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흰옷과 영생을 주셨다.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하신 분인데 우리가 우리의 부주의로 잃어버린 돈 지갑을 찾는 데 그분이 도와 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등을 돌려야하겠는가? 그리고 백보 양보하여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이웃들에게 욥과 같은 믿음과 인내를 보여 주게 하려고 20 년 동안 고통을 당하게 했다고 하여 하나님을 포기해야 옳은 것인가? 20 년 이래야 우리가 누릴 영생에 비교한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203.7)
 하나님의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아 8:7)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203.8)
 죽음 자체도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치게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사랑을 기억하기를 바라신다. 우리 곁을 악한 세 기사가 치달려 갈 때,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할 때, 또 우리의 개인적인 박해자들이 우리를 제단 밑으로 처 넣을 때, 그 때에 이 사랑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203.9)
 5. 어린 양은 이기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중상과 뇌물과 인민 재판과 경찰의 야만 행위 등의 희생자였다. (203.10)
 그는 비웃음을 당하셨고 잘못 인식되셨으며 고문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런데 이십 사 장로 중 요한에게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소개한 한 장로는 그가 “이기었”(계 5:5)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모든 쓰라림을 이기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앙갚음” 하려는 모든 유혹을 극복하셨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된 까닭은 그가 이겼기 때문이라 하셨다(계 3:21). 그는 우리에게도 이기고 당신의 보좌에 함께 앉도록 하라고 초청하신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욕을 받으실 때 어떤 본을 남기셨는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 그러한 그의 자제력의 비결은 어디에 있었는가? 베드로전서 2장 23절은 대답하기를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보고 계심을 믿으셨다. (204.1)
 난폭한 병사들이 두 손이 묶인 채, 서 계신 예수님의 얼굴에 헛기침을 하면서 침을 뱉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수염을 뽑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타하여 만신 창이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잠하셨다. 수 세기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성공의 비결을 인식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의 권리들을 옹호해 주실 것이란 사실을 확고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그 권리들을 위해 싸울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마음에 “정녕히 나의 신원(伸寃)이 여호와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였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사 49:4, 50:6~8)다. (204.2)
 예수님이 이긴 가장 큰 원수는 물론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히 2:14)이며 사망 자체인 마귀이다. 고문을 당해 죽으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다른 사람들까지 살리셨다.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요 11:25)다. 그는 “사망의 열쇠”(계 1:18)를 가진 분이시다. (204.3)
 예수님은 죄와 죽음과 사단을 이기셨기 때문에 그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악한 기사들과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에 대해 말씀해 주실 유일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권리들을 보살피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라. 우리도 어려움과 쓰라림과 마귀와 죽음을 이길 수 있다. (204.4)
 6. 어린 양은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이십 사 장로들과 생물들의 노래였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을 구속하고 속량하셨다. 그는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계 5:9, 10) 사람들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사 저희로 땅에서 왕 노릇하게 하셨다.” 노예들과 포로들과 유괴된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면 자유롭게 된다. 예수님은 갈바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몸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속량하셨다. 속량한 노예들을 불러다가 그들로 제사장 나라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왜 오직 어린 양만이 일곱 인을 떼실 수 있는 것인지 그 근본 이유를 인식하게 된다. (204.5)
 7.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시다
 구약 시대의 제사 의식에서는 성전에서 날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어린 양을 희생으로 바쳤다. 물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희생 동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린 양을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제사는 해마다 한 번씩 치르는 유월절 제사였다. 유월절 양은 가장 중요한 양이었다. 예수님은 유월절 날에 우리의 몸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 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하였다. (204.6)
 흠정역 영어 성경에서는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되셨다”고 했다. 새 국제 번역 성경(New Intermational Version)에서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 스도께서 희생되셨다”고 했다. (204.7)
 

출애굽 전날, 근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족들은 아버지들이 양들을 죽이고 그 피를 집 문틀에 바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205.1)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월절 양이시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이란 낱말을 읽을 때 “유월절 양”을 생각해야 한다. (205.2)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성경 시대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의 긴 종살이를 끝내고 탈출한 그 잊을 수 없는 위대한 밤을 기념하여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은 또 유대 민족이 탄생하던 시절을 상기시켜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주일 후에 시내 산 기슭에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 도망자들을 모으시고 모세를 통해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20)고 선포하셨다. (205.3)
 제사장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의 소유자를 뜻한다.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영예이다. (205.4)
 그러나 이같은 영예가 있기 전에 애굽으로부터 탈출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그 도피의 한 대가가 유월절 양이었다. (205.5)
 오늘날에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죄의 노예 생활과 죽음의 공포라는 애굽을 피하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나온 개개인을 돕고 계시다. 예수님의 백마(白馬) 기사는 온 땅을 질주하며 초청의 말씀을 외치고 있다. 이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선민”(選民), 곧 그리스도의 복수 민족(複數民族) 왕국,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벧전 2:9). 요한은 일곱 인의 마지막에 가까운, 즉 마지막 시대의 과업과 보장이 펼쳐지는 장면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행복한 백성들을 보았다. 그들의 이 같은 신분을 위해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라는 비싼 대가가 치러졌던 것이다. (2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