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6 장. 안식일:봉사의 기쁜 소식 I.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서의 안식일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주일 중 평일에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과 안식일에 섬기는 섬김에는 차이가 있다. 평일에는 고용자를 섬기면서 그리고 생활의 여러가지 필요에 대응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 이러한 형태의 매일의 섬김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주님을 은연중에 인정하는 마르다 형(型) 섬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반면에 안식일의 섬김은 그리스도에게 명백하고도 일편단심의 관심을 돌리는, 마리아 형(型) 섬김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세주를 영예의 특별 손님으로 인정하기 위하여 모든 세속적 업무들이 중단된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 소득을 올리는 업무를 중지하는 것 자체가 뜻 깊은 예배 행위인 것이다. 그밖의 안식일의 모든 활동들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 행위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이같은 안식일 행위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의 모든 활동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하나님께 존귀를 돌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작정한 영혼에게서 우러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안식일에 하나님께 바치는 섬김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안식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그 다음에 안식일 안식에 의하여 가능해진 여러가지 행위들을 검토하는 과정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54.1)
 1. 하나님에 대한 봉사로서의 안식.
 전면적인 응답.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안식일의 내용에서 “안식”의 내용과 “예배”의 내용을 분리시키는 뚜렷한 경향을 볼 수 있다. 그 주장을 들어보면 오늘날에는 주일 중 휴일이 하루에서 이틀 또는 그 이상으로 연장되여 노동하는 날수가 짧아졌기 때문에 일곱째 날에 쉬라는 계명은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우리가 이미 3장(章)에서 보았듯이 성경이 규정하는 바 안식일의 휴식이란 단지 인간 중심적 휴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신(神) 중심적인 안식을 뜻한다는 사실을 인식치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지만(막 2:27) 야웨에게 속한 것이다(출 20:10; 막 2:28). (154.2)
 만약 안식일이 오직 육체적, 사회적, 경제적 필요에 응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라면 오늘날에 와서 그것은 마땅히 가치가 의심스러워진 인간 휴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주 2회 혹은 그 이상의 휴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식일의 촛점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즉 “제칠일은 큰 안식으로서 하나님께 거룩한 날”(출 31:15; 16:23, 25; 35:2; 레 23:3)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의 안식은 단순히 지적, 육체적 피로의 일시적 회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쉼”의 반영으로서(출 20:11)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돕는 장치인 것이다. (154.3)
 하나님은 인간의 “안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명과 시간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프란츠 X. 피터쉬(Franz X. Pettirsch)는 말하기를 “이성(理性)을 부여받은 피조물이 이러한 주권에 부합하여 지켜야 할 첫번째 의무는 소유와 재산과 시간과 공간과 작업과 사업을 희생하여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일은 사회—경제적 규칙 이상의 것이 되며 하나님에 대한 영감적이며 심오한 종교적 경의(敬意)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1고 하였다. (155.1)
 안식일의 시간을 하나님께 자원하여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면적 응답의 상징이다. 이것은 한시 간 짜리 예배의 참석으로 끝나지 않고 24시간 계속되는 예배 행위이다.2 이같이 전적으로 주의를 집중한 응답은 무겁게 눌러오는 생활의 요구들로 마음이 가득 차 있는 평일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특별히 하나님을 위하여 안식을 취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분할되지 않고 지각적인 고백을 하나님께 올릴 수 없는 평일들에 대한 자신의 언약까지도 함께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155.2)
 일(작업) 숭배에 대한 치료제. 이 세상에는 작업이 숭배의 대상이 될 위험이 상존(尚存)하고 있다. 생산과 이득에 대한 관심과 누구든지 어떤 종류의 직업이든 그 직업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노동의 가치는 생존의 목적 그 자체로 안식될 만큼 높임을 받게 되었다. 고인(故人)에 대한 찬양은 흔히 “그는 대단히 근면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은 오로지 일 뿐이었다”는 논평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같은 관념이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을 신격화하고 노동을 생존의 최고의 가치로 삼는 치명적 과오를 범하게 하였다.3 (155.3)
 “일 벌레들”은 오직 자신의 일만을 위해 살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돌보심 대신에 자신의 일을 대체시키고 만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안전과 자신의 일의 성패에 대하여 끊임없이 걱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마 6:25~33). 안식일의 쉼은 일에 한계를 둠으로써 노동을 신격화 할 위험을 방지시켜 주고 있다. 사람들은 안식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를 점유하고 있는 모든 일의 주인이심을 배운다. 안식일은 인간에게 자신의 모든 일을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다하여 힘써하라고 분부하고 있으나(출 20:10) 자신의 그같은 활동에 신뢰를 두지는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긍극적인 실재는 일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안식이기 때문이다. (155.4)
 

안식일 안식은 노동에 한계를 설정토록 함으로써 노동 신격화의 유혹을 막도록 고안된 것이다. 안식일은 인간의 생존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노동의 주인은 하나님이 시라고 가르친다. 안식일은 말하기를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제일을 해야 하지만(출 20:10) 그 일에 자신의 신뢰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왜냐? 궁극적인 실재는 . 노동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안식이기 때문이다.
