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다니엘는 기쁜 소식으로 가득 찬 책이다. 이 책에는 우리가 깨닫고 나누어 주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정결케 될 수 있을까? (298.8)
 그 대답은 우선 다니엘 12장 1절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298.9)
 일찌기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그 기본적인 사상을 나타냈다. (298.10)
우리가 자신의 힘을 의지할 때에
우리의 싸움은 패배로 끝난다.
우리 곁에 정의의 사람이
하나님이 친히 택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가 누구냐고 물어 보아라.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시다.
(298.11)
 성도들은 그들의 곁에 의로운 분이 계시므로 정결케 된다.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의 일을 하신다(히 7:25). 이 일은 그분의 일상적인 업무이다. 그리고, 대속죄의 날, 심판의 날에 그분은 최종적으로 정결케 하는 일에 착수하여 드디어 그 일의 끝에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고 선언하시는 것이다(p. 164-168). (298.12)
 그러나, 다니엘 12장 10절은 성도들이 스스로 정결케 하며 스스로 희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행여 해묵은 저 이교주의적 율법주의를 뜻하는 것은 아닌가? (298.13)
 결코 그렇지 않다. 신약 성경에 말하기를 성도들이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했다(계 7:14). 그러나, 이 구절에는 그들이 어디에서 옷을 희게 씻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는 “어린 양의 피”이다. (299.1)
 예수님은

 (1) 용서와

 (2) 변화의 능력과

 (3) 그의 왕국의 시민권을 누구에게나,

 심지어 그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에게까지 약속하는 새 언약을 베풀고 계신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들은 우리가 신앙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일 때만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요 3:16). (299.2)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마땅히 활기 있고 감응적이며 의욕적인 것이어야 한다. (299.3)
 예수님은 산상 설교의 끝 부분에서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이 구절도 다니엘 12장처럼 “지혜로운” 자를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모든 사람들로 말씀하셨다(마 7:24). (299.4)
 다니엘은 소년 시절에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건강에 유익한 음식물들만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들었다. 그는 바벨론의 왕립 한림원에 들어가 동료들과 직원들의 압박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였다. (299.5)
 다니엘의 친구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거친 애국심이 물결치는 국가적 예배와 맹렬한 풀무불을 앞에 놓고도 십계명을 기억하고 실천했다. (299.6)
 다니엘은 사자밥이 될지도 모르는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던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왕립 한림원 직원들의 호의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 해석에 관한 이상을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풀무불에서 세 사람과 함께 계셨다. 하나님이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지키셨다. (299.7)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는 최고의 계시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이처럼 보살피시고 영원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299.8)
 다니엘이 한림원에서 학교 직원들의 사랑을 받고 드디어는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다니엘에게 있어서도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굳게 설 수 있었던 사실로 인해 그 몇백 배나 더 기뻐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가르침에 굳게 설 수 없었던들 그의 괴로움이 어떠했을까? (300.1)
 다니엘로서는 하나님으로 말미 암아 느부갓네 살의 꿈을 알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 대단한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로써 그는 자신의 생명과 박사들의 생명을 건지고 왕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출발부터 굳게 결심하여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로 크게 기뻐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300.2)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상상해 보라! (300.3)
 느부갓네살이 말년에 하늘의 하나님을 높이는 조서를 내렸을 때, 다니엘은 잔잔히 파동치는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그같은 위대한 성과에 일익이나마 담당할 수 있었던 특권에 대해 틀림없이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이 이따금씩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행동함으로써 하나님을 그릇 나타냈다고 상상해 보라. (300.4)
 미가엘이 그가 티끌에서 일으킨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일어설 때(단 12:1) 오스왈드 글라(Oswald Glait)와 안드레아스 피셔(Andreas Fischer) 부부(p. 137)가 나타나 하늘의 별들과같이 영원히 빛나는 모습을 필자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은 다니엘 7장의 예언을 이해했다. 그들은 작은 뿔이 제칠일 안식일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바꾸려 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게 된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안식일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그리고, 그들은 주의 말씀을 듣고 지켰으므로 지금과 영원히 한없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300.5)
 대속죄일/대심판의 날은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위하여 십자가로 상처난 손을 들고 계신다. 지금이야말로 “네 마음을 괴롭게 하여”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의, 그리고 여러분과 이웃 사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도록 해야 할 때이다. 지금은 하나됨(대속이란 뜻의 영어 단어 Atonement를 파자(破字)하면 At—one—mental가 되는데, 그 뜻을 새겨 보면 “하나 됨”이라 한다)을 실현할 시기이다. 여러분들은 “1만 달란트”의 죄빚을 용서 받았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 일백 원의 죄빚을 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었는가? 그분의 피로 당신의 영혼에 파묻힌 원한을 씻어냈는가? 분명히 여러분들은 영원히 그 곡한 마음을 품어 두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가지로”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에 대한 죄를 씻어 정결케 해야 될 때이다. (3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