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과학이 일어나면서 합리주의도 함께 나타나, 인간의 이성을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년)는 1637년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공리(公理)를 참지식에 이르는 기본 원칙으로 공표하면서 철학적 혁명을 시작했다. 신실한 로마가톨릭교도였던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필요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없었지만 그의 철학은 불가피하게 이성과 계시 간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그의 후배이자 그의 추앙자였던 바루크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1677년)는 데카르트를 넘어 이성의 영역과 계시의 영역(분명하게 성경을 지칭함)을 첨예하게 구분하고, 이성을 성경에서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최종적으로 판별하는 결정적인 요소루 삼았다. 스피노자는 성경에 있는 많은 점들을 이성을 거스르는 것으로 여기고 그에게 부인할 수 없는 모순들로 보이는 것을 지적했다. (76.4)
 스피노자에게서 볼 수 있는 현대 성경 비평이 일어난 것을 성경에 대한 합리주의적인 접근 및 하나님의 계시의 역할을 축소하는 견해와 상관시켰다. 다른 요인들도 이런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십중팔구 처음으로 성경 비평에 대한 전폭적인 현대적 저작이었을 〈구약에 대한 비평 역사〉 이라는 책이 1678년에 출판되었는데, 그것은 저자인 프랑스 사제 리샤르 시몽(1638-1712년)에게 “성경 비평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하였다. 시몽은 성경만으론 불충분하며, 따라서 성경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위해 교회의 권위와 전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엔 개신교도나 로마가톨릭교도 모두 성경을 그렇게 비평적으로 다루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76.5)
 영국에서 이신론자들의 비평은 특히 구약에서 도덕적 결함으로 여겨진 점들에 주요 강세를 두었다. 1693년에 찰스 블런트(1654-1693년)는 〈이성의 신탁(Oracles of Reaseon)〉이라는 제목으로 소논문과 편지의 모음집을 출판했다. 여기서 블런트는 특별하게 계시된 종교의 필요성을 일체 부정했다. 일반적으로 이신론자들은 자연 종교에 이성이면 충분하며 진정한 그리스도 교란 이성의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같은 그리스도교의 신비들은 원래의 단순한 그리스도교 신앙에 속하지 않고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1692년에 시작된 그 유명한 보일 강의(Boyle Lectures) 중 다수는 계시의 주제를 다뤘다. 조셉 버틀러(1692니752년)는1736년에 〈자연 종교 및 계시 종교와 자연의 구성 및 행로와의 유비〉에서 초자연적 종교에 대한 반대 가운데 다수가 자연 종교를 반대하는 데도 마찬가지로 유효한데, 둘 다 설명할수 없는 신비들로 제시되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버틀러는 신적인 계시의 문제에 대해 귀납법적으로 접근할 것을 강조하면서, 블런트 등과 같은 이신론자들과 달리 신적 계시에 따라야하는 어떤 전제 조건을 적용하는 걸 거부했다. (77.1)
 다수의 영국 학자들은 성경에 대한 도덕적 및 역사적 비평을 교묘하게 우회하면서 성경의 영감이 부분적이며 차등이 있다고 주장했다. 영감의 차등 이론은 신앙 및 실천과 관련해서는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지지하지만 성경에 역사적 오류와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존 웨슬리(1703-1791년)나 찰스 시미언(1759-1836년) 같은 이들은 합리주의적인 신학과 그런 타협을 하지 않고 성경의 완전 영감과 무류성을 지지하였다. (77.2)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신적 계시의 필요성과 본질 및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놓고 일어난 논쟁은 영국 이신론자들의 문학으로 가열되어 다른 나라들에도 영향을 끼쳤다. 영국 이신론자들과 그들의 문학에 흠뻑 젖은 프랑수와-마리 볼테르(1694-1778년)는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계시 종교를 신랄하게 비평했다. 영국 이신론자들의 저작들은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고등 비평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의 저술가이자 극작가인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1729-181년)은 1774년과 1778년 사이에 헤르만 자무엘 라이마루스(1694-1768년)가 전에 쓴 〈합리적인 하나님 예배자들에 대한 변증〉이라는 미간행 글에서 일곱 개의 단편을 뽑아 출판했다. 이 단편들은 초자연적 계시를 반대하는 이신론자들의 기존 논증을 제시했다. 이적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포함한 역사적 기록들은 단지 상대적인 확실성만을 가질 수 있고 이성의 진리들도 역사로써 입증될 수 없다고 레싱은 주장했다. 레싱도 계시를 완전히 부인하진 않았지만 1780년에 출판한 〈인류의 교육〉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계시를 교육과 비교했다. 교육이 어떤 것들을우리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처럼, 계시는 우리의 이성으로 발견할 수 있는 진리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성이 온전하게 되면 계시는 사실상 쓸데없는 것이 된다. (77.3)
