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님은 친히 자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안식일을 “제사”의 날이 아니라 “자비”의 날(마 12:7), 예전을 이행함으로써 자신의 의(義)를 자랑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날로 만드셨다.
(30.1)
 율법주의적인 경향. 창조 안식일에 대한 반대들은 일반적으로 창조 안식일을 옹호하는 자들의 너무나 지나친 율법주의적, 축자주의적인 안식일 준수 자세에 반발심을 가진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제기되어 왔다.85 그들의 반발은 충분히 그 정당성을 인정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무리가 안식일을 악용했다고 해서 안식일 계명을 폐지시키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불행하게도 율법주의자들은 구세주가 자신의 언행을 통하여 안식일을 “희생”의 날이 아니라 “자비”의 날로(마 12:8), 그리고 의식(儀式)을 이행함으로써 자신의 의를 과시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을 사랑하는 날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31.1)
 안식일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경험은 율법주의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로 작용하게 된다. 왜 그런가? 안식일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율법주의)을 하지말고, 칼빈이 너무나 잘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86 우리의 모든 일로 부터 손을 떼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31.2)
 근대 과학과의 불일치. 창조의 안식일을 반대하는 자들 중에는 창조 안식일이 기원에 대한 근대과학의 이론들과 부합하지 않는다하여 창조의 안식일을 배척하는 자들이 포함된다. 오늘날 널리 유행하고 있는 이론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의 지표가 형성되는 데에 수백만년이 걸렸으며 생명은 단세포로 된 단순한 “조상들”로 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부 선의의 신학자들이 이같은 이론을 창조의 설화에 부합시키기 위하여 창조 주일의 6일은 문자적인 6일이 아니라 지질학적 시간의 여섯 시대를 뜻한다고 해석하였다.87 다른 학자들은 창조 주일을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들과 그 선하심 이 인간에게 들어난 기간으로 보려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하나님이 문자 그대로의 제 7일에 실지로 쉬고 그 날을 거룩하게한 것이 아니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어 명백히 창조의 안식일을 배제시키고 있다. (31.3)
 과학적 논리에 있어서의 문제는 해롤드 와이스(Herold Weiss)가 이미 현명하게 말한 바와 같이 “과학적 논리가 신학(神學)으로 하여금 자신을 깨우쳐 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88는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실험실에서 증명된 것만을 믿겠다고 고집한다면 이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뿌리를 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향하여 생물학적 표본에서 추적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것도 믿지 않도록 만든다. 이러한 철학의 비극적인 결과는 곧 이 철학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역사가 신적(神的) 기원이나 운명으로 부터 배제됨으로써 그 궁극적 의미를 상실케 되었다는 것이다. (31.4)
 이로써 생명은 오직 우연에 의하여 자신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하나의 생물학적 순환(術環)으로 영락되고 말았다. 이제 궁극적 실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물체이며 이 물체는 역사적으로 영원한 것으로, 아니면 악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창조의 설화와 그리고 그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은 이같은 니힐리즘(허무주의)에 도전하여 각 세대를 향하여 그들이 과학적 사실의 짐을 지고 있든지 또는 신화적 환상의 짐을 지고 있든지 간에, 이 세계는 사람에게 위탁된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선물이란 것,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의미있는 것으로 인정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31.5)
 

만약에 오직 실험실에서 논증할 수있는 것만을 믿을 뿐이라고 고집한다면 이는 자신의 뿌리를 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는다는 입장이 아니고 아래에 있는 생물학적인 표본에서 그것을 찾으려는 태도이다.
(32.1)
 안식일을 창조의 율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창조의 주일(週日)을 현대 과학의 이론에 부합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근대 과학은 여러가지 형태를 가진 우리의 태양계와 같은 태양계가 형성되는데에 얼마의 기간이 걸리는지를 실험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과 도구를 가지고 있는가? (33.1)
 우리는 과학이 보존과 분해의 진행과정 만을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있는 것같다. 사실에 있어서 근대 과학은 이같은 진행과정이 항상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같은 기능을 발휘해왔다고 가정함으로써 (균일론) 신의 명령(말씀으로 존재를 초래케 하는)으로 인한 과정(a divine fiat process)의 가능성을 배제시키고 있다. 따라서 궁극적인 문제는 창조 주일을 세계의 기원에 대한 근대 과학의 이론에 부합시키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를 주장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자연발생설(自然發生說)이라는 과학적 주장과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이 둘을 조화시키는 일은 가능한 것인가? 분명히 불가능하다. 이 두 주장은 모두 다 전혀 다른 두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자는 단지 자연적인 원인들만을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전자는 하나님을 초자연적 원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는 것이다. (33.2)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진대는 하나님이 창조 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시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을 왜 믿지 않아야 하는가? 혹자는 하나님이 7일이란 인간 주일(週日)의 규제에 따라 창조와 휴식을 했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영원성과 전지 전능(全知 全能)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지질학적인 기한이나 문자적인 날들을 필요치 않으며 오직 창조하시려는 의지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시 33:6).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시간표를 이용하지 않고 인간의 시간표를 택하셨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의 주장은 영원성이나 전지전능성 못지않게 중요한 하나님의 본성의 한면인 사랑을 우리에게 시사(示까)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창조의 사건에 있어서 인간 시간의 제한성 속으로 들어오시려는 하나님의 자발성은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일하고 쉬는 주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귀감 또는 견지(見地)를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만약에 그 필요성이 발생되기만 한다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육체를 취하시려는 의지를 예표하는 것이 아닌가? 안식일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따로 취급이 될 것이다.89 (33.3)
