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6 장. 안식일:봉사의 기쁜 소식 I.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서의 안식일
 이같은 제안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말로 들릴지 모르겠다. 키슬링의 표현을 빌어 말한다면 “기독교의 실재로서의 일요일 안식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고 일요일 예배는 생활에 대한 그 영향력을 신속히 잃어 가고 있기”12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달리 말해서 이미 기존하는 일요일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마당에 성경적인 안식일 준수로 돌아가자는 호소는 얼빠진 소리 같이 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요일 안식과 예배가 쇠퇴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이나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 일요일을 준수해야 된다고 하는 명령이 없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라할 수 있는가? (159.2)
 어느 기독교인이 그가 지키는 일요일은 교회가 임의로 편의상 제정한 예배일로서 원칙상 그가 꼭 그날을 어떤 특별한 날로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진지하게 일요일을 지키리라고 기대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반면 만약에 성경이 말하는 제칠일 안식일의 풍부한 의미와 경험을 재발견하고 수용하게 된다면 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안식일 안식과 예배와 휴양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동기를 유발시키는 신학적 확신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한다. (159.3)
 분명히 많지 않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의 준수로 돌아오라는 호소에 응답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거룩한 날(holy day)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개인적인 쾌락을 즐기는 휴일들(holi day)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독자는 4백만에 가까운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과 그밖에 수십만이 넘는 다른 교파 기독교인들이 이미 이러한 호소에 응답하여 기쁨으로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13  (159.4)
 그러나 숫자 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하나의 계명을 그 계명이 우리 사회의 만연된 물질주의적 관심에 상처를 준다고 하여 그 계명을 선포해야 할 자신의 책임을 포기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대중의 열망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의 기능은 백성들에게 회개하여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태도의 변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 새로운 예배 경험을 요구한다. (159.5)
 이러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교회가 사용해야 할 몇가지 제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의 하나가 바로 안식일이다. 이 날에 그리스도인은 실지로 이날 하루 동안에 이 같은 생활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람의 사는 도리와 하나님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는 안식할, 즉 자신의 일과 여가와 자신의 총체적 존재를 산 제사(롬 12:1)로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 안에서 쉼과 평화를 얻기 위하여 시간을 구별하려는 동기를 갖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추상적인 설교 보다도 더 효과적인 학습도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또 주일의 평일들에 대한 하나의 귀감과 도전으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159.6)
 2.하나님께 대한 봉사로서의 예배. 왈터 J. 하렐 손(Walter J. Harrelson)은 예배를 정의하여 “개인과 집단의 생활 속에 나타난 거룩함에 대한 질서있는 응답”이라고 말했다.14 질서와 거룩(신성)은 진정한 예배의 필수적인 두 요소일 뿐만 아니라 안식의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안식일의 신성성은 3장(章)에서 이미 보았듯이 안식일이 하나님의 임재의 표명과 경험을 위하여 제공하는 특별한 계기(繼起)에 있다. 안식일의 질서는 그날이 사람들의 생활에 질서를 갖추게 하는 방식 속에 나타난다. (160.1)
 인간은 경험하는 시간의 리듬이 혼란스러워 지거나 단조로워질 때에 만족의 도가 떨어지게 된 존재이다. 충족되고 즐거운 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노동, 여가, 연구, 예배, 자신, 타인들을 위하여 각각 지성적으로 배분(配分)할 필요가 있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1주일, 한 달, 1년의 형태로 구성된 일련의 날들을 일반적인 것과 거룩한 것으로 적절히 구분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구분하는 목적은 평일들을 희생시켜 안식일을 드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영적인 가치와 경험을 가지고 평일들을 더욱 부요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160.2)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안식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질서 정연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라는 분부이기도 하다. 그처럼 정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모든 세속 활동을 의도적으로 중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하여 안식을 취하는 행위 자체야 말로 가장 의미 심장한 예배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날 종일의 전체 예배 경험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고 신자들에게는 풍요케 하는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안식일의 시간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 (160.3)
 특별한 순서로 공식화하려는 여하한 시도도 결국 율법주의적 안식일 준수로 전락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렇게 되면 안식일의 기본 정신인 자유와 기쁨이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프로그램이나 규칙들을 제시하는 대신에 목표들과 원칙들만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따라서 안식일에 행할 특별한 활동들의 세목을 독단적으로 나열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현 실정에 맞는 성경의 몇가지 원칙들을 확인하는 일이 가장 현명한 행위이다. (160.4)
 거룩한 봉사. 안식일 계명은 정규적인 종교 집회 즉 “거룩한 예배”에 출석함으로써 제칠일을 지켜야 한다고 뚜렷하게 분부하고 있지는 않다. 이 점은 하나님의 지혜를 잘 반영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우리는 수 세기에 걸쳐 오면서 고립된 가운데서 안식일을 성별(聖別)해야 했거나 자선의 활동을 해야 했던 신도들의 곤경이 참작되었음을 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예배의 공중 집회 장소가 되어온 유대인 회당만 하더라도 유대교 역사의 후기(바벨론 포로 또는 그 이후)에 발전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15  (160.5)
