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14 장  안식일, 기억과 기념의 세계
 사랑의 관계에서 기억의 소망은 상호 교환적이다. 기억하고 잊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 한쪽만의 희망사항이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결코 기억의 소망에 있어서 피동적이거나 소극적인 입장에 계신 분이 아니시다. 그는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인간의 기원을 들어주시는 역할만으로 만족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책에 기록하고 당신의 손바닥에 기록하고 당신의 마음에 새기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에 두고 사람의 생각에 새기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409.3)
 하나님은 사람의 “기억의 간청”을 들으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기억을 간청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당신의 이러한 간청을 호소함으로써 사람을 당신의 존귀한 인격적 파트너로 높이었다. 사람을 하나님의 간청을 물리칠 수도 있는 당당한 사랑의 주권자의 자리로 높이었다. 이제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수하 병졸들이 아니다.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한 쪽, 친교의 한 쪽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궁전의 여왕이다. (410.1)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눈물도 피도 없는 무감동의 복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을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더불어 경험코자 하는 삶은 무미건조한 명령과 복종의 기계적인 삶이 아니다. 열정 없는 봉사, 생명 없는 봉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인격과 인격이 깊고 높은 차원에서 주고받고 어우러지는 질 높은 삶이다. 살아 약동하는 삶이며, 진, 선, 미의 삶이다. 거룩이라고 표현되고 천국이라고 표현되고 영생이라고 표현되는 최고의 삶이다. (410.2)
 이 삶을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고 사람도 창조하고 안식일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창조주일의 마지막 날인 제칠일 안식일에 경험했다는 “안식”의 경험이 그러한 삶이었다. 하나님의 창조가 끝나고 완성되는 차원에서 도달한 삶의 경험이었다. 글자 그대로 “끝내주는” 차원의 경험이었다. 그것이 안식일의 안식이었다. 이 경험이 하나님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대하는 삶이다. 이 삶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었다. 이러한 삶은 대등한 인격끼리의 사랑에서만 가능하다. 사랑의 관계는 상대방을 대등한 인격의 자리로 올려놓는다. 온전히 자유롭고 온전히 자발적인 반응만이 사랑이라 할 수 있다. (410.3)
 이러한 사랑을 위해서는 창조주 하나님도 인간의 사랑을 구애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인간의 마음을 두드리는 자가 되어야 하고, 문 열기를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하며, 문 열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비천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로 올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의 호소를 물리칠 수도 있는 자리로, 하나님을 기다리게 하고 초조하게 할 수 있는 자리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는 자리로 사람을 올려놓아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엮어내는 사랑의 관계는 이렇게 호소하고 호소를 받아들이고 또 두 가지 역할을 서로 교환하는 관계이다. (411.1)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계명에서 우리는 사람의 사랑을 구애하며 자신의 사랑도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기억 속에 간직해 주기를 간청하는 자의 자리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억의 간청자”로서 우리의 마음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서 계신다(계 3:20). (411.2)
 안식일의 계명은 한 날의 기억을 요청하는 계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 하는 계명이다. 우리는 6일 동안 늘 제칠일 안식일 한 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칠일 안식일에만 안식일을 기억할 뿐 아니라, 6일 동안 살면서 매일 제칠일 안식일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411.3)
 안식일 계명은 제칠일 한 날의 기억을 통해 한 분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계명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한 분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요청이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애쓰신 여러 일들과 그 여러 일들의 날을 기억하기 위하여 안식일 하루를 기억하라는 요청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 제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 . 이는 엿새 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출 20:8, 10, 11) 하였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고”(시 5:12, 15), “저희의 주림을 인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고 저희 목마름을 인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 . 또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구원하셨나니”(느 9:15-28),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시느니라”(신 5:15)고 하였다. 진실로 하나님은 수많은 날의 수많은 곤경에서 사람을 구원하신 여호와이시다. 