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도 자신의 약함을 알기 때문에 인간의 연약함을 “용납한다”(“부드럽게 다룬다[deals gently]”)(2절). (119.7)
 7. 그는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한다(3절). (119.8)
 이리하여 우리는 대제사장의 역할이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측면으로 구분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의 임명, 대표성, 중보, 제사 기능, 속죄, 타인에 대한 동정, 그리고 자신의 죄를 위하여 드리는 희생 제물. (119.9)
 우리가 구약이 제시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히브리서 5:1-4의 기사는 대제사장의 이상적인 초상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여러 대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임명하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다—그들은 자신들의 출생이 그들을 아론의 반열에 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 직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그들이 무식하고 방황하며 자신의 희생 제물의 필요를 예리하게 의식하는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에 우리는 자신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과시하고 직임에 따른 이권을 탐한 엘리의 아들들(삼상 2:12-17)과, 또한 선지자 예레미야를 반대하고 그를 광에 가둔 바술(렘 20:1-6)에 대하여 읽는다. (119.10)
 예수님 당시에는 대제사장직이 몰락할 대로 몰락하였다. 하스몬 가(家)의 시대(142-37 B.C.)부터 대제사장직은 종교적 위치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개개인들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하여 음모하고, 뇌물을 주고, 살인을 자행하였다. 예수님 당시에, 믿기지 않을 것 같지만, 대제사장직이 사두개인들의 손 안에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의 첫 다섯 책(오경)만 받아들였고, 부활이나 천사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마 22:23; 행 23:8 참고). (120.1)
 히브리서 5:1-4에서 바울은 이러한 유감스러운 상태의 일들과 예수님의 대제사장 봉사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님과 비교하고 대조하기 위해 대제사장들을 최상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목적은, 비록 그것의 이상적인 상태에서라 할지라도, 아론 계통의 제사장직은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에 훨씬 미치지 못함을 보이는 것이다. (120.2)
 그 다음 여섯 절(5:5-10)은 예수님께 각광을 비추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위에 열거한 것에 기초하여 한 항목씩 대조하지 않고, 일곱 가지 중에서 오직 두 개의 특징, 즉 하나님의 임명과 자비만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120.3)
 첫째, 바울은, 아론과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명에 의하여 대제사장이 되셨음을 주장하고 있다. 한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 아론을 부르셔서 그를 긴 제사장 가계(家系)의 첫째로 삼으신 것같이, 예수님도 부르셨다. “너는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바울은 기록하였다(시편에서 인용).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오래 전, 아론의 제사장직이 아직 번성하고 있을 때, 성경은 하나님이 전혀 새로운 반차의 새 제사장으로 임명하실 한 분이 장차 나타날 것을 예언하였다. (120.4)
 히브리서 7장에서 사도는 새 반차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 반차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신다. 시편 110:4를 핵심 절로 한 엄격한 분석과 함께, 그는 옛 반차의 약점과 새 반차의 우월성을 드러낼 것이다. (121.1)
 하지만 그는 5:5-10에서 이미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을 포함시키고 있다. 예수께서 아론처럼 하나님의 임명에 의하여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반쯤만 맞다. 진실로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하나님이 임명하시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새로운 주요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121.2)
 5:5, 6의 논리를 주시해 보라. 우리는 그 생각이 이렇게 전개되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도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스스로 취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솔직하고 분명한 말일 것이다. (121.3)
 그러나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대제사장직에 임명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먼저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것은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지칭하는 일차적인 하나님의 선포이다. 시편 110:4에서의 둘째 진술은, 비록 중요할지라도, “그가 또 어디에 일렀으되”라는 도입의 방식에서 나타나듯이, 분명히 이차적인 것이다. (121.4)
 우리는 이 생각을 “율법 후에 하신 맹세[즉, 시편 110:4에 있는]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웠느니라”라는 7:28의 말씀에 비추어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들이시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실 수 있다. 우리는 2:5-18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한 인간 경험의 필요성을 어떻게 강조하는지를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마리아의 아들이 되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즉, 아들만이 그가 인간이 되셔서 고난으로 온전케 되신 후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실 분이라는 것이다. (121.5)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임명은 아론의 것과 비교되는 점만큼이나 대조되는 점을 가지고 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선포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양자 모두 인간이다. 이 두 가지 측면에 있어서 그들은 유사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르심을 받은 제사장직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결코 자격을 갖출 수 없는 어떤 것, 즉 하나님의 아들 되심(Sonship)이다. (122.1)
 이러한 사상은 심사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히브리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과거의 이해를 급진적으로 바꾸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구약 시대의 아론과 그의 모든 동료 대제사장들이 그리스도와 몇 가지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는 반면에, 그들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만이 참 대제사장이시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만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크신 대제사장—마침내 나타나실 유일한 참 제사장—을 단지 희미하게 나타낼 뿐이다. (122.2)
 그리스도께서 아들(Son)이시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바로 면전, 곧 그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시는데, 거기서 천사들은 은혜의 보좌 앞에서 섬기는 종들에 불과하다. 그는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불가불 우리와 연결되셔서 투쟁 중에 있는 우리를 동정하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도우신다. (122.3)
 이제 우리는 이 책의 심오한 신학이 어떻게 함께 어우러지는지를 더욱 분명히 볼 수 있다. 제1장은 참되고 영원한 주님의 신성을 힘있게 논증하고 있다. 제2장은, 예리한 대조를 하면서, 성육신(成肉身)하심으로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시험 받으시고, 돌아가신 그를 제시하고 있다—그리하여 아들이 우리의 “형제”가 되셨다. 이 두 흐름—신성과 인성—은 우리의 크신 제사장이신 신—인(神人) 안에서 만난다. (122.4)
 함축된 의미를 생각해 보라. 오직 한 의 참된—이제와 영원히—제사장. 모든 다른 제사장은 그에 대한 그림자와 예증에 불과하다. (122.5)
 제사장이란 용어를 어떤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때 얼마나 조심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을 대신하려고 하는 어떠한 개인이나 인간 조직체는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122.6)
 예수, 오직 그분, 독특하신 분. 금생과 내세에서 우리의 모든 소망이 그분 안에 있다! (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