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부에서는 내 와이셔츠를 빨아 대느라고 무척 바빴다. 하루에도 왕진을 4-5차했다. 그렇다고 와이셔어츠가 젖을리 만무하나, 병원 자가용은 자전거가 고작이다. 논들 밭들 지나 시골집으로 가는것이다. 사실 바쁘다고 거절해도 되련만 오라는 데는 어디든지 꼬박꼬박 그것도 셔츠 바람이 아니요 양복 정장을 했으니, 한 번 다녀오면 와이셔어츠가 쥐여 짤 정도다. (229.4)
 병원 근무가 끝나면 의명 중학교 교사들과 배구를 하는 것이 마지막 일과다. 이른 여름 과수원에서 즐기던 “이와이”란 사과 맛은 잊을 수 없고, 쉬는 날 개천에서 목욕을 즐기던 일은 한 폭의 그림만 같다. (229.5)
 3. 서울에서 정신 없이 보낸 14 년
 서울 서소문 처가에서의 병원 출근은 고된 생활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시작되는 수술 시간에 맞추어 줄근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차로 청량리 로타리까지 와서 빠른 걸음으로도 병원까지 20분 이상 걸어야만 했다. 그러니,처가에 너무 신세 끼치기가 미안해서 병원 가까운 회기동에 한칸 방을 얻었다. 그리하여, 연탄 난로를 방에 놓고 방도 데우고 음식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에게 너무 부담을 준것 같다. 옆집 우물에 물 길러 갈 때마다 천대를 받았다. 어느 날 아침, 연탄불이 꺼져서 피우느라고 부채질을 할 때 주인 할머니가 “이것 좀 자셔 보우” 하며 갖다 준 우거지 만두맛을 50 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도 잊을 수 없다. (230.1)
 병원 옆 한 칸 방 마루방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다 시동생 두 명의 대학 뒷치닥거리를 해야 했으나 불평 한 마디 없는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한 것이 영원히 한스럽다. 병원에서 구내에 한옥 사택을 지어 주어 한결 편해졌다. 월급 받아 동생들 뒷치닥거리에 다 들어가고 늘 적자 생활을 면치 못했다. 봄이 가고 가을이 지나는 동안 일제 말년이 되었다. 미국 선교사와 미국인 원장도 떠났다. (230.2)
 어느 아침 느닷없이 형사대가 집을 포위하고 가덱 수색을 한 뒤 나를 중부경 찰서로 연행해 갔다. 다짜고짜로, “너 이승만 알지?” 라고 물었다. “네, 잘 압니다.” 이거 큰 거물 잡았다는 눈치다. 자기들끼리 연락이 분주하더니, 이제는 주임이라는 자가 점잖게 시종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230.3)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됐지?” “다름이 아니라, 제동생 하나가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재학중이고 저도 미술에 관심이 많아 동양화가 이승만(李承萬)씨를 잘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 마라! 증거가 다 있는데, 무슨 소리야?” 그들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끈질기게 심문은 계속되고 나는 10일 동안 감방 신세를 졌다. (231.1)
 판에 박은 콩밥, 찬으론 단무지 한 쪽에 콩비지다. 아무 생각 없다. 어서 자유의 몸이 됐으면 하는 것뿐이다. 죄 없이 감방 신세 열흘만 지면 아무런 욕심도 없어진다. 그 곳은 인생 철학이 달라지는 수련장이기도 하다. 자유의 몸이 된 후 알았으나, 선교사들이 떠날 때 고성능 카메라, 무전기 등을 주고 갔다고 무고하였기 때문이었다. (231.2)
 8.15 해방이 되어 기쁘던 꿈이 하루 아침에 깨졌다. 멋도 모르고 맡아 두었던 친구의 권총이 화근이 되었다. 종로서로 연행이 되었다. 3일째 되던 날, 아직 조서도 다 꾸미지 못했던 때였다. 내 이름을 부르기에 조사받으러 나가는 것으로만 알았다. 낯모를 늠름한 미군 대령 한 명이 손에 서류를 한 뭉치 쥐고 나를 기다리고 서 있다. 나를 확인하고 나서는 웃으면서 “고 네버마인” 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231.3)
 나와 보니 아내의 전적 활동의 결과임을 알았다. 아내의 정치적 수완이라기보다는 지성이면 감천이라, 그 정성과 사랑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학교를 졸업하고 외교나 정치와는 거리가 먼 그가 어떻게 그만한 일을 일개 가정주부로서 해낼 수가 있었을까? (231.4)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동생 네명, 조카 한 명의 뒷치 닥거리, 그것도 넉넉한 생활이면 모르거니와 늘 적자 생활에 지친 몸이다. 자다 눈을 뜨면, 밤도 깊었는데 무릎 앞에는 성경이 펼쳐져 있고 기도소리 처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의 일과였다. 캄캄한 구름이 눈앞을 가리고 앞길이 막막할 때, 확신이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기도로 밤을 지새우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하였다. (231.5)
