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을 내밀라 제 3 장 신적 권위를 직접 드러내신 기적들 기적 11 ►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뭐, 얼굴 모습은 바로 그 사람인데.” (197.8)
 고침 받은 소경이었던 자가 자기 신원을 밝혔다. (197.9)
 “내가 바로 그 소경입니다.” (197.10)
 선천적인 소경의 눈이 볼 수 있게 떠진 것을 의아해 하면서 물었다. (197.11)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97.12)
 그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197.13)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이처럼 눈이 떠져 보게 됐습니다.” (197.14)
 “안식일에 그런 일을 시켰단 말인가!” (198.1)
 “그 자가 안식일에 병을 고쳤으니 중죄를 범한 것이다.” (198.2)
 “네가 증인이니 함께 가서 증언을 해야겠어.” (198.3)
 이제는 그들이 안식일에 소경을 고친 예수님의 행적에 관심을 가지고 그를 바리새인에게 데려갔다. 그들은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 (198.4)
 바리새인들의 편견과 왜곡에 의한 이런 저런 일이 있은 다음 예수님께서 소경이었던 그를 만나자 물으셨다. (198.5)
 “인자를 믿느냐” (198.6)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198.7)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198.8)
 “주여 내가 믿나이다.” (198.9)
 그는 예수님께 엎드려 절을 했다. (198.10)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소경을 고쳐 주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을까? 그것은 소경을 보게 하는 것이 그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천적 소경을 보시자마자 그분의 동정심이 발로되어 치유해 주신 것이다. 소경이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직접 간청한 일이 없었고 혹은 그의 친구들이 그를 고쳐 달라고 간청한 일도 없었지만 주님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자신의 할 일을 하신 것이다. 이는 귀신에 눌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신 이치와 똑같다. 비록 그날이 안식일이었지만 고소자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당연히 당신의 일을 하신 것이다. 옳은 일이기 때문에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담대히 당신의 일을 하신 것이다. (198.11)
 소경이 고침을 받은 것은 그 나름대로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에 주님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왜나하면 주님께서 치유 후 신앙고백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를 만났을 때에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셨고 그 사람은 즉시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며 주님께 엎드려 절을 한 것이다. 치유 과정을 살펴보면 소경에게 나름대로의 믿음은 있었던 것 같다. 주님께서, 구걸하던 소경에게 금전은 주지 않고 단지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고 하였을 때에 만일 소경이 “내 눈에 더러운 침으로 이긴 흙은 왜 바릅니까? 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고 멸시하는 것입니까? 앞 못보는 사람이 실로암 못까지는 어떻게 가란말입니까? 나는 싫습니다. 절대로 못합니다”라고 하며 침 바른 것을 불평하고 실로암 못으로 가지 않았다면 그의 눈은 결코 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경은 주님께서 눈에 진흙을 발라 주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을 때 그것을 개의치 않았고 단지 믿음으로 순종했다. 그래서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198.12)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실 때에 당신의 침을 이용하셨다. 이제 소경을 고칠 때도 침을 사용하셨다. 왜 그분은 비위생적이고 괴이한 방법으로 병을 고치셨을까? 사실 유대인 사회에 훌륭한 사람의 침은 효능이 있다는 일반적인 관념이 있었다. 침을 사용하는 것은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지극히 일반적인 일이 됐다. 주님께서 맹인을 치료하는 데 단지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이용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벌레에 물렸거나 데었을 때에 자신도 모르게 얼른 침을 바른다.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