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황제는 매력적이고 행운아였으며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도미티아누스는 움울하고 타고난 패배자이며 서투른 사람이었다. 로마 사회가, 그가 의당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경을 나타내지 않자 그는 자신의 신적(神的) 권위를 선언하고 경배를 요구했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주(主)와 신(神)으로 행세했다. 아첨쟁이 시인들은 도미티아누스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심지어는 황제가 먹은 물고기까지도 “신성하다”고 노래했다. (54.10)
 네로의 박해는 로마의 그리스도인에 국한되었다. 도끼티아누스의 광란의 피해는 훨씬 더 컸다. 여러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조상(彫像)에게 향을 바치라는 압력을 받았다. 거절할 경우에 도미티아누스의 총독들이 그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추방령을 내렸으며 예외적인 경우에는 처형시키는 일도 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격한 나머지 그리스도교를 믿는 그의 사촌 클레멘스(Clemens)총독을 살해하고 역시 그리스도인이었던 그의 부인 도미틸라(Domitilla)를 섬으로 유배시켰다.4 (54.11)
 도미티아누스의 박해가 시작될 당시 에베소(Ephesus)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요한도 체포되어 에베소로부터 남쪽 50~60마일의 에게 해(海) 상에 있는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다. 1세기 후에 기독교 저술가인 테르툴리아누스가 요한이 처음에는 로마에서 처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즉 그는 “끓는 가마 솥에 내던짐을 당했으나 상처하나 입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섬(밧모)으로 유배되었다”5고 하였다. (54.12)
 박해 받은 사람이 요한 한 사람 뿐은 아니었다. 그는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에게 자신을 “너희와 함께 환난에 동참한 자”로 소개하고 있다(계 1:9).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는 95년에 시작되었다. 96년에 황제 네르바(Nerva)가 도미티아누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요한은 이때 이루어진 기독교인들에 대한 일반 사면령으로 풀려나 에베소로 귀환하고 그 곳에서 그가 사망하기 전에 요한계시록의 집필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54.13)
 9. 요한과 다니엘
 기원 후 27년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언했을 당시 요한의 나이는 17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밧모 섬에 외로이 앉아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를 볼 준비를 갖추었을 때는 80대 후반의 나이였다. (54.14)
 다니엘 또한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나이 17세쯤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이상을 본때는 80 대 후반이었다. 두 선지자 모두 자신의 시대로부터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진행을 펼쳐보이는 예언적 파노라마를 보았다. 두 선지자 모두 상징을 통한 풍성한 기별을 받았다. 두 선지자 모두 하나님께서 이 땅을 완전히 다스리실 영광스런 날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두 선지자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염려하사 항상 우리의 곁에 서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두 선지자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끔찍이 염려하고 사랑하시는지를 나타내 보였다. (5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