(156.1)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서든지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든지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재산들을 생산하도록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와 봉사를 즐기도록 창조되었다. 안식일은 “창조의 마지막이며 의도의 처음이며 하늘과 땅을 창조한 목적이다.”4 안식일은 6일간의 노동의 목적과 의미가 일곱째 날의 안식에 있다고 가르친다.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안식은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영원한 안식의 예표이며 미리 맛봄이다. (157.1)
 따라서 안식일의 쉼은 일과 인생의 의미 자체를 인식한다는 뜻이 된다. 또 이것은 사람이 안락과 지위를 얻기 위하여 일이라고 하는 우상에게 자신을 굴복시키는 생활 방식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이것은 또 노동이 최고의 가치가 아님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작업에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권리 주장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손으로 하는 작업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또 그 생명을 통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하기 위하여 안식일의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주일 동안에 이룩한 우리들의 적은 혹은 큰 성취를 하나의 예배로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시간을 이용하는 것을 뜻한다. (157.2)
 여가 숭배에 대한 치료제. 노동을 신격화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여가를 주요한 동경으로 삼고 있다. 자유 시간과 개인 수입의 증대는 기계적이며 지루한 직업의 비인간화적인 영향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대(對) 노동 자세를 바꾸게 만든 요소들의 하나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노동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 즉 주말의 휴가를 즐길 경비 충당의 한 수단이다. 이 사람들은 금요일에 그 지겨운 작업을 걷어 치우고 가까운 혹은 먼 장소로 서둘러 떠난다. 그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활동으로 그들의 빈 시간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슬픈 현실은 대개는 그들이 월요일 아침에 생기차고 활력이 넘치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시들고 늘어진 자세로 일터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157.3)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 시간 동안에 기대했던 휴양과 재활을 얻는 데에 실패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그들이 그들의 내적인 영적 필요와 재원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가와 오락과 또는 심지어 육체적인 휴식까지라도 본질적으로 피곤한 육체의 회복에 적합한 것으로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유물주의적 사회의 성전들 즉 축구장, 유원지, 해변, 댄스 훌, 고급 식당, 스키이 유흥지, 국립공원 같은 곳들이 제공하는 쉼만을 찾아 돈을 지불하고 있다. 그러나 그같은 오락장이나 활동 자체들은 기껏해야 자신의 일시적 망각, 일종의 도피만을 제공할 뿐이며 따라서 과도한 탈진과 긴장의 뿌리에 있는 내면의 역적 공허만을 남길 뿐이다. (157.4)
 진정한 소생(蘇生)은 우리 존재의 지적, 육체적, 영적 성분이 하나로 조화있게 통일될 때 발생한다. 안식일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성과 몸과 영의 조화로운 통일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차량(術)이다. A. 마틴(Martin)이 통렬하게 기술했듯이 “안식일의 영성(性)이 인간에게 인간 존재의 통일성, 즉 노동의 조각난 본성 또는 여가의 조각난 본성에 의하여 언제나 파괴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던 그 통일성을 회복시켜 준다.”5 이와같은 통일성은 안식일에 이 안식일이 우리의 노동과 여가와 생명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마련해 주는 영적 재원과 기회들을 통하여 성취된다. (157.5)