 또 회당 예배는 가정 예배가 커지게 되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출 16:29). 고대 이스라엘 가족의 권속들은 인척들과 하인들을 포함하여 현재의 우리들의 가족 규모를 훨씬 능가했던 것(신 5:14)을 고려할 때 그같은 가족의 가정 예배는 오늘날의 조그마한 예배소의 규모는 족히 되고도 남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160.6)
 안식일의 종교 집회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건 간에 “성회”(聖會 레 23:2)가 안식일의 뚜렷한 특징이 된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사태의 발전은 안식일의 신학적 방향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신 5:14; 출 20:10)께 두고 또 안식일에 일을 쉬는 혜택을 모든 사람에게 부여함으로써 더욱 순조로와졌다고 추정된다. 달리 말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게 되었다는 요소가 이러한 목적을 위한 공중 집회를 고무시켰으리라는 것이다.16  (161.1)
 구약 시대에 어디에서 이러한 회집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짐작컨데는 신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예배가 개인 가정에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열왕기하 4장 23절을 미루어 보건데 B.C. 9세기에는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안식일에 선지자를 방문한 것 같다. 선지자의 거처에서 종교의식이 거행된 것만은 분명하다. 앞 장(章)에서 우리는 안식일에 성전의 종교 의식들이 강화된 것을 보았다. (161.2)
 이사야서에서는 불행하게도 회개는 하지 않았으면서 부지런히 안식일에 성전 마당으로 모여오는 예배자들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다(사 1:12~15). 신약 성경과 유대의 자료의 증언을 미루어 보건데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회당에서 거행되는 안식일 예배의 중요성이 대단히 커졌다. 기독교의 예배의식은 주로 회당의 예배 의식을 모방한 것이다.17 (161.3)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규례대로 안식일 예배에 출석한 것도 이러한 공중 예배 경험의 유효성과 가치를 강화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안식일 예배의 가치는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하는 활동에 대하여 갖는 이해에 의존하고 있다. 그같은 이해가 결여될 때 주말마다 갖는 예배 출석은 공허한 형식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따라서 형식적인 안식일 예배의식의 기능을 검토하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안식일의 잔여 부분을 특징짓는 “비공식”의 예배 활동들과 이 예배를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공식적인” 예배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161.4)
 기념. 2장(章)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안식일의 주요 기능은 하나님의 놀라운 업적을 기리는 것이다. 이러한 기념을 하려면 백성들이 함께 모여 안식일 예배 의식을 거행하는 도중에 하나님께 통일된 찬양을 올리는 공식적인 한 국면이 있어야 한다. 안식일의 공중 예배를 그렇듯 특별한 계기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이 대답은 기념되고 있는 하나님의 업적의 위대함 속에서 찾아야 한다. 기념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업적으로 인한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들은 그들의 졸업을 경축하고 운동 선수들과 팬들은 경기의 승리를 축하한다. 아버지는 새로운 자녀의 출생을 경축한다. 전쟁으로 찢긴 나라는 평화 조약의 체결을 축하한다. 사람들은 위대한 공(功)을 성공적으로 이룩했을 때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161.5)
 안식일의 예배 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중요한 사건 즉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그의 놀라운 구속 사업, 그리고 변치않은 그의 사랑과 돌보심의 다양한 표현을 기념하고 즐기기 위하여 모이는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주제의 일부는 “안식일의 찬송”이란 제목이 붙은 시편 92편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신도들은 감사와 찬양의 노래와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연주로 안식일을 경축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시 92:3). 이같이 즐거운 경축의 목적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92:3)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주님의 손의 행사를 찬양하고(92:4), 하나님의 돌보심과 능력을 인정하기 위한 것이다(92:12~15).18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의 경축은 주일의 모든 날에 하나님께 바쳐야 할 모든 진정한 예배의 기초이다. (161.6)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유감없이 표현되고 경험되는 예배는 안식일의 예배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 날이 마음과 몸이 아무 부담없이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의 자유를 주기 때문이며 둘째로 안식일은 인간 역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간섭 즉 창조와 구속과 보존과 궁극적인 회복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창조하셨으며 완벽하게 구속하셨으며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며 끝내 우리를 회복하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할 시간뿐만 아니라 그 동기까지도 마련해 주고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선함을 기쁘고 고맙게 경축할 수 있는 시간과 동기들을 마련해 주고 있다. (162.1)
 거짓 예배에 대한 해독제.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성경은 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의 투쟁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첫번째의 책에서 “이방의 신상들을 버리라”(창 35:2)고 한 하나님의 분부는 그 다음에 있는 성경의 모든 책들에서 다른 형태로 되풀이 되고 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이 분부는 날아가는 세천사의 표현을 빌어 새롭게 제시되고 있다. 이 천사들은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들”(계 14:6)에게 “바벨론”에 의하여 추진된 왜곡된 예배 제도와 “짐승과 그 우상”을 포기하고(계 14:8~11) 또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계 14:7)고 호소하고 있다. (162.2)
 거짓 예배를 포기하고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는 이 엄숙한 호소는 계시록 14장에서 “땅의 추수”(계 14:15)를 준비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눅 18:8)는 수사학적인 질문으로써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참된 예배의 위기를 암시하셨다. (1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