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을 내밀라 제 1 장 믿음을 활용하여 치유 받은 기적들 기적 7 ► 네 소원대로 되리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68.7)
 예수님께서 자신을 개로 취급하시는 게 아닌가! 그만 실망하여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자녀의 떡”이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구원을 의미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犬)같이 취급했기 때문에 구원의 축복을 그들에게 던지는 것은 낭비라고 여겼다. 예수님도 그와 같은 일반적인 생각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개같이 취급을 받아 경멸을 당한 이 여인은 욕을 하며 떠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표정에서 그 이면에는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웃음을 띤 그분의 얼굴에 동정이 서려 있었고 눈빛에는 긍휼이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런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사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시험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68.8)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68.9)
 이는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의 긍휼을 원한다는 호소였다. 민족적 편견을 초월해서 애걸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러설 줄 모르는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셨다. 드디어 치유를 선포하셨다. (68.10)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68.11)
 “주여, 너무나 감사하나이다.” (68.12)
 그녀의 소원은 일구월심 귀신들려 아픈 딸이 낫는 것이었다. 주님이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선포한 바로 그 시로부터 딸의 병이 나았다. 귀신은 물러가고 건강하게 된 것이다. (68.13)
 이 여인은 민족적 편견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교만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계속 호소하여 그의 소원을 성취시켰던 것이다. 이로 보아 처음에 여인의 간청에 침묵하신 것은 단순한 거절이나 냉담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의 여부를 알고자 시험하고 계셨던 것이 확실하다. 또한 그녀의 믿음과 인내를 더욱더 깊게 하고자 하는 의도적(意圖的) 침묵이었던 것이다. (69.1)
 이 사건은 복음서 기록에서 예수님이 이방인을 대하여 목회하신 네 번째 경우이다. 첫 번째는 사마리아 수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신 사건이고(요 4:5-42), 두 번째는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신 일이며(눅 7:1-10), 세 번째가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미친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이다(막 5:1-20). (69.2)
 예수님께서는 왜 기적을 행하셨을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기적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에게도 신실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복음은 만민을 위한 것으로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영혼의 가치가 있다. 연령, 계급, 국적, 피부색 같은 것에 관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 똑같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8-29)고 기록했다. (69.3)
 그러면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께 어떻게 간구했길래 자기의 딸이 고침을 받았을까? 그 과정을 한번 분석해 보면 치유 받은 요인을 알 수 있다. (69.4)
 첫째, 예수님께서 자기 딸의 병을 능히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다. 여인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도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분이 유대인들이 말하는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라는 것을 믿었다. (69.5)
 둘째, 이 여인의 딸이 치유함을 받은 요인은 믿음의 활용이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믿음으로 그분에게 마구 달려갔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 앞에 넓죽이 엎드려 딸의 치유를 간청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님께 나아가 간청한다는 것은 대단히 용감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치유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으로만 믿어서는 안 된다. 이 여인처럼 믿음을 활용해야 한다. 예수님께 나아가 엎드려 간구해야 한다. (70.1)
 여인이 예수님께 나올 때 맨 먼저 한 것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항복이요 경배의 자세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며 그녀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다는 뜻이다. (70.2)
 셋째, 끈덕진 간구이다. 그녀는 주님께 불굴(不屈)의 인내로 집요하게 매달렸다. 거절을 당하고도 절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계속 간구하여 딸의 병이 나은 것이다. 첫 간청에 예수님은 본체만체하며 그냥 길을 가셨다. 여인은 실망하지 않고 집요하게 따라가며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거듭 간청하였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거절했을 때도 경멸스런 말에 개의치 않고 계속 끈질기게 매달려 간구했다. 그녀의 간절한 간청 때문에 주님께서 결국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선포하셨으며 그 때 그녀의 딸이 고침을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눅 18:1)한다. (70.3)
 사실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할 수 있었던 것은 딸에 대한 극진한 모성애(母1生愛) 때문이었다. 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기에 이방인으로서 낯선 이국인(異國人)에게 나가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절과 경멸에도 불구하고 계속 간청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온통 사랑이었다. 이와 같이 모성애는 자녀를 향해 일방적으로 뻗어 가는 본성적인 사랑이다. (70.4)
 새끼들을 거느린 한 쌍의 원숭이를 심리 실험에 사용해 보았다고 한다. 먼저 어미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를 철판을 깐 방에 넣고 불을 땠다. 바닥이 뜨거워지자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자기 몸 위에 올려서 살리고 죽었다. 그 다음으로 아비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를 같은 방법으로 실험해 보았다. 새끼 원숭이는 죽었고 아비 원숭이는 살았다. 왜냐하면 아비 원숭이가 새끼를 깔아뭉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성애는 부성애(父1生愛)보다 대개 강한 것이다. (71.1)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71.2)
 나는 오늘의 치유 기적 사건에서 모성애로 충만한 이방 여인의 모습 때문에 위대한 믿음을 배운다. 나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 (71.3)
 또한 이 여인을 도와주기 위해 그 머나먼 길을 가신 주님의 사랑에 크나큰 감동을 받는다. 예수님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를 항상 찾아가신다. 사실 이 지방으로 가신 것은 기적을 행하시기 위함이었다. 화잇 부인의 말을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이 여인의 사정을 아셨다. 예수께서는 여인이 당신 보기를 사모하고 있음을 아시고 짐짓 그 여자가 있는 길로 오셨던 것이다. 그 여인의 슬픔을 덜어주고 그가 가르치고자 하신 교훈을 실제로 보이실 수 있을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런 목적으로 제자들을 이 지방에 데려오신 것이다”(시대의 소망 2권, 157). (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