 안식일 준수자에게 있어서 일곱째 날의 여가는 여하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善:숨뭄 보눔)이 아니고 좀 더 큰 선(善) 즉 건전한 활동들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선(善)을 경험하기 위한 반가운 기회인 것이다. 어떤 것들이 안식일에 적합한 활동들이냐를 결정하는 몇가지 기본 기준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논의가 될 것이다. (157.6)
 하나님의 안식의 경험. 안식일 안식의 심오한 종교적 본질은 안식일의 상징적 기능에 의해서도 지적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고 풍족하게 하기 위하여 친숙하고도 흔한 상징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방금 안식일의 쉼이 하나님에 대한 전면적 응답, 즉 우리의 일과 여가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 주장의 용납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총체적 존재와 행실의 봉납(棒納)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진정한 예배행위로 만드는 안식일 안식의 상징적 의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앙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최종적인 회복의 안식을 경험하는 기회도 안식일 안식에 의하여 마련되는 것이다. 상징이란 것은 그 상징이 나타내고자 하는 실재를 경험하는 수단이다. (158.1)
 앞에서 우리는 안식일 안식이 뜻하는 실재는 그같은 “안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마 11:28; 눅 4:18~21)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제공하시는 창조와 구속과 최종적인 회복의 안식이란 것을 확인하였다. 이 말은 안식일의 안식이 단지 상실된 정력을 회복시키는 일개 수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광의 왕국에서 누릴 안식과 기쁨을 미리 맛보고 또 이 불안한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안식과 구원의 평화를 경험하는 수단이 된다는 뜻이다. (158.2)
 알프레드 베리(Alfred Barry)는 말하기를 “진정한 안식은 주님 안에서의 안식이며 그 같은 안식은 무언(無言)의 예배”이라고 하였다.6 안식일에 쉬는 것은 무언(無言)이기는 하지만 가장 의미 깊은 예배 행위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의 안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 여금 그리스도의 구원의 안식을 받아들이게 하며 또 하나님 및 하나님의 성도들과의 예배와 교제를 누릴 영원한 안식을 고대하게 하기 때문이다. (158.3)
 일요일을 지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의 안식을 하나의 예배 행위로 인식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과 역사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의 일요일 안식을 특별히 신성시해야 할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카톨릭의 유력한 예배학자인 크리스토퍼 키슬링(Christopher Kiesling)이 말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안식이 4세기에 비로소 시작되었다”7는 것은 거의 공인된 사실이다. 몇세기 후 “일요일의 안식이 종교적인 의의를 부여 받으면서,”8 키슬링의 표현을 빌면 “기독교에 대한 음울하고, 가혹하며 극도로 타 세계적인 해석”9을 낳게 되었으므로 키슬링은 “그리스도인의 관습으로서의 일요일의 안식을 포기하자”10고 제안하고 있다. 키슬링은 기독교의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특징들인 기쁨과 낙관주의와 창조의 수락이 표현되는 “새로운 스타일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1 (158.4)
 사람들은 안식의 경험이 일요일의 본래적 의미와 연관이 없으므로해서 애써 일요일 안식의 신학과 관습을 새로이 개발시켜야 할 필요를 인식해야 했다. 그러나 만약 “기쁨과 낙관주의와 창조의 수락이 표현되는 새로운 스타일의 기독교인 생활이 개발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면 창조와 구속의 기쁨과 낙관주의를 표현하고 경험하도록 하나님이 특별히 제정하신 날인 제칠일 안식일의 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그같은 새로운 형태의 생활을 개발하면 안될 이유가 무엇인가? (15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