 D. 현대의 견해들
 계시와 영감의 교리는 지난 2세기 동안 신학적 논쟁에서 주요 이슈로 부상했다. 이와 관련된 주제들에 관해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문헌은 때로는 암암리에 그리고 때로는 거세게 그리스도인들을 도전했다. 성경의 진실성과 권위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에 대한 신앙이 다방면에서 침식되고 있는 게 분명하다. (77.4)
 18세기 합리주의적인 접근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프리드리히 쉴라이어마허(1768-1834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로 상정(想定)했다. 그는 계시의 개념을 “종교적 교감이라는 토대에 놓인 사실의 독창성”으로 정의했으나 계시의 인식 작용은 수용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계시를 원초적으로, 본질적으로 교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Schleiermacher 50). 그가 보기에, 영감은 단지 종속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이었다. 명백하게 그는 교리를 형성하는데 신약에만 성경의 권위를 제한했다. 성경보다는 종교적 경험이 영적인 진리와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신학의 구심점이 점차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내재적인 것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78.1)
 인간에 강조점을 둔 19세기의 자유주의적인 현대 신학은 인간의 진보에 대한 강한 믿음과 소위 교조주의와 성경숭배에 대한 비평적인 태도를 결합시켰다. 이런 신학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을뿐이다 성경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의식의 최상의 발현 또는 최고의 도덕적 모본으로 아는 종교적 체험의 독특한 기록이다. (78.2)
 인간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과학과 기술공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더 강화되었다 찰스 라이엘(1797-1875년)과 찰스 다윈(1809-1882년)이 낸 저술의 영향을 받아 지질학적인 균일설과 생물학적 진화론이 창세기의 창조와 타락과 범세계적인 홍수의 역사성에 대한 신앙을 침식했다. 더 나아가 성경 역사의 신빙성과 성경 본문의 정확성 그리고 성경의 다수의 저자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등도 역사 비평과문학 비평의 결과로 여겨지는 것들로 인해 식어졌다. 비평적 방법론을 지지한 자들의 전제는 미래 예언 같은 초자연적인 계시나 신적 개입을 제외시키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성경을 다른 책들처럼 연구하고 그것을 기타 고대의 문학과동등하게 여겼다. (78.3)
 계시와 영감의 개념은 새로운 신학에 맞추기 위해 재해석되었다. 독일에서 알브레히트 리췰(1822-1889년)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이상의 나타남으로 계시를 정의했다. 영국에서 존 프레더릭 데니슨 모리스(1805-1872년)는 계시를 영혼에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드러남으로 보았다. 종교사학파와 역사비평 방법의 선도적인 대표자인 에른스트 트뢸취(1865-1923년)에겐 모든 사건이 역사적인 상대성을 지니기 때문에 어떤 신적 계시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다. 트뢸취는 성경의 자료를 포함하여 역사적인 자료는 유추의 원리에 의해 평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유추의 원리란 과거의 사건들은 현재의 사건들과 유사성을 가질 때만 개연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역사 비평의 원리에 비추어 판단하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같은 성경의 많은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간주될 수 없었다. (78.4)
 20세기 초반에 발생한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진보에 대한 꿈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신의 내재성을 강조한 지배적인 신학의 부당함이 드러났다. 카를 바르트(1886-1968년)는 이런 신학에 대한 반동을 개시하였다. 그와루돌프 불트만(1884-1976년), 에밀 브룬너(1889-1966년) 같은 신학자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전적인 타자로 강조했다. 바르트는 말씀의 신학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에 따르면 하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유일한 계시라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성경과 전파된 말씀은 단지 계시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로써 그런 증언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78.5)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계시를 그들의 신학의 중심부에 올려놓았지만 성경을 단지 그 계시에 대한 결함이 있을 수 있는 인간의 증언으로 간주해 버렸다. 이들은 앞선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역사비평 방법을 성경 연구와 성경 해석의 필수적인 것으로 지지하면서, 성경의 권위나 영감 및 진리 같은 개념들을 거부하거나 재해석하였다. 브룬너는 명제적 진술이 아니라 ‘나와 너’의 만남에 진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78.6)