 여기서는 창조의 주일이 근대의 과학적인 세계 기원설들과 조화되지 않았으므로 안식일의 창조 기원을 의문시하려는 태도는 창세기 1:1~2:3에 있는 기별을 부정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문자적인 엿새 동안에 세상을 창조하고 이 세계가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문자적인 하루를 쉬셨다고 하는, 네째 계명 속의 주석까지도(출 20:11) 부정하는 것이라는 말로 이 부분을 마무리 짓고저 한다. (33.4)
 2. 성경에 있어서의 창조의 안식일
 지금까지는 성경의 첫 두 책들인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경구절들만을 가지고 창조의 안식일에 대한 반론들을 반박했지만 이제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역사에서 안식일의 에덴 기원을 뒷바침하는 참고 자료들을 간략히 살펴 보기로 한다. (34.1)
 마가복음 2:27. 마가복음 2장 27절요한복음 5:17절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중요한 두 말씀이 안식일의 창조적 기원을 시사해주고 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예수님이 이같은 선언은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홅어 먹었다하여 바리세인들이 제자들에게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같은 비난을 반박하고 또 안식일의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기능은 인간의 육체적, 영적 안녕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수호해주는 것임을 확언하기 위하여 “안식일이 사람때문에90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 때문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막 2:27)91고 말씀하셨다. (34.2)
 우리 주님의 용어 선택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만들었다”는 뜻의 헬라어 동사 “기노마이”는 안식일의 최초의 “제정(制定)”을 암시하며92 “사람”이란 뜻이 “안드로포스”는 안식일의 인간적 기능을 생각케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의 인간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우기 위하여 인간의 창조에 곧바로 이어지는 안식일의 기원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는 최초의 법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 아래서 이루어진 결혼제도의 부패를 꾸짖으셨을 경우에도 발생했다. 그때도 예수님께서는 에덴 시절의 율법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고 말씀하셨다.93 그리스도는 이 두 제도의 근본적인 가치와 인간적인 기능을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이 두 제도가 제정된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34.3)
 요한복음 5:17. 제 4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대하여 선언하신 또 하나의 중요한 사례를 알려주고 있다. 안식일에 병고친다고 하는 비난에 답하여 말씀하시 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셨다. 기왕의 두 연구가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면 아버지께서 하시고 있다는 “일”의 전통적인 해석은 “항구적인 관심”(Cura Continua) 또는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s) 이었으며 “이제 까지”라는 부사는 “계속적으로, 언제나”의 뜻으로 해석되어 왔다.94 이와같은 해석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창조의 일이건 또는 보존의 일이건 관계없이 하나님의 “계속적”“일하심”은 안식일 법을 무시하고 무효화한다는 부당한 결론으로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34.4)
 이와같은 결론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소인(訴因)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첫째는, 요한복음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과 일들이 반복해서 그리고 명백하게 창조나 보존으로 간주되고 있지를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적(救噴的)인 사명과 일치되고 있다는 것이다(요 4:34; 6:29; 10:37~38; 14:11; 15:24; 9:3). 두번째는, “이제까지”라는 부사가 항구성을 강조하고 있지를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의 개시(開始)와 완결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최초의 안식일부터 그리고 그의 사업이 완결되는 마지막 안식일까지, 바로 이 시각까지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35.1)
 “이제까지”라는 부사는 “시작과” “끝”을 전제하고 있다. 시작은 하나님이 창조사업을 완성하신 창조의 안식일이며 끝은 구속 사업이 완결되는 마지막 안식일이다. 최초의 안식일과 최후의 안식일 사이에 있는 안식일들은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들(요 9:4)이 아무 일에도 개의치 않은 휴식의 기간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구원에 관심을 둔, 일하는 시간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행하신 자신의 구속적인 봉사활동의 적법성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창조의 안식일을 언급하여 이로써 안식일의 에덴 기원에 대한 암시적인 보증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으로 추단된다. (35.2)
 히브리서 4:11. 히브리서 기자도 안식일의 창조적 기원을 인정하고 있다.95 히브리서 4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창세기 2장 2절시편 95편 11절을 함께 결합시킴으로써 안식일 안식의 보편적이며 영적인 본성을 입증하고 있다. 창세기 2장 2절을 통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히 4:4)던 창조의 시기로 안식일 안식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시편 95편 11절에 의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일의 쉼의 범위는 개인이 “하나님의 쉼” 속에 들어감으로써 누리게 되는 구원의 축복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히 4:3, 5, 10). (35.3)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이 구절에 언급되고 있는 쉼의 여러가지 의미들을 이해하는 것96 이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안식일의 기원을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정착하던 시대(히 4:8)에서 구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제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던”(히 4:8) 창조의 시기에서 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려는 것이다. 문맥을 미루어 볼 때 히브리서 기자가 창조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일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루었느니라”(히 4:3)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히브리서 4장에서는 안식일의 쉼이 인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로서 안식일이 제시되고 있다. (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