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을 내밀라 제 2 장 중보적 치유의 기적들 기적 1 ► 주여,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한편 예수님이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치유를 선포하시는 순간, 80여리나 떨어진 가버나움에서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발열(發熱)로 죽어 가던 아이의 얼굴에 갑자기 홍조(紅潮)가 사라지고 건강한 혈색이 돌아오는 게 아닌가! 불덩이 같던 아이의 몸에 열기가 사라지면서 흐리멍덩하던 눈망울이 샛별처럼 빛났으며, 온몸에 건강한 기운이 감돌았다. 가족들은 갑자기 아이에게 일어난 신비스런 변화에 놀랬으며 치유를 심히 기뻐했다. (91.12)
 다음 날 아침 일찍, 왕의 신하는 예수님과의 아름다운 조우의 경험을 간직한 채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가버나움을 향해 귀향(歸鄕)길에 올랐다. 마치 개선 장군처럼 발걸음은 몹시 가벼웠다. 몇 시간을 걸은 후 드디어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디베랴 언덕을 내려오는데, 저쪽 가버나움 어귀에서 종들이 마중을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한 종이 숨가쁘게 마구 달려오더니 참으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게 아닌가! (92.1)
 “주인님, 주인님, 아드님에게서 병이 물러갔나이다” (92.2)
 “언제쯤 치유됐는가?” (92.3)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92.4)
 “아, 예수님께서 치유를 선포하신 바로 그 시간이었군!” (92.5)
 저쪽에서 기적적인 치유로 살아난 아들이 마구 뛰어 와 “아버지”하며 품에 힘껏 안기는 게 아닌가! 외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던지 아들을 가슴에 꼭 안은 채 몇 번이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렸다. 갈릴리 가나를 향해 뒤돌아보면서 중얼거렸다. (92.6)
 “그분은 틀림없는 메시야이구나!” (92.7)
 이 일로 인해 가버나움에 복음의 발판이 마련됐다. 성경은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요 4:53)고 하였다. 주님께서 그곳에 복음의 전진 기지를 만든 것이다. 6개월 후에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복음을 증거하실 때에 한동안 신하의 집에 머물러 계시므로 그 신하의 집은 갈릴리 지역 전도를 위한 복음 센터가 됐다. 그의 모든 가족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제자가 됐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신하가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 “헤롯의 청지기 구사”(눅 8 :3)이거나 혹은 “분봉왕 헤롯의 젖 동생 마나엔”(행 13:1)일 것이라 한다. (92.8)
 신하의 아들은 중보의 간구로 치유를 받았다. 본인의 믿음이나 간구가 아니라 아버지가 회개하고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갖고 간청했을 때에 주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시고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신 것이다. 아들은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느라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모가 온전한 믿음으로 중보하는 간구를 한 것이다. 이처럼 치유에는 중보의 기도가 아주 중요하다. 오늘날도 부모들은 자녀들의 치유를 위해 믿음을 갖고 활용하여 중보 기도해야 한다. 자녀의 치병을 위한 중보의 기도는 오늘날도 응답을 받게 된다. 말 못하는 어린아이가 병 때문에 고통을 받아 칭얼대며 밤을 지새우게 될 때 부모는 왕의 신하처럼 주님께 간구할 것이다. 자녀나 부모나 친척이나 동료를 위해 중보의 간구를 할 때 기도하는 자의 믿음을 보고 환자를 고쳐 주실 것이다. (93.1)
 신하가 아들의 병을 고침 받았던 과정을 다시 한 번 세밀히 분석하여 보자! 신하가 아들을 다시 얻게 된 요인들을 찾아내어 만약 오늘날 우리의 생애에 적용한다면 똑같은 방법으로 중보적 치유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93.2)
 첫째,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자기 아들의 병을 능히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인간의 방법은 다 동원해 보았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어 실망하던 중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분을 메시야로 믿었으며 만일 집으로 모시고만 오면 아들의 병을 능히 고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졌다. 오늘날도 어린 자녀나 부모가 투병 중에 있다면 신하처럼 하나님께서 분명히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93.3)
 둘째, 신하의 아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은 믿음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믿었을 뿐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 80여 리나 되는 먼지나는 산길을 걸어서 예수님을 만나러 갔다. “언젠가 그분이 우리 집에 찾아오겠지”하며 기다리기만 했다면 아들의 병은 결코 낫지 않았을 것이다. 믿음을 행사하여 직접 먼길을 갔다. 이 일은 아무리 자기 아들의 병세(病勢) 회복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당시의 거리 감각으로 그렇게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날도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거리가 문제되어서는 안 된다(사 40:28-31). 사랑하는 자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을 실제로 행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성전에 가야 한다면 거리가 멀어 가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개의치 않고 왕의 신하처럼 믿음을 행사하여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간구하는 자가 치유의 기적을 체험할 것이다. (93.4)
 셋째, 왕의 신하는 자존심을 버리고 주님께 완전히 굴복하여 소원을 간구했기 때문에 아들이 치유되는 신유(神©의 은총을 받았다. 헤롯 왕의 신하로서 비록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고관이었지만 자존심을 버리고 가난한 일개 시골뜨기 청년에게 도움을 간구한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9)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기적인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준다고 생각하여 화가 나서 돌아가 버렸다면 신하는 아무런 은총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을 버리고 주님께 완전히 굴복했다. 그래서 신하는 사랑하는 아들을 건질 수 있었다. 오늘날도 중보적 간구를 드리는 자들은 왕의 신하처럼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잠 16:5) 오직 겸손한 자의 간구를 들으신다. (94.1)
 넷째, 왕의 신하는 잠깐 동안 품었던 이기적인 믿음, 곧 보고야 믿는 믿음을 버리고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여 믿음으로 보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아들이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다. 그는 예수님의 외양(外樣)을 보고 그만 실망하여 믿음이 흔들려 의심했으며 결국 주님이 자기의 요청을 들어준다면 믿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하는, 심중(心中)을 훤히 읽으시고 그 사실을 지적하신 주님의 말씀에 즉시 뉘우치고 회개하여 이기적인 믿음을 내팽개쳤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졌을 때에 주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조건적인 믿음, 곧 의심하는 믿음이 없어질 때에 주님은 비로소 기적을 행하여 신유를 체험케 해주실 것이다. 왕의 신하가 80여 리나 걸어와 주님께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했을 때에 단지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만을 요구하셨지 다른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왕의 신하가 처음에 요청했을 때 주님께서 가타부타 직접적인 대답을 지체하신 것은 신하가 아직 자기가 요구하는 것을 받기에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약 1:6)아야 했다.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믿는, 그런 믿음을 가질 때까지는 주님께서 아무것도 하실 수 없으셨다. 실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다. (94.2)
 겨우 보고야 믿는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중보적 치유를 간구하는 자들에게 보고 믿는 조건적 믿음이 아니라 의심 없이 믿음으로 보는 무조건적 믿음을 원하신다. 찬미 490장은 이와 같은 믿음을 노래한다. (95.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95.2)
 “우리도 이 교훈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보거나 느끼기 때문에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의 허락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의 앞에 나올 때에 모든 간원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간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구한 후에 그것을 받을 것을 믿어야 하며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을 인하여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시대의 소망, 200). (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