 대담하게도, 그는 당시 서울시경 국장인 장택상을 찾았다. 그는, 까불어 대며 의사가 총이 무어야 하며 상대를 하지 않자 미 고문관 방을 노크했다. 통역관을 통해 순순하게 전후 사실을 설명한 후 남편의 이력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모든 정상을 살핀 고문관은 “부인, 염려마십시오. 내가 곧 종로서로 가겠습니다” 하고는, 그 길로 와서 내 조서를 다 달라고해서 손에 쥐고 나를 불러냈던 것이다. 이제라도 내 곁에 있다면야 두고두고 그의용담을 이야기하며 감사할 것이 아니겠는가! (232.1)
 사랑하는 아내의 주선과 정성 어린 후원으로 드디어 미국 유학의 꿈이 이루어졌다. 심장병 때문에 고동하는 아내, 잠시라도 내 곁을 떠나기 싧어하던 그가 남편의 영달을 위해 혹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불안을 안고도 용단을 내린 것이다. (232.2)
 3개월이 지나 대학원 공부도 제 궤도에 오르고 미국 사회에 적응이 될 만한 그 무렵의 어느 날,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한국에서 전보 한 장이 날아 온 것이다. “네 아내가 소생하리라곤 기대하지 마라.” 전신에 힘이 쑥 빠지고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232.3)
 전문을 들고 강 이라는 친구를 찾았다. 그 전문으로 보아서 생존이 힘들테고 혹시 나간다고 해도 아마 장례식에 참석할 따름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왕에 학업을 다 마치고 나가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232.4)
 그럴 듯한 조언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그 길로 돌아와서 방문을 잠그고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결심했다. 성경을 찾아보며 나의 모든 죄와 잘못을 일일이 눈물로 통회하며 낱낱이 자복하고 아내를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어느덧 먼동이 횐히 텄다. 마루에는 눈물 자국이 마를 줄을 몰랐다. 캄캄하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듯하였다. (232.5)
 다음날 저녁, 두번째 전보가 날아왔다. “약간 호전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하셨구나! ” 감사의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찬장 하나 사달라는 것을 선뜻 사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필요한 가정 집물, 스테이지, 피아노 등 다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들을 즐기기에는 그의 신경이 너무도 피곤했다. (233.1)
 6.25를 석 달 앞둔 어느 날, 집에서 황급히 연락이 왔다. 나 오기를 간신히 기다렸다가 내 품에 안겨 “아이고,어지러워”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영영 잠들고 말았다. 땅을 치며 발을 동동 굴러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열살, 여덟살, 여섯살짜리 오르르 셋을 두고 눈도 감지 못한 채, 황급히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 나고 만 것이아닌가! (233.2)
 결혼 생활 12년간 시동생 시조카들 대학 공부 뒷치닥거리에 너무도 힘겨 웠던 그의 과로, 마음 깊숙이 쌓이고 쌓였던 한 많은 사연, 아물 줄을 몰랐던 마음의 상처, 그는 과연 하루도 몸과 마음이 편히 쉴 날이 없이 한숨과 눈물에 찬 가시밭을 걸어갔다. 그러나, 언제든지 얼굴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고난과 역경과 빈곤을 걸어간 승리의 인간이다. 그를 집근처 산에 안장하였다. 나는 밤마다 무덤을 안고 울부짖었다. “하나님, 모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이렇게 하셔야만 하겠습니까? 그 뜻을 알려 주옵소서.” (233.3)
 3개월 만에 기도의 응답이 왔다. 미국서 올 때 가져 온 고성능 라디오를 이불 속에서 들으니, 한국 방송과는 달리 일본 방송은 “게이죠노 뉴죠와 곤묘니찌노 아이다니 세마레리” 즉 서울의 입성이 금명간에 절박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서운 난전에 미리 데려가셨으니, 이제야 주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슬픔은 감사로 변하고 더욱 주님만을 굳게 의지하게 되었다. 어린 것들을 무릎 앞에 모아 앉히우고 “우리의 원수가 우리의 생명을 취하면, 다함께 잠들자. 우리 다시 부활할 때 엄마도 같이 만나면 좋지 않아?”했더니, 다 좋다는 것이다. 함께 기도하고나니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 이윽고 이북 보건부 책임자가 병원을 접수하고 오랫동안 정든곳 아니 내 청춘을 불사른곳 내 아내가 묻힌 곳을 뒤로 하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놓았다. (2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