안식일은 사람을 창조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여러 날들의 여러 일들을 기억하는 날인 것이다. (411.4)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애쓰신 여러 날의 여러 일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제칠일 하루를 온전히 구별하라는 요청이다. 개인적으로, 가족적으로, “네 문안에 유하는” 모든 사람과 모든 가축이 몸과 마음으로 이 한 날을 구별하여 기억하라는 요청이다.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는 것이다. (412.1)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공간 속에서 찾을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속에서 그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모습을 파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마지막 행위가 나타날 미래까지 과거와 오늘의 기억들을 간직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모습을 파악하기 위하여 먼 미래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릴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예언 속에서 우리 앞에 있을 하나님의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미래는 이미 우리의 과거가 되었고 우리의 기억이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과거와 현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미래를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요청이 안식일 계명이다. (412.2)
 하나님의 마음과 모습은 늘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있다. 기억과 기억으로 하나님의 모습은 형성된다. 그 기억이 사라지면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사라진다. 하나님의 기억 하나가 마모되면 하나님의 마음과 모습의 한 마디가 마모되는 것이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의 한 부분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413.1)
 기억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취가 성령의 발자취이다. 우리의 발이 거룩한 역사의 기억을 디딜 때 우리는 성령의 발자취를 딛는 것이다. 기억의 자취를 밟을 때 성령의 운동력을 밟는 것이다. 성령의 발자취를 따를 때 우리의 삶이 성령의 흐름을 밟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는 것이다. 기억의 골짜기야말로 아직도 하나님의 영감이 묻어나고 하나님의 생명이 숨쉬고 샘솟는 곳이다. 기억의 하늘이야말로 하나님의 광채가 어려있는 삶의 여명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숨이 샘솟는 기억의 골짜기이며, 하나님의 광채가 빛나는 기억의 하늘이며, 성령이 파도치는 기억의 바다이며, 성령의 발자취가 선명한 기억의 오솔길이다. (413.2)
 하나님의 이러한 기억들은 사람이 기억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을”(겔 20:13 참조) 생명의 기억들이다. 안식일은 우리가 기억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을 생명의 날이다. 이 기억에 하나님께서 계시며, 이 기억에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기억 속에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우리의 삶이 있다. (413.3)
 하나님이 이 기억을 사람에게 간청하고 있다. 안식일을 통하여 간청하고 있다. 안식일을 통하여 생명과 사랑의 이 기억으로 사람을 초청하고 있다. 그리고 생명의 화답으로, 사랑의 반응으로 이 초청을 수락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생명체는 호소와 반응으로 자신의 본성을 증명한다. 무엇을 호소하며, 어떤 호소에 반응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호소는 하나님의 차원 높은 생명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호소이다. 그는 자신의 호소를 통하여 자신의 차원 높은 생명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한 호소에 반응하는 또 하나의 존귀한 생명체를 기대하고 있다. 거룩한 호소와 거룩한 반응으로 어우러지는 거룩한 삶의 향연을 갈망하고 있다. 사랑과 보은이 어우러지고 은혜와 감사가 어우러지고 기쁨과 기쁨이 어우러지는 삶의 대(大) 향연을 갈망하고 있다. (414.1)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하나님의 호소에 배반한 인류의 역사를 생각할 때, 나는 문득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마 18:22)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회상했다. 안식일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그 큰사랑을 기념하지 못하는 인류의 모습은 일만 달란트의 은혜에 백 데나리온의 보은도 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불한당의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보은의 계명이다. 안식일을 등한히 한 서구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삶을 등한히 한 역사였다고 한다면 지나친 험담이 될 것인가? (414.2)
 하나님은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행한 나의 선행을” 모두 기억하신다(느 13:14). “또 내가 레위 사람을 명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 .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한. . . 일을 기억하신다”(느 13:22, 30, 31).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하신다”(시 132:1). 사람의 파 한 뿌리의 적선을 기억하시고, 사람이 물에 빠진 거미 한 마리를 건져준 적선을 기억하신다. 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호소하시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4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