위기 17:11에 나오듯이 그/그녀의 생명의 속전을 지불함으로 제물을 드린 사람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82.3)
 레위기 17:11의 어법을 주목하라: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이 문맥에서 “속하게”(making atonement)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는 인간의 생명을 취하는 것을 대신하기 위해 값을 지불하는 의미로서의 “속전을 치르다”(making ransom)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속죄하다”(atone)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관계를 화해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속죄는 화해의 다양한 면들을 강조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죄나 부정함과 같은 악한 것에서 속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나 물건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는 악으로부터 정결케 하는 것, 깨끗케 하는 것, 혹은 죄를 갚는 것을 의미한다(레 5:6; 16:16). (82.4)
 레위기 17:11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생명을 속하는 것은 그의 생명을 위한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값과 관련되어 나타나는(참고 욥 33:24; 사 43:3; 출 30:12) 히브리어 명사 “속전(ransom)”이 히브리어 동사 “속죄하다”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 제사의 피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죽는 대신에 살 수 있도록 값을 지불하였다. (83.1)
 희생 제사를 통하여 생명의 값을 치르는 것은 심각한 현실이다. 그것은 단지 찬양대가 노래하고,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되고, 태양빛이 스테인드 글라스의 유리창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동안 우리의 감정을 고무시키는 아름다운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우리는 생명의 속전이 치러지지 않았을 때 일어날 것을 생각해 보면 생명을 위한 속전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살인자는 속전을 치를 수가 없었으므로 반드시 죽어야 했다(민 35:31). 이것이 꼭 살인자는 영원히 잃어버림을 당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므낫세가 그들의 권력을 남용함으로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그들을 용서하셨다(삼하 11~12; 대하 33; 왕하 21, 특히 16절 참고). 하지만 이것은 살인자는 반드시 죽어야 했던 이스라엘의 사법 체계를 넘어서는 자비였다. (83.2)
 출애굽기 30장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인구조사를 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규정하셨다(12절). (83.3)
 그분께서는 속전의 기능을 그들의 생명을 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5절). 속전 지불하기를 거절함으로 오는 온역은 문자 그대로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사무엘하 24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응적인 심판인 온역이 이스라엘에 내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 다윗 왕이 부적절한 방법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을 때에 7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내리신 온역으로 죽임을 당했다(15절). (84.1)
 속전의 개념은 제사 제도의 중심이었다. 모든 희생 제사의 피가 속전을 제공했던 사실 외에도(레 17:11), 역대하 3:1은 우리에게 솔로몬 성전이 모리아산 위의 오르난(삼하 24장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지어졌다고 말한다. 모리아산 위에서 죄 없는 이삭은 수풀에 걸려있던 수양으로 속전을 치렀다(창 22:13). 죄를 범한 다윗은 같은 산 위의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인구조사의 결과로 야훼의 죽음의 사자에 의해서 이미 죽임을 당한 7만 명과 함께 죽임을 당할 상황에 처해있는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기를 청하였으나 희생 제사를 통하여 속전을 치렀다(삼하 24:17~25; 대상 21:16~27). 그런 까닭에 영구적인 희생의 장소인 성전은 다윗의 이야기와 이삭의 이야기가 만나는 장소인 속전의 장소에 지어졌다. (84.2)
 가죽=제사장을 위한 위탁 수수료
 번제 짐승의 가죽은 벗겨내서 제거했다. 가죽은 불태워지지 않고 제단에서 여호와께 희생 제물을 바쳤던 제사장에게 돌아갔다(레 7:8). 가죽 또한 온전한 짐승의 한 부분으로서 먼저 여호와께 드려졌으나(1:3)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취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 희생제사를 집전한 당신의 종, 희생 제사 의식을 집전한 제사장에게 가죽을 주셨다. (84.3)
 우리는 가죽을 제사장을 위한 일종의 “위탁 수수료”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참고 7:34). (85.1)
 위탁 수수료는 오늘날에도 근본적으로 같은 기능을 한다.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시간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했을 때에 나의 상사는 모든 주택 매매 수수료를 자신이 챙긴 후 나와 관련된 주택 매매 수수료의 일정액을 나에게 주었다. (85.2)
 이스라엘이 성소를 짓고 백성들을 위해 제사의식을 행하는 제사장들의 무리를 구별하기 전에 아브라함과 같은 부조들은 자신들의 번제를 직접 드렸다. 그러나 한 번은 아브라함이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여호와께 음식 헌물을 드렸던 적이 있었다. 여호와께서 여행자의 모습으로 두 동행들과 함께 나타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떡을 만들도록 지시했고 그의 송아지 한 마리를 종에게 주어 요리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음식들을 버터와 우유와 함께 그 세 “사람들”에게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먹었다(창 18:1~8). (85.3)
 아브라함이 그의 호의를 식사를 대접함으로 나타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와 좋은 관계를 맺기 원하는 그들의 바람을 그분께 “음식 헌물”의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나타냈다. 그러나 희생 제사는 여호와께 드려지고 받아들여졌던 접대 그 이상이었다. 희생 제사는 제단 위의 피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치유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진정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피는 그리스도의 피다. 그리고 궁극적인 제단은 십자가이다. (85.4)
 번제단의 짐승의 희생 제사는 제사를 드렸을 때 그것을 드렸던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쳤던 강력한 영적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런 제사의식을 통해서 생생하게 표현된 생명과 죽음의 결과들은 모든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생으로 성취에 이르렀다. (85.5)
 이스라엘은 번제단을 통해 십자가의 혜택에 접근할 수 있었다. (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