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1 장 요한 바오로 2세와 안식일 제 1 부 안식일과 일요일의 신학적인 관련성
 교황이 일요일을 안식일의 창조와 구속의 확장된 완전한 표현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매우 훌륭하지만, 성서적이고도 역사적인 지지가 부족하다. 신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안식일의 창조적이고도 구속적인 의미의 구현으로 해석했다는 지적이 전혀 없다. 성서와 역사적인 전망에서 볼 때, 일요일이 안식일이 될 수 없는 것은 두 날들이 권위의미, 그리고 경험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이다. (11.2)
 권위에 있어서 다른 점
 권위에 있어서 다른 점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은 분명한 성서적인 명령에 놓여 있는 반면에(창 2:2-3; 출 20:8-11; 막 2:27-28; 히 4:9), 일요일을 지키는 것은 사회적, 정치적, 이교적, 그리고 종교적인 요인들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끌어 왔기 때문이라는 사실 가운데 놓여 있다. 본인은 이태리 로마에 있는 교황청 그레고리 대학(Pontifical Gregorian University)에서 출판된 본인의 논문 안식일에서 일요일로(From Sabbath to Sunday)에서 이러한 요인들에 대해서 상당히 길게 다루었다. 일요일 준수의 성경적 권위의 결함이 요한 바오로가 상당히 애석하게 생각하는 일요일 준수의 위기를 가져온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이다. (11.3)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서구 세계에서는 그들이 지키는 일요일을 하나님의 임재나 평화를 찾는 거룩한 날(a holy day)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즐거움과 유익을 추구하는 휴일(a holiday)로 본다. 본인은 일요일의 세속화를 촉진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일요일을 성일로 지키도록 하는 성서적인 하나님의 명령이 없다는 편만한 생각 때문으로 생각한다. 일요일을 거룩한 안식일로 준수해야 한다는 성서적인 확신의 결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로하여금 왜 아무런 부담 없이 일요일을 주님께 바치기보다는 그들 자신에게 바치는지를 보여준다. 만일 교황이 입증하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일요일 준수의 원칙이 창조 시에 하나님에 의해 주어져서 후에 십계명에 “각인”되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적절히 행동하도록 강요받는 느낌을 느꼈을 것이다. (11.4)
 의미에 있어서 차이점
 요한 바오로는 일요일 준수를 도덕적인 명령으로 만들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며 그는 안식일의 계명 자체에 그날의 뿌리를 내리므로 그 날을 완성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 일은 일요일이 안식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 두 날은 서로 다른 의미기능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창조, 완전하신 구속, 그리고 최종적인 회복을 기념하게 하는 날인 반면에, 일요일은 초기의 부조들의 문헌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일 중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신 것에 대한 축하와, 여덟째 날에 표상 된 새로운 영원한 세계의 우주적인 종말론적 상징이며, 그리스도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신 것에 대한 기념일이다.23) (11.5)
 일요일을 역사적인 그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본래 안식하면서 여호와를 경배하는 날로 준수하라는 요구가 없다. 예를 들자면 빛의 창조가 이루어진 첫째 날인 주일 중 일요일에 쉬면서 경배해야 한다고 제시한 곳은 성경에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볼 것이지만 비록 부활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주일 중이나 매 년의 일요일 축제를 본래 요구하지 않는다. (12.1)
 일요일을 성서적인 권위와 의미를 가진 안식일로 바꾸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축제의 날이 바뀌어질 때 그 똑 같은 권위와 의미, 그리고 경험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만일 어떤 사람이나 어떤 조직이 미국의 독립일을 7월 4일에서 7월 5일로 변경했다면 새로운 날을 합법적으로 독립 기념일로 축하 받도록 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12.2)
 이와 유사하게, 만일 안식일의 축제가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로 변경된다면 그 첫째 날이 안식일과 표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와 구속의 행위, 그리고 최종적인 회복을 기념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안식일의 신학적인 의미와 기능을 일요일에 투입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거룩한 날을 일상적인 일을 하는 날로 바꾸므로 하나님의 제도를 불순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12.3)
 경험에 있어서 다른 점
 세 번째는 안식일과 일요일의 다른 점은 경험에 있어서이다. 일요일의 준수는 주로 예배의 시간으로 시작되었고 또 그렇게 남아 있는 반면에, 안식일의 준수는 성경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24시간(twenty-four hours)으로 제시되고 있다는데 있다. 콘스탄틴 황제와 교회의 회의들, 그리고 일요일을 전적으로 휴식과 예배의 날로 삼으려던 청교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사실은 일요일을 지킨다는 것은 교회에 출석하는 날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는 이러한 역사적인 현실을 “교회의 날, 성체성사의 모임: 일요일의 심장”이라는 제목의 사목교서 제3장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 장의 요점은 일요일의 준수의 심장은 미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교리문답서에서 “일요일이 주의 날 축제와 그분의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의 심장에 위치해 있다”24)라고 말한다. (12.4)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의 종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요일 준수의 종말도 되는 것이다. 교회의 예배가 파한 후에 그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쇼핑하기 위해서 백화점에 가며, 구기 운동을 즐기고, 댄스 홀에서 춤을 추며 극장에 가기도 한다. 비록 성경 서점 가에서조차도 많은 상점들이 교회 예배가 마치자마자 곧 문을 열고 장사를 하기 시작한다. 기별은 분명하다. 일요일의 쉼은 일상적인 일이다. (12.5)
 이러한 역사적인 현실에 대한 인정은 가톨릭 교회의 유명한 언어학자인 크리스토프 키에슬링(Christopher Kiesling)으로 하여금 일요일을 쉬는 날로서의 개념을 포기하고 예배의 날로 유지하려는 것에 대해서 반문한다.25) 그의 이론은 일요일이 한번도 전적인 휴식의 날이나 예배의 날이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날을 성 일이 아니라 휴식을 즐기는 날로 삼고 있는데 근래에 이르러 그 날을 예배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2.6)
 그러나 안식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날의 24시간(twenty-four hours)을 주님께 전적으로 드린다는 것을 뜻한다. 안식일 계명은 “안식일을 안식일 학교와 설교 예배에 참여하므로 거룩하게 지켜라”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not). 그 계명이 요구하는 것은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에 주님을 위해서 쉬라(출 20:8-11)는 것이다. 이것은 안식일 준수의 본질이 시간의 성별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주님을 위해 쉬는 행위는 모든 안식일의 활동들, 즉 그것들이 형식적인 예배이든지 비형식적인 놀이든지 간에 예배의 행위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 모든 활동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로 결정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12.7)
 주님을 위해 안식일에 쉬는 행위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평화, 그리고 쉼을 더욱 완전하고 더욱 자유롭게 의식하고 경험하므로 하나님의 안식(히 4:10)에 들어가는 방편이 된다. 안식일을 지키는 이러한 독특한 경험은 일요일을 지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 이유는 일요일 준수의 본질은 시간의 신성성에 있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출석과 그 후에 뒤따르는 세속적인 활동들에 있기 때문이다. (13.1)
 앞서 고려한 것들의 빛을 통하여 우리는 일요일을 신학적으로, 실존적으로 안식일의 구현으로 만들려는 교회의 시도는 두 날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권위와 의미, 그리고 경험에 있어서 종래는 실패할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