 계시와 영감에 대한 이해의 근본적인 갱신과 변화가 요구되는 상황에 맞닥뜨린 다양한 교파의 신학자들은 성경 자체의 가르침에 호소하여, 계시의 개념에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형태의 초자연적인 현현과 의사소통 즉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이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칼 F. H. 헨리(1913년-)가 여섯 권으로 이뤄진 그의 방대한 저작〈하나님, 계시, 권위〉(1976니9833년)에서 그런 견해를 포괄적으로 제시하였다. 20세기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성경의 완전/언어적 영감 및 성경의 무오성을 지지했지만 이 용어들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라크 H. 피노크(1937년-) 등 다수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개념들을불편하게 여겼다. (79.1)
 현대 자유주의 신학, 성경 비평, 진화론 등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 로마가톨릭교회는 계시와 영감 교리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교황의 회칙(回動)들은 현대주의자들의 입장을 거부하고 트렌트 공의회에서 천명된 전통적인 가톨릭의 견해를 견지했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에 걸쳐 이런 입장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피우스 12세가 1943년에〈성령의 감동으로〉라는 회칙을 발행한 이래로 가톨릭 학자들은 신속하게 비평주의 성경학자들의 선봉에 가담했다. 이렇게 하여, 에이버리 덜레스의 저작〈계시의 모델들(1983)〉에 나타난 대로 계시와 영감에 대한 매우 다양한 이론이 생겨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 번째와 마지막 회기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적 헌법”을 반포하고, 하나님을 본질적으로 함께 묶여 있는그분의 행위와 말로 나타난 계시의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에 관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친밀한 진리가 계시의 중개자이며 총체인 그리스도 안에서 비쳐나온다.”(Flannery 751). 이 헌법은 트렌트공의회가 취한 입장, 곧 “성경과 전통을 모두 동일한 헌신과 존경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했다(위의 책, 755). (79.2)
 어떤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의 입장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그리스도교 전통의 일치점과 권위에 더 큰 강세를 두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여러 세기 동안 개신교의 근본적인 원칙으로 지켜져 왔던 솔라 스크립투라 원칙이 힘을 잃기 시작하는 것 같다. (79.3)
 E. 재림교회의 이해
 최초기부터 재림교회는 출판물들을 통해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 받은 말씀으로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화잇은 1847년〈작은 무리에게 보내는 말씀〉이라는 팸플릿에서 간명하게 말했다. “성경은 완전하고 완성된 계시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닌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규준이다.”(13). 하지만 여러 해 동안 교단의 출판물들을 통해 계시와 영감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전혀 없었다. (79.4)
 1874년 당시 대총회장으로 봉직하고 있던 조지 버틀러(1834-1918년)는 〈에드벤트 리뷰 앤드 쌔버쓰 헤럴드〉에 기고한 연재 기사를 통해 영감의 차등 이론을 주장했다. 그 이론은 얼마 동안 약간의 인기를 누리긴 했지만 재림교회 내에서 계속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기계적 받아쓰기 영감 이론도 마찬가지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완전 영감과 사상 영감은 폭넓은 지지를 받았지만 교회가 계시와 영감에 대한 구체적인 교리를 형성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100년도 넘게 재림교인들은 기본 교리의 다양한 진술을 통해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주장했던 신념들을 반복하거나 발전시켰다. (79.5)
 1980년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열린 재림교회 대총회(5년마다 열림)가 채용한 최근의 기본 교리 진술은 한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무한하시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지만 그분의 자기 계시를 통해 알려진다.”라고 천명했다(No. 2). 삼위 하나님에 관한 이런 자기 계시는 아들의 성육신 곧 육신이 되신 말씀 안에서 가장 온전하게 표현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고 하나님의 품성이 계시되고 인간의 구원이 완성되며 세상이 심판받는다.”(No. 4